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세대는 없다 -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신진욱 지음 / 개마고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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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기득권 기성세대’와 ‘희생자 청년세대’ 간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세대 불평등 담론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각 세대의 계층격차 현실과 더불어 한국사회 불평등 구조의 세대 구성을 조명했다. - 10쪽

세대차generation gab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인과 집단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성급한 일반화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뭉개고 정치적 수사로 활용되어 특정 집단, 정당에 대한 비난으로 활용된다.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과 선거에 활용하는 정치인의 발언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는 없을까. 사회학자 신진욱은 『그런 세대는 없다』고 단언한다. 지시어 ‘그런’은 대중문화, 교육환경, 시대 배경 등 통상적으로 느끼는 세대가 아니라 ‘청년 담론’이 본격 적으로 시작된 세대 간 갈등 양상을 의미한다. 신진욱은 1990년부터 2020년까지 30년간 국내 모든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모든 텍스트의 빈도 추이를 주간과 일간 단위로 분석했다. 2011년 8월, 2015년 8~9월, 2019년 9~10월이 지난 30년 동안 가장 의미있는 청년담론의 폭발기였음을 확인한 신진욱의 분석은 짐작되지 않는가.

불평등, 공정, 기득권, 일자리, 청년실업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세대 간 갈등 요인이 사실은 세대 내 담론에 대한 비판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586으로 대표되는 50대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면, “80년대에는 고교진학률부터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전체 학령인구 중 대학 취학자의 비율은 대학진학률에 한참 못 미쳐서, 공식 교육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에 학력인구 중에서 고등교육기관 취학률 평균은 20%였고, 4년제 대학 취학률은 13% 정도 된다.” 10명 중 8~9명은 대졸이 아니다. 지금보다 임금 격차가 극심했고 그들은 여전히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로 살아간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소수의 50대가 청년세대의 일자리를 빼앗고 부동산소득을 독점했다는 착각은 2030세대의 정규직, 소득, 자산 규모에 대한 분석으로 자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세대 간 갈등은 세대 내 불평등의 착시현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공정의 정의 그리고 불평등의 문제에 ‘세대’를 개입시킨 이유와 의도는 무엇일까. 객관적 지표가 가리키는 현실은 자본주의가 배태한 본질적 모순이며 해방 이후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악순환에 불과한 게 아닐까. 87체제 이후 우리가 놓친 문제,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여전히 계급 배반 투표, 정치적 프로파간다 그리고 거시적인 사회구성체에 대한 의제 부족이다. 시대적 화두가 급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사를 돌아보면 대개 사회를 보는 관점과 비논리적 경제 발전의 방향에 대한 이견이 모든 문제를 촉발한다. 그걸 확대 재생산하며 정치와 언론, 기업의 논리가 춤을 추며 혹세무민한 결과는 양극화의 심화, 비정규직 확대, 고용없는 성장, 자영업의 증가로 이어져 청년실업과 노인빈곤으로 나타난다. 

당대의 사회현상을 한두 가지 문제로 압축하거나 몇 가지 정책으로 해결하겠다는 거짓말에 속는 국민들의 고통은 참담하지만 성찰없는 시민은 유사한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 신진욱은 기성세대가 곧 기득권이라는 착각이 한국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가린다고 주장한다. 누가 왜 ‘청년’을 말하는지, 정치 담론에 세대 담론이 희석되는 순간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매일매일 목도하고 있다. 정치는 현실이며 내 삶의 뿌리다. 정치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은 곧 자기 삶에 대한 외면이다. 사회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대 담론이 지워버린 현실과 눈감아버린 삶은 생각보다 처참하다. 

성찰 없는 진보, 대안 없는 보수의 정치 게임에 자기 등이 터져도 감정적 대응과 인터넷 댓글놀이에 몰입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2030과 4050 같은 세대 분리가 가져오는 문제를 들여다보는 신진욱은 “흐르지 않는 물길에 고인물은 오래 되어서 고인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인물이다.”라고 일갈한다. 10대에 이미 고인물이 될 수도 있고 70대에도 흐르는 물이 있다. 숱한 세대론 사이에서 2022년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한 신진욱의 노고와 관점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정치적 이념,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이기적 잣대로 활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독일의 작가 페터 바이스는 그의 장편소설 『저항의 미학』에서 지배에 대한 저항은 연대를 통해 가능해지며, 연대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다고 썼다. 노년의 안도, 중년의 안도, 청년 안도가 서로의 삶과 역사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불평등으로 갈라진 시대를 함께 넘어설 세대 간 연대의 토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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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디언의 굴레 -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차별,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호남의 이야기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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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메시지는 사실 간명하다. 호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남 사람들이 스스로를 직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 27쪽

