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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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가장 가혹한 올가미에 불과하다. 단 한 순간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에게 분절적인 개념의 시간 단위가 편리한 것만은 아니다. 시간은 자연의 흐름을 불연속적으로 잘라내고 구분짓고 규정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수량화, 계량화 된다. 우리의 삶도 그럴 수 있을까?

철학의 제문제는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는 아니지만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삶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철학의 임무는 아닐까. 윤리학에서 그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선악의 가치 판단을 논하기 전에 인간의 문제를 명료화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철학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읽고 공감할 수 없다면 그것을 위대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예를 들어 단 한 권만 팔린, 가장 훌륭한 문학 작품은 상상하기 어렵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모태로 수많은 책들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적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원작을 뛰어넘을 만한 현대적 의미의 고전으로 꼽을 만하다. 문학의 보편성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비판한다. 또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철학적 책읽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될 수 없음을 웅변하는 이 책은 단순히 고전의 재해석이나 현대적 각색이 아니라 풍부한 울림을 주는 정교한 구조물과 같다.

그것은 무인도라고 하는 본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환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아와 타자의 문제 등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민에 빠지는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읽을 만하다. 이 소설은 한 문장의 완결성과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감이 일반적 의미의 소설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사건 위주의 스토리 전개가 구성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버지니아호의 좌초로 무인도에서 깨어난 로빈슨의 사유가 이 책의 흐름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작가의 말에 몰입하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고 망망대해를 표류할 수도 있지만, 천천히 그의 말과 로빈슨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형언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만나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1711년 4년 4개월 만에 태평양의 마스아티에라에서 셀커크가 발견된 후, 다이엘 디포는 1659년 9월 30일부터 1686년까지 28년 2개월 10일 동안 대서양의 카리브 해의 어느 섬에 사는 로빈슨을 탄생시킨다. 이에 비해 투르니에는 1759년 9월 30일부터 1787년까지 28년 2개월 19일 동안 태평양의 스페란차 섬에 로빈슨을 살게 한다. 원작에서 프라이데이가 이 책에서는 주인고으로 전면에 나선다. ‘방드르디’는 금요일이라는 뜻의 ‘프라이데이’의 프랑스어 이름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디가 살아가는 스페란차의 섬의 실질적인 주인은 로빈슨이라기보다 ‘방드르디’이다. 영국 백인이며 독실한 기독교인 로빈슨에게 섬에 도착한 이후 시간은 오로지 과거만을 의미할 뿐이다.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 49쪽

무인도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은 과거의 자산을 늘려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꿈과 고독 사이의 내밀한 통로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로빈슨은 피부색이 다른 원주민 방드르디를 극적으로 구해낸다. 죽음의 순간의 생명의 은인을 만난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노예가 되지만 둘 만의 섬에서 그는 결코 노예가 아니다. 피부색과 종교, 언어와 삶의 방식이 극단적이었던 둘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해석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이다. 김화영의 해설대로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의 부재가 로빈슨의 행동, 사고, 지각에 끼치는 영향’이 이 작품의 철학적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로빈슨이 아니라 방드르디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은 단순히 원작의 전복이 아니라 ‘타자’를 중심에 놓는 방식의 삶에 대한 성찰이다.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자아’ 중심의 세계관이 아니라 ‘타자’를 통한 내 삶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 유연하고 상대적인 처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방식의 패러다임을 전환을 촉구하는 듯하다.

1장부터 12장까지 각 장들의 내용과 의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로 던져 두어도 좋으리라. 책 전체의 흐름을 분석해 놓은 김화영의 해설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음미한 후에 할 일이다. 어쨌든 11장에서 ‘화이트버드호’의 등장으로 인해 마지막 반전이 일어난다. 자신의 배가 난파된 후 스페란차에 도착한 후 2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인간의 시간을 알게 된 로빈슨의 반응은 선장과 화이트버드호에서 식사를 한 후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로빈슨이 볼 때 악(惡)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들 모두가 열에 들뜬 듯이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목적의 어쩔 수 없는 상대적 성격이 바로 악의 바탕이라 비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 목적이란 어떤 획득, 어떤 부(富), 어떤 만족 따위였다. - 304쪽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선택은 반전 영화의 결말처럼 남겨두자. ‘죄디(목요일)’로 거슬러가는 시간의 역행은 무엇을 의미하며 로빈슨의 선택은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정답은 없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는 미셸 투르니에의 실존적인 질문들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시간’과 ‘타자’와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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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2-3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준비해두었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책인데 리뷰를 보니 빨리 읽고 싶어집니다.
2010년의 마지막날이네요. 새해에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 행복하세요.

sceptic 2011-01-06 22:29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습니다. 반딧불이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지으세요.
 
