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Kafka Franz
박홍규 지음 / 미토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징벌
  - 카프카, 나의 카프카 12

 1

어둠이었습니다. 세상은
열리지 않는 門 이었습니다

어둠 한 조각 도려내어
한 줄기 길을 트려 하였습니다
눈빛만 벼렸습니다. 새파랗게

 2

거미줄 迷路
내 손바닥에 펼쳐져 있습니다

 3

눈이 아픕니다
죽도록 벼려온 어둠의 칼
나 이제 허덕이며
엎디어 받습니다

나 아직도
門 앞에 있습니다 무쇠門 앞에

  94년 여름 민음사에서 나온 독문학자 전영애 시집 <카프카, 나의 카프카>를 오랜만에 꺼내본다. 이 시집 이후 그녀가 계속 시를 쓰고 있는지 어떤지 난 알지 못한다. 박홍규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를 읽다가 거론된 그녀의 이름 때문이다. 이 시집을 산 이유는 오로지, 제목 때문이었다. 그녀가 카프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망은 ‘글쓰기’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을 뿐이었다. 카프카를 전공했고 프라하에 다녀온 그녀의 이야기는 오로지 ‘카프카’를 위해 바쳐져 있다. 얄팍하고 빛바랜 그녀의 시집은 오래된 카프카에 대한 기억의 조각을 꺼내게 했다.

  카프카 전집 발간사에 소개된대로 카프카는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박홍규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간 전영애와 같은 독문학자들과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분석되어진, 혹은 규정되어진 카프카를 재해석하기 위해 이 평전을 썼다. 저자의 초점은 분명해 보인다. ‘권력과의 투쟁’이 그것이다. 가깝게는 가부장적 권위에서부터 멀게는 국가 권력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찾아내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법을 전공한, 글쓰기를 병행하는 박홍규 교수가 카프카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과 개인적 애정은 각별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어쨌든 ‘평전’이라는 형식은 객관화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면 또 다른 시각에서 카프카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는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생을 마감했고 모든 원고를 태워달라고 부탁한 친구 브로트에 의해 빛을 본 작품들도 많다. 1937년과 1957년 두 차례나 그의 평전을 썼던 친구에 의해 말해지는 카프카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카프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과 그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 입장이든 사회주의적 시각이든 심리학적 분석이든 간에 카프카는 20세기에 가장 주목받은 텍스트가 되었다. 체코인으로 태어나 프라하에서 거의 전 생애를 마감한 그의 생은 같은 유태인이면서 20세기의 천재로 추앙받는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 마르크스와 더불어 플러스 알파가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엔 공감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모든 평전이 그러하겠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평전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카프카의 생을 음미해보고 작품을 이해하며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읽을 필요가 없다.

  더구나 카프카의 작품을 분석하기 위한 평론가의 평전은 표현론적 관점에서 작품과 그의 생애를 직접 연결시켜 분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박홍규는 순수한(?) 카프카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쉽고 단순하게 카프카를 표현한다. ‘나의 친구’라는 표현이 그렇다. ‘불안과 고독’이나 ‘소외와 부조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을 관찰하고 모든 권력에 대한 거부의 몸짓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어내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부분들도 많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전공을 위한 것도 평론이나 작품 분석을 위한 것도 아닌 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책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전방위적 독서와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박홍규의 ‘카프카’ 이야기는 결코 가볍고 만만하지 않다.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카프카와 그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있게 그리고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 소상하게 밝혀 적고 있다. 카프카의 생애와 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지적이다. 특히,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용하면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가정환경과 가족관계는 그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카프카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사랑했던 은 여인들과 41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이유는 고스란히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작품 세계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다만 개별적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당연히 저자는 카프카에 대한 진한 애정과 깊이 있는 관련 문헌들에 대한 꼼꼼한 분석으로 카프카를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미 열 다섯 살의 카프카는 엄청난 독서가이고 격렬한 토론가이며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위험한 사상으로 여겨진 사회주의자였다. - P. 189

  저자가 카프카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는 문장이다. 카프카에 대한 평가는 그 개별적인 의미를 넘어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의 난해하고 어려운 해설과 감상의 길잡이 때문에 오히려 어렵고 딱딱한, 이해하기 힘든 작가로 여겨지는 카프카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의 일기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전하는 다음 구절은 ‘문학’과 ‘독서’에 대한 주먹질로 이 평전을 통해 오래 기억될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사의 문제라기 보다도 민중의 문제다”(1911년 12월 25일 일기) - P.271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들의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바겐바하, <카프카>, 51-52쪽 재인용) - P. 274


06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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