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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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상을 꿈꾼다.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공상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즐긴다. 자끄 라캉이 구분해 놓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혼동은 휴머니즘과 진보를 모토로 출현한 모더니즘의 연상선상에 놓여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도 여기에 속한 범주로 이해하면 개념이 혼동일지 모른다. 내게는 그렇게 읽혔으니 바로잡는데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변과 경계를 즐기는 버릇은 책읽기에도 곧잘 반영된다. 현실과 환상의 핵심에서 벗어나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를 기점으로 모더니즘이 출발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지금, 여기’의 실체에 대한 역설을 반복한다. 전도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는 이 책은 끝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 개념으로 활용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전도서

  벤야민이 말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의 개념과 홀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부터 비롯하여 기계기술의 발달과 현대 사회의 왜곡된 현상들을 해석하는 보드리야르의 시각과 해석은 독특하다. 그의 개념에 동의하느냐 문제는 별개다. 현대사회를 통찰하는 시선의 낯선 방향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유발하는 것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다.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시뮬라트르’가 참된 것이라는데.

  시뮬라시옹은 환상과 허구다. 그러나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조작된 현실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미지도 결국 실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실재를 감추고 변형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혼동 속에서 대중은 실재보다 이미지에 집착하고 현혹된다. 때로는 실재의 부재를 감출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박제된 현실 속에서 환상과 이미지를 찾아 떠나는 피곤하고 긴 여행중인 현대인들의 나른한 일상을 비추어 볼수 있는 프리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시뮬라시옹’은 아닐까.

  텔레비전과 ‘홀로코스트’, 영화와 ‘충돌’이 빚어내는 시뮬라크르는 역사와 현실은 넘어선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모방된 이미지와 개념을 오히려 현실이 따라야 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끝임없는 쏟아지는 광고와 자본은 인류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딘가를 어떤 모습으로 걷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집단 환각제를 마신 것같다. 실재계와 상징계는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대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치환되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실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 왔고, 그 속에서 헐떡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모방된 현실과 가상 현실은 인간관계도 변화시켜 버렸다. 네트웍과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보드리야르가 바라본 이미지와 실재의 괴로보다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미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말한다 : 의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서 의미가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를 강요했던 것, 의미가 빛들의 지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것, 즉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유혹이 시작된다. - P. 252

  이 책의 마지막이다. 무의미와 허무의 유혹만큼 강렬한 환각은 없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유혹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이다. 모호한 언술로 대중을 농락하는 철학자의 말장난이 아니라 뒤돌아보지 않고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경종을 귓가에 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의 실존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론 측면에서, 혹은 사회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개념과 논의들은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모습이다. 안다는 것만으로 부족한 2%는 우리 모두가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무질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질서’가 가져오는 소외와 폭력적 외로움을 전하는 듯한 브레히트의 말이 오히려 가슴에 오래 남는다.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곳,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그곳, 이것은 질서 : 브레히
트 - P. 241


  윤난지의 <현대미술의 풍경>을 읽다가 개념이 잡히지 않아 읽게 된 책이다. 변죽만 울리고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한 채 인용과 재인용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는 책들과 개념들을 다시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하이퍼링크 책읽기’의 즐거움이다.


06021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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