푸드 룰 - 세상 모든 음식의 법칙
마이클 폴란 지음, 서민아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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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 도발적인 질문은 춘천에서 습작시절 이외수가 춥고 배고팠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에서 읽었던 인상적인 질문이다.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집착과 관심과 열정은 대단하다. 음식은 맛은 물론 향과 모양으로도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좋아하는 음식에 따라 성격을 파악하기도 하고 취향을 짐작할 수도 있다. 그만큼 수많은 음식은 나름의 표정과 특징을 갖고 있다. 마치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그래서 음식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만큼이나 음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음식은 곧 생존이다. 하지만 이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절대기아로 굶어죽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지구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통제하기 힘든 식욕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긴다. 굶어죽지 않을만큼 살게 되면서 이제는 음식을 ‘건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웰빙 바람을 타고 유기농에 대한 관심과 로컬푸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발효식품을 통해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기도 한다. 인스턴트 음식과 탄산음료로 대표되는 정크푸드에 대한 경각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음식은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고 우리 삶에서 건강과 직결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드물지만 나처럼 음식에 무관심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못 먹는 음식도 없다. 배고 고프면 먹지만 음식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음식에 대한 욕심도 없고 좋아하는 음식도 없다. 때로는 끼니마다 먹는 일이 귀찮을 때도 있다. 어떤 음식이 생각나거나 무얼 좀 먹고 싶다는 생각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어떤 맛집이라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여긴다. 태생적으로 위가 약하고 소화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즐거움의 하나인 먹는 즐거움을 모른다. 어찌됐든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식동물인 인간에게 음식은 여전히 가장 본질적인 삶의 일부이다.

『푸드룰food rules』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음식에 숨어있는 많은 비밀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고,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과 과학적인 상식들도 생각났다. 세상의 모든 음식에는 나름의 법칙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책은 수많은 음식의 특징과 조리법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지켜야하는 식습관 매뉴얼쯤 되는 책이다.

이 책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새겨들을만한 음식에 관한 충고들이 명확하고 조리있게 설명되어 있다. 마치 어떤 기계의 매뉴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 저자의 목소리가 강하게 배어 있다.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고 강한 목소리로 조언을 하기 때문에 웃어넘길 수가 없다. 얄팍한 책으로 1~2시간 정도면 읽어볼 수 있어 부담이 없고 그 내용은 평생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음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곁에 두고 때때로 확인하고 싶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음식을 먹어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되도록 식물을 먹어라.