그러나, 책의 메시지는 간단하지 않다. 조귀동의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은 계층 간 불평등을 넘어 지역으로 옮겨간다. 대한민국의 가히 ‘인종차별’이라 할만한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해묵은 차별은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을까. 단순히 정치인들의 투표전략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저자가 광주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베용어인 ‘전라디언’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표현을 제목으로 내세운 건 출판사의 전략인지, 핵심을 비껴가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도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책은 전라도에 대한 심층적인 사회학적 보고서다. 

우리는 흔히 특정 지역, 특정 세대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무감각하다. 계층과 계급 문제를 세대 갈등으로 치환하며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문제를 비껴가듯 특정 지역과 세대, 성별 문제를 비틀어 범주화하는 언론과 정치권의 언어를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저자는 거시적으로 전라디언의 탄생 배경을 살핀다. 핵심은 물론 정치다. 사회, 역사적 배경을 찬찬히 살피면서 전라도가 어떻게 소외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이용되었는지 분석한다.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일부 국민의 편견과 오해로 치부하기엔 전라도 출신이 겪은 불공정과 불이익의 객관적 수치가 너무 분명하다. 

조선일보 기자의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 대한 관심도 놀랍지만 보수의 반대편인 전라도에 대한 분석과 관심은 단순히 광주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의 분석대로 지역을 탈출해 중산층에 편입했거나 계층 사다리를 뛰어 넘은 전라디언의 정치, 사회적 이념 지형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의 흑인 또는 아일랜드 인이라는 자극적인 1장부터 매우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지금-여기’ 우리가 대한민국을 톺아본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이 아니라 산업화 열차의 꼬리칸에 올라타기도 힘들었던 지역의 경제 상황, 민주당과 결부되기까지의 정치적 배경을 들여다보는 1~3장이 외부에 해당한다면 4장~6장까지는 부패와 무능의 도시가 되어버린 광주와 지방 토호세력의 문제를 분석하고 이중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언에 해당한다.

호남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것인지 고민하는 에필로그는 추상적 담론으로 읽힌다. 구체적인 현실 분석은 디테일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행 선거구제 개편, 지방 분권에 대한 논의, 균형 발전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은 없다. 정책 제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밝혔듯 자성의 목소리에 방점을 두고 있으나, 그건 전라도 출신 저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태도일 터.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의 지적대로 이중 차별과 지역내 계층과 계급에 따른 이해관계의 타파에 있을 것이다. 이는 전라도를 넘어 어느 지역에나 존재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자극적 문제의식을 외면하지 말고 논의의 출발로 삼았으면 좋겠다. 정면으로 응시하며 긴 안목으로 바라봐야 그나마 조금씩 해결책과 의미있는 노력이 이어지지 않을까.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한 전라디언, 복합쇼핑몰로 벌어진 세대와 계층간 견해차가 바로 문제의식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한 이상향을 실현한 시대도 국가도 없다. 다만, 그것이 왜 문제인지 고민하는 사람과 편견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이용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독자가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이런 접근 방식과 태도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계급 이익에 충실한 투표, 이해관계에 따른 이념 지도가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심화시킬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 우리는 추상적 정치 선동과 언론에 대한 비판 의식이 부족한 걸까.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생각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강한 사람들이다. 무지보다 무서운 편견과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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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랭 머랭 - 우리시대 언어 이야기
최혜원 지음 / 의미와재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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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생각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규정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꽃이 되듯, 사물과 타자가 의미를 가지는 건 호명을 통해 존재를 규정할 때다. 그래서 동시대인, 같은 세상을 살아도 각자의 세계는 차이가 크다. 생각하고 느끼는 범주의 크기가 세계의 크기다. 직업, 재산, 성별, 학벌, 종교, 인종, 나이와 무관하게 인간은 각자 다른 언어를 통해 저마다의 크기에 맞는 세계에 산다. 

