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캥거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563
임지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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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집도 온라인으로 고른다. 이게 다 ‘코로나’ 탓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밀린 숙제를 하듯 혹은 배부른 허기를 채우듯 시집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 포만감은 느껴지지 않고 더 큰 공허와 무기력에 빠질 때도 있으나 가끔 발바닥을 간질이는 문장을 만나고 겨드랑이가 움츠러드는 표현 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시는 종이로 된 시집을 읽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인용과 crtl+v가 편리한 방법이라는 착각은 시가 주는 깊은 맛과 의미를 포기하는 일이다. 

문지와 창비 시집에도 옥석은 있다. 아니, 취향이 갈린다. 독자마다 다른 입맛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 상황, 감정, 건강, 계절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할머니는 욕을 밥 먹듯이 했다 하루에 한 끼만 드셔야 할 듯’이나 ‘애인에게 이럴 거면 헤어져,가 튀어나오려는 걸 이러지 말자고 고쳐 말했다’는 「언어 순화」가 내게도 필요했기 때문일까. 처음 만난 임지은의 『때때로 캥거루』가 하루를 채웠다. 언어의 깊이와 무게, 이미지를 포착하는 능력 따위는 분석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시인은 ‘유머’라는 강력한 무게를 장착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재개그를 단순한 언어 유희로 폄훼하지만 명징한 언어의 이면을 들추는 일, 다양한 컨텍스트를 활용하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재능이 아니다. 아니, 어지간한 노력으로 챙길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임지은이 아재 개그를 한다는 게 아니라 언어를 향한 탐닉의 정수에 유머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유머는 긴장을 늦추고 관계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는 문제가 없는데 사람이 문제인 걸까요 관계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다가 아, 저 사람은 관계가 필요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고 영영 못 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잘잘못」중에서

이렇게 관계양상을 정확히 비틀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수가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많다 

손가락이 열 개뿐인 건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니다」중에서

자신을 항변하기도 하며, 관계맺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어쩌면 삶이 곧 관계이며, 그 관계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참고 견디는 일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씨를 호출하고, ‘구태여’ 씨가 등장하기도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호출한 시인의 재치와 타인에 대한 애정 혹은 타인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화하기 어렵다. 

사랑 혹은 이별의 고통에 대하여,

한밤중에 전화를 끊는 사람은 

가끔 알약처럼

잘 삼켜지지 않으므로

머리맡에 물 한 컵이 필요하다

-「사람이 취미」중에서

이렇게 직설법으로 토로하기도 하고,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궁금한 게 있었다

너는 모른다고 했다

몰라는 주머니가 있는 동물이 아니었지만

뭔가 담아야 할 것 같았다

고민을 눌러 담자 토끼가 튀어나와 귀를 접었다

몰라의 정체성은 모르는 것에 있었다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다

-「때때로 캥거루」중에서

김보경은 “언어에 자유를 부여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시인. 시의 자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해설 「어느 유머리스트의 슬픔과 자유」중에서, 159쪽)라는 말로 임지은 시집을 정리한다. 언어의 자유는 유머를 통해 가능하고 시인의 슬픔은 관계의 자유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었을까. 공감은 향수처럼 진한 향기를 남긴다. 

인간은 악취 위에 뿌린 냄새 같아서

향수로도 잘 감춰지지 않고

틀어놓은 음악을 함께 듣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 듣느라

천사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대충 천사」중에서

자기 자신만 듣는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숱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사이에서 허탈질 때 우리는 인생의 밝은 면을 기대하지만 그건 오로지 ‘웃음’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함정으로 가득하지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아닌

바로 웃긴 면입니다

-「인생의 밝은 면」중에서

삶의 고뇌와 슬픔의 미학으로 시에 접근하는 대신 유머와 해학으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을까. 웃음은 소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알면서도 눈감고, 없는 것처럼 말하고, 안 보이는 듯 지낼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가끔 가닿지 않는 곳, 이성의 치외법권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불법 주차를 한 상태, 뜨거운 문장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냄비 손잡이가 다 타버린 상태, 하자니 괴롭고 안 하자니 더 괴로워서 치과 진료를 미루는 사람처럼 영혼의 치아 하나가 덜렁거리는 상태, 헬스 트레이너는 볼펜 끝을 살짝 깨문다 운동이 꼭 필요한 상태,라고 적는다

-「건강과 직업」중에서

김지, 박쥐, 큰 지은, 안경 지은, 까만 지은(「모두 다른 지은」중에서)…… 그 많던 흔한 ‘지은’이 중 시인의 흔한 이름이 오래 기억되기를. 이런 비유가 좋다. 선명하고 확실한 이미지로 복잡한 상황이나 언어 이전의 세계 혹은 욕망을 표현하는 임지은의 시가 괜찮지은? 

신발 끈같이 엉키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대화들의 대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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