무엇을 먹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황당하게도 음식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음식’이 아닌 먹을 수 있는 물질이 너무 많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음식’을 먹고 살자는 말은 가장 기본적인 수칙이며 음식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충고이기도 하다.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어야 할까? 대체로 식물을 먹으라고 것이 저자의 충고이다.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어도 대체로 혹은 되도록 식물을 먹으라는 이야기이다. 육식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잡식성 동물에게 던지는 충고라기보다는 육식 위주의 식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충고이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먹어야 할까? 너무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 식욕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음식을 초래하는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 책은 이렇게 간단한 세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음식’을 먹되 주로 ‘식물’을 ‘너무 많이 먹지 마라’ 건강과 행복을 지켜나갈 수 있는 수많은 책들 속에서 음식에 관련된 책들도 수없이 쏟아진다. 이 책은 다른 책과 구별될 수 있는 뚜렷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한다. 다만 간명한 문장과 짧은 글들이 모여 음식에 관한 64가지 법칙으로 제시된다. 이 룰에 의해 사람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해 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음식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먹고 사는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갖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오늘 하루 무엇을 먹었든, 또 무엇을 먹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든 맛과 향과 건강까지 고려한 즐겁고 행복한 ‘음식’이었으면 좋겠다. 저자도 바로 이런 목적으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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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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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눈 먼 아버지를 두었다면 심청이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장화와 홍련이는 왜 순순히 죽음의 길을 택했을까?’ 우리 고전 소설을 읽다보면 현실에서 찾기 힘든 인물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문학은 새로운 경험과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어야 하며 동시에 개연성(probability)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하지만 초기의 소설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많다. 귀신과 사랑을 나누거나 염라대왕을 만나기도 한다. 흥미와 감동이 전해진다면 사실성(reality)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현대소설과 달리 고전소설은 이렇게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즐길 수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시대정신(zeitgeist)’은 당대의 진실을 함축한다. 소설은 이러한 시대 정신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그 범위가 넓고 좁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그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 온 것이 바로 소설이다. 누구나 쉽게 읽고 즐길 수 있으면서도 눈물과 웃음,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소설이야말로 우리 고전 문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청이, 장화와 홍련이, 길동이, 흥부와 놀부, 옹고집, 변강쇠 등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그리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성격을 창조한다는 측면에서 소설 속의 인물(character)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거나 현실의 전형적인 인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인물 유형이든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고 건강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완전할 수 없듯이 소설 속의 인물들도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고전 소설에는 「사씨남정기」의 유연수와 사정옥처럼 재자가인(才子佳人)이 등장하여 우리를 기죽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어느 한 구석이 부족하다. 그 결핍이 갈등의 근원이 되고 관심의 초점이 되며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독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모습은 잘 들여다보면서 나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기껏해야 거울을 통해 나의 생김새와 앞모습을 왜곡된 형태로 바라볼 뿐이다.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마음의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올라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과 동정, 분노와 비난의 감정을 느낀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내 마음 안의 상처를 위로 받기도 하고,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우리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는 계속해서 시도되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태어나 화석이 된 고전이 아니라 현재적 유용성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 고전이다. 문학의 보편성은 삶의 보편성이며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적 보편성이다.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는 이러한 보편성을 바탕으로 우리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고전읽기의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고전문학 작품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유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짊어졌던 강박증부터 피해의식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도 고스란히 겪고 있는 스트레스성 질병들을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단순하게 효녀나 영웅으로 볼 수 없는 인간적 상처가 너무 많다. 이 상처들은 고전문학의 인물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가. 그 아픔을 극복하고 상처를 보듬고 단단하게 성장하는 과정이 우리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고전문학은 오래된 옛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오래된 미래를 보여주는 지혜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신동흔과 고전과출판연구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 책은 젊은 고전문학 연구자들이 ‘문학치료’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고전 속 인물들을 분석하고 있다. 1부 내 마음 속에 귀신이 산다와 2부 상처 입은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로 나누어 「장화홍련전」부터 「변강쇠가」를 거쳐 「한중록」을 더듬고 「상사뱀설화」를 통과하여 「흥보가」에 이르는 고전여행을 즐겨보자. 목적은 ‘자기 서사의 발견!’ 이 책은 고전문학을 다시 읽고 뒤집어 생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심리를 분석하여 ‘나’를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람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문학을 ‘자기서사’라고 하는데 문학치료학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각자 ‘자기서사’를 점검해 보자는 의도가 이 책을 만들었다.

몸이 아프면 금방 병원에 가는 사람들도 마음이 아플 때는 회피, 외면, 인내 등의 방법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은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어떤 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고전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나를 비추어보고 ‘포용의 서사, 신뢰와 성장의 서사’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다.