그 세계가 타인의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낭패다.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의 차이는 각자 구축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각개전투가 아닐까. 언어학자 최혜원의 『휴랭 머랭』은 각자 구축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세계를 점검한다. 공동체의 언어는 시대를 조망하고 욕망을 가늠하며 그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제목 ‘휴랭human language’은 인간의 언어 줄임말이다. ‘머랭machine language’은 기계의 언어를 줄였으나 우리말 ‘뭐라는 거야?’라는 의미의 ‘뭐래?(머랭?)’이라는 의미도 있고, 억지스럽지만 ‘머랭meringue’의 동음이철어로 읽을 수도 있다. 책 내용은 제목처럼 약간의 아재(?) 개그―아재의 정체성이 있는가. 언제부터, 몇 살부터, 남성만의 전유물로서 아재 집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나 아재의 대척점에 있는 아지매 개그는 왜 불가능한가. 아니, 처녀총각, 애기어른 개그는 가능하지 않은가. 유감이 많지만 일단 논점일탈이니 접어두자―를 섞은 유머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비속어, 은어, 유행어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책을 읽기 전에 저자 혹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내용의 전반을 지배하고 때때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유명 저자의 경우 특유의 아우라로 독자를 억압하고, 짓눌린 독자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독서 행위 자체에 감읍하기 일쑤다. 특정 직업, 학력, 성별, 인종, 종교, 나이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니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언어학자’라는 표피를 벗겨내면 언어학 일반 이론에 대한 대중적 재미와 우리시대 언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의미를 함유한다. ‘의미와재미’라는 출판사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언어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트렌드를 포착한다. 언어는 말과 글을 포괄하지만 말과 글은 전혀 다른 층위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그 차이를 설명하느라 애쓴다. 아무리 텍스트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으나 이 책을 읽는 독자만큼이라도 말과 글의 힘을, 언어가 인간에게 주는 재미와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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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캥거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563
임지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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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집도 온라인으로 고른다. 이게 다 ‘코로나’ 탓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밀린 숙제를 하듯 혹은 배부른 허기를 채우듯 시집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 포만감은 느껴지지 않고 더 큰 공허와 무기력에 빠질 때도 있으나 가끔 발바닥을 간질이는 문장을 만나고 겨드랑이가 움츠러드는 표현 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시는 종이로 된 시집을 읽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인용과 crtl+v가 편리한 방법이라는 착각은 시가 주는 깊은 맛과 의미를 포기하는 일이다. 

문지와 창비 시집에도 옥석은 있다. 아니, 취향이 갈린다. 독자마다 다른 입맛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 상황, 감정, 건강, 계절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할머니는 욕을 밥 먹듯이 했다 하루에 한 끼만 드셔야 할 듯’이나 ‘애인에게 이럴 거면 헤어져,가 튀어나오려는 걸 이러지 말자고 고쳐 말했다’는 「언어 순화」가 내게도 필요했기 때문일까. 처음 만난 임지은의 『때때로 캥거루』가 하루를 채웠다. 언어의 깊이와 무게, 이미지를 포착하는 능력 따위는 분석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시인은 ‘유머’라는 강력한 무게를 장착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재개그를 단순한 언어 유희로 폄훼하지만 명징한 언어의 이면을 들추는 일, 다양한 컨텍스트를 활용하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재능이 아니다. 아니, 어지간한 노력으로 챙길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임지은이 아재 개그를 한다는 게 아니라 언어를 향한 탐닉의 정수에 유머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유머는 긴장을 늦추고 관계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는 문제가 없는데 사람이 문제인 걸까요 관계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다가 아, 저 사람은 관계가 필요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고 영영 못 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잘잘못」중에서

이렇게 관계양상을 정확히 비틀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수가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많다 

손가락이 열 개뿐인 건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니다」중에서

자신을 항변하기도 하며, 관계맺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어쩌면 삶이 곧 관계이며, 그 관계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참고 견디는 일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씨를 호출하고, ‘구태여’ 씨가 등장하기도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호출한 시인의 재치와 타인에 대한 애정 혹은 타인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화하기 어렵다. 

사랑 혹은 이별의 고통에 대하여,

한밤중에 전화를 끊는 사람은 

가끔 알약처럼

잘 삼켜지지 않으므로

머리맡에 물 한 컵이 필요하다

-「사람이 취미」중에서

이렇게 직설법으로 토로하기도 하고,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궁금한 게 있었다

너는 모른다고 했다

몰라는 주머니가 있는 동물이 아니었지만

뭔가 담아야 할 것 같았다

고민을 눌러 담자 토끼가 튀어나와 귀를 접었다

몰라의 정체성은 모르는 것에 있었다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다

-「때때로 캥거루」중에서

김보경은 “언어에 자유를 부여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시인. 시의 자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해설 「어느 유머리스트의 슬픔과 자유」중에서, 159쪽)라는 말로 임지은 시집을 정리한다. 언어의 자유는 유머를 통해 가능하고 시인의 슬픔은 관계의 자유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었을까. 공감은 향수처럼 진한 향기를 남긴다. 

