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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생각한다 ㅣ 창비시선 471
문태준 지음 / 창비 / 2022년 2월
평점 :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백자(白磁)와도 같은 흰빛이 내 마음에 가득 고이네
시야는 미루나무처럼 푸르게, 멀리 열리고
내게도 애초에 리듬이 있었네
내 마음은 봄의 과수원
천둥이 요란한 하늘
달빛 내리는 설원
내 마음에 최초로 생겨난 이 공간이여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나는 낙엽처럼 눈을 감고 말았네
곧 ‘천둥이 요란한 하늘’이 시작된다. 하늘에 금이 가듯 번쩍, 하는 순간이 온다. 내가 먼저 그녀를 바라봤다는 사실조차 잊었으리라. 내 눈길이 머문 자리에 그녀의 미소와 몸짓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 순간, 화들짝 놀란다. 시인의 시선은 내가 바라본 그녀가 아니라 나를 바라본 그녀의 시선을 포착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었을 때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서너살 무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첫 기억」중에서) 돌고 돌면서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를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각인된 첫 기억은 로렌츠의 오리처럼 애착으로 바뀐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열렸던 마음이 어느새 같은 이유로 ‘낙엽처럼 눈을’ 감는 순간이 온다.
왜 시인과 소설가는 정년이 없을까. 예민한 촉수를 드리우고 타인과 세상과 사물의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시인들의 시가 무뎌지고 관조적 태도로 변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슬프다. 거의 모든 시인이 걷는 길이다. 맨발로 가재미를 잡던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변화보다 안정을, 불안보다 여유가 익숙해지고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지나 평정심을 얻는 나이가 되기 때문일까. 제주로 간 문태준의 시에서 수평선에 눈이 베일 듯 날카로운 감각과 인상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넉넉함과 위로를 얻고 싶지는 않다.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 것을 올려놓지
주름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그녀가 나를 보아서 각성했던 자아는 파도 위에서 결국 ‘당신’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거기까지, 나와 너와의 거리, 한참을 서성여도 서로 걷는 길의 언저리를 맴도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게시판에 올라온 누군가의 질문처럼,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장마가 시작인가보다. 흐리고 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나면 또 뜨거운 태양과 푸른 하늘은 다음을 준비하겠지. 종이로 된 시집 한 권을 천천히 읽는 일은 바다로 걸어간 시인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처럼 낯설고 헛되다. 늘 그렇듯,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매혹되는 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거기 또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