우리 마음속의 고전은 영원한 고향처럼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지치고 힘들 때 다시 꺼내 보고 함께 울고 웃으며 ‘자기서사’를 점검하고 또 힘을 내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고리타분하고 지겨운 고전을 생각하지 말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고전 속의 친근한 인물들을 다시 보자.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인물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이면에 숨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내 안에 숨어있는 아픔과 고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들과 함께 우리들의 삶은 조금 더 건강하고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어보자. 그러면 책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누구보다 진실한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10122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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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플레이어 - 왜 우리는 열광하고 그들은 세상을 지배하는가
매슈 사이드 지음, 신승미 옮김, 유영만 해제 / 행성B(행성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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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성장 기간이 매우 긴 편이다. 사춘기가 지나면 육체적 성장이 끝나고 스무 살이 넘어야 사회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성인이 된다. 고요한 수면 위의 백조는 정중동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면 아래 오리발의 움직임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승자 독식 사회로 명명되는 이 시대는 수면 아래 부지런한 발놀림이 아니라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흰 백조의 눈부신 아름다움에만 주목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과연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인가.

자연스러움은 거침없는 부드러움과 막힘없는 흐름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부단한 노력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한 것이어도 좋고 과학적인 이론과 고도의 지적 능력이 뒷받침된 움직임이어도 좋다. 다만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노력 없는 결과가 어떻게 찬란할 수 있으며, 아름답게 빛날 수 있겠는가. 매슈 사이드의 『베스트 플레이어』는 지극한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쏟아지고 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나 독특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몫일뿐이다. 내 몸에 맞는 옷은 정해져 있듯이, 숙명론적 세계관을 가지라는 말은 아니지만, 자신의 특성을 먼저 파악하고 그에 맞는 방법과 연습이 필요하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성격과 행동 특성들이 존재하는 한 동일한 기준과 방법은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조금씩 노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고 생의 즐거움을 얻는다. 이 책의 저자인 매슈 사이드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몇 가지 안내와 충고로 힘을 보탠다. 하고자하는 의지와 성실한 자세가 뒷받침 된 사람이라면 저자의 몇 가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최고는 남과 경쟁하지만 유일한 베스트 플레이어는 자신과 경쟁한다.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방식을 찾아서 즐겁게 하다보면 의미심장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 - 7쪽

책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너무 많이 인용되어 식상하기까지 한 공자님 말씀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따를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따를 수 없다. 지극한 자기만의 세계와 즐거움을 찾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게 된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어떤 분야를 개척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 분야에서는 금방 전문가가 된다. 이 책은 타이거 우즈, 윌리암스 자매, 영국 탁구의 전설적인 플레이어를 예로 들어 설명하지만 그것은 스포츠 분야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스트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해 보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갖춰야 하며, 재능이 아닌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시작이 어떠하든 과정과 결과에 주목하며 그들의 플레이를 살펴보자. 지식과 경험의 산물인 ‘통찰력’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책읽기처럼 천부적인 재능은 없다. 다만 내적 동기와 끝없는 훈련만이 놀라운 기적을 만든다. 사람들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애써 외면하고 출발선이 다르다는 핑계로 불공평을 탓한다. 인종주의도 말하자면 유전적 우월성과 열등감에 대한 지독한 고정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성공을 부르는 플라시보 효과는 얼마든지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결국 인간이 정신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강한 정신력과 믿음이 어떤 ‘성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그람시의 말이 우리에게 힘이 되는 이유는 우리들의 잠재능력에 대한 믿음과 ‘신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스트 플레이어들이 항상 1등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지독한 실패를 경험한다. 거의 초보자 수준으로 돌아가 버리는 믿을 수 없는 플레이를 ‘초킹 현상’이라고 한다. 어디나 구덩이가 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넘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진정한 베스트 플레이어가 될 것이다.

저자는 전체적인 구조와 패턴을 읽어내는 직관과 투시력이 베스트 플레이어를 만든다고 한다. 물론 베스트 플레이어에게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것처럼 1만 시간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루에 세 시간씩 10년을 투자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을 발견했다면 틀림없이 ‘베스트 플레이어’가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말이다.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계획적인 연습이 계속된다면 어떤 일이든 그렇지 않겠는가.

이 책은 영국의 국가대표 탁수선수였던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의 수많은 베스트 플레이어를 모델로 만들어진 책이다. 운동에 기반을 두고 그 가능성과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적고 있지만,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상황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 즐겁고 행복한 열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제공한다. 열정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 그것은 욕망이나 집착이 아니며 생에 대한 싱싱한 발랄함이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탄력적인 생의 감각을 유지하며 청년 정신을 잃지 않는 나만의 분야에서 ‘베스트 플레이어’가 되어보지 않겠는가.