인간은 악취 위에 뿌린 냄새 같아서

향수로도 잘 감춰지지 않고

틀어놓은 음악을 함께 듣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 듣느라

천사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대충 천사」중에서

자기 자신만 듣는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숱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사이에서 허탈질 때 우리는 인생의 밝은 면을 기대하지만 그건 오로지 ‘웃음’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함정으로 가득하지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아닌

바로 웃긴 면입니다

-「인생의 밝은 면」중에서

삶의 고뇌와 슬픔의 미학으로 시에 접근하는 대신 유머와 해학으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을까. 웃음은 소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알면서도 눈감고, 없는 것처럼 말하고, 안 보이는 듯 지낼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가끔 가닿지 않는 곳, 이성의 치외법권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불법 주차를 한 상태, 뜨거운 문장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냄비 손잡이가 다 타버린 상태, 하자니 괴롭고 안 하자니 더 괴로워서 치과 진료를 미루는 사람처럼 영혼의 치아 하나가 덜렁거리는 상태, 헬스 트레이너는 볼펜 끝을 살짝 깨문다 운동이 꼭 필요한 상태,라고 적는다

-「건강과 직업」중에서

김지, 박쥐, 큰 지은, 안경 지은, 까만 지은(「모두 다른 지은」중에서)…… 그 많던 흔한 ‘지은’이 중 시인의 흔한 이름이 오래 기억되기를. 이런 비유가 좋다. 선명하고 확실한 이미지로 복잡한 상황이나 언어 이전의 세계 혹은 욕망을 표현하는 임지은의 시가 괜찮지은? 

신발 끈같이 엉키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대화들의 대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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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생각한다 창비시선 471
문태준 지음 / 창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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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백자(白磁)와도 같은 흰빛이 내 마음에 가득 고이네

시야는 미루나무처럼 푸르게, 멀리 열리고

내게도 애초에 리듬이 있었네

내 마음은 봄의 과수원

천둥이 요란한 하늘

달빛 내리는 설원

내 마음에 최초로 생겨난 이 공간이여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나는 낙엽처럼 눈을 감고 말았네

곧 ‘천둥이 요란한 하늘’이 시작된다. 하늘에 금이 가듯 번쩍, 하는 순간이 온다. 내가 먼저 그녀를 바라봤다는 사실조차 잊었으리라. 내 눈길이 머문 자리에 그녀의 미소와 몸짓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 순간, 화들짝 놀란다. 시인의 시선은 내가 바라본 그녀가 아니라 나를 바라본 그녀의 시선을 포착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었을 때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서너살 무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첫 기억」중에서) 돌고 돌면서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를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각인된 첫 기억은 로렌츠의 오리처럼 애착으로 바뀐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열렸던 마음이 어느새 같은 이유로 ‘낙엽처럼 눈을’ 감는 순간이 온다. 

왜 시인과 소설가는 정년이 없을까. 예민한 촉수를 드리우고 타인과 세상과 사물의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시인들의 시가 무뎌지고 관조적 태도로 변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슬프다. 거의 모든 시인이 걷는 길이다. 맨발로 가재미를 잡던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변화보다 안정을, 불안보다 여유가 익숙해지고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지나 평정심을 얻는 나이가 되기 때문일까. 제주로 간 문태준의 시에서 수평선에 눈이 베일 듯 날카로운 감각과 인상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넉넉함과 위로를 얻고 싶지는 않다.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 것을 올려놓지

주름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그녀가 나를 보아서 각성했던 자아는 파도 위에서 결국 ‘당신’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거기까지, 나와 너와의 거리, 한참을 서성여도 서로 걷는 길의 언저리를 맴도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게시판에 올라온 누군가의 질문처럼,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장마가 시작인가보다. 흐리고 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나면 또 뜨거운 태양과 푸른 하늘은 다음을 준비하겠지. 종이로 된 시집 한 권을 천천히 읽는 일은 바다로 걸어간 시인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처럼 낯설고 헛되다. 늘 그렇듯,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매혹되는 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거기 또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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