세상의 모든 자기 계발서가 그러하듯 이 책도 자신이 가진 재능을 믿거나 거꾸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일단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야 한다. 그것은 ‘노력하라’는 단순한 충고일 수 있지만, 진정한 삶의 기쁨에 대한 비밀의 문일 수도 있다. 열쇠가 자기 손에 쥐어 있는데도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많은 이야기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일단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고 비틀어 보는 시도가 ‘시작’이다. 그럼 ‘시작’해 보자. 원제인 ‘바운스bounce’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Boundless Thinking 경계를 넘나들어라!
Only One! 유일무이함을 추구하라!
Unreachable Stnadard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설정하라!
Never-ending Practices 훈련만이 완벽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Challenge the status Quo 한계에 도전하라!
Exceptional Energy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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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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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잘 가.”
여우도 어린 왕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지만 곧 이렇게 말했다.
“아까 말해 주겠다던 비밀은 이런 거야. 뭐 별 것은 아니야. 어떠한 것을 볼 때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
어린 왕자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여우를 따라 했다. 그러자 여우는 다시 한마디 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써 버린 그 시간이란다.”

- 『어린왕자』 21장, 쌩 떽쥐뻬리, 김제하 옮김, 소담출판사, 1990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무언가 아주 조그마한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방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어느 순간, 어떤 계기를 통해 무언가를 조금 알게 된다. 가끔 우리는 책을 읽다가 생각했던 무언가를 문장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이런 문장은 아닐까?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너무 평범해서 말해버리고 나면 피식 웃음이 나오는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부터 세상에 온통 하찮은 것들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한 우정, 사랑, 믿음, 평화, 배려, 나눔, 희망, 여유, 두근거림, 따뜻함, 꿈 같은 것들은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돈’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우울한 자화상이며 현대인들이 피할 수 없는 세상의 ‘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어린왕자에 열광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네 시에 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세 시부터 행복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는 명성만큼이나 거시적인 이론서이다. 세상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왜 그러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이 책에는 과학적 이론에 근접한 신화나 신화 같은 과학적 이론들이 다수 등장한다. 상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력 경연대회를 하듯 이 세상이 탄생한 배경과 원인을 고민하고 있다.

결국 위대한 과학자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위대한 철학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말하자면 ‘과학’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물질적 ‘존재’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철학서이다. 해명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이론은 상상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세상은 무엇으로 시작했고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주는 얼마나 클까?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일까? 존재의 수수께끼는 과학자들에게 영원한 숙제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며 호기심이다.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감을 불어 넣어 준 우주의 신비를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스티븐 호킹은 짤막한 에세이 형식으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현재까지 과학의 역사와 이론을 통해 세상의 질서와 신비를 밝히려는 노력은 단순히 해박한 지식만으로 불가능하다. 각각의 이론들이 가진 특징과 과학자들의 생각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그것의 의미를 밝히면서 현실의 적용 가능성과 문제점을 점검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오류는 무엇이며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한다. 주목할 만한 과학자들이 주장했던 이론적 성과를 토대로 현재 우리가 설명하고 만들어가야 할 이론으로 이 책은 마무리 된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설계’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신은 누가 만들었으며 신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상은 어떠했을까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도 타협도 아닌 이 책은,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생명, 우주, 만물에 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해 다함께 고민해보지 않겠는가. 그것은 과학적 실험에만 의존할 문제도 아니고, 종교적 해석에 기댈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존재’에 관한 고민은 어쩌면 무한한 상상의 세계만이 해답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 ‘우리 개인은 오직 짧은 시간 동안만을 존재하면서, 오직 우주 전체의 작은 부분만을 경험한다’는 문장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주 전체를 고민하는 저자의 노력에 갈채를 보내고 싶다. 생각의 영역을 넓고 깊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먼지가 되어 언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고 싶다면 이렇게 오히려 ‘우주의 신비’와 ‘위대한 설계’에 대해 먼저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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