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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랭 머랭 - 우리시대 언어 이야기
최혜원 지음 / 의미와재미 / 2022년 5월
평점 :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생각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규정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꽃이 되듯, 사물과 타자가 의미를 가지는 건 호명을 통해 존재를 규정할 때다. 그래서 동시대인, 같은 세상을 살아도 각자의 세계는 차이가 크다. 생각하고 느끼는 범주의 크기가 세계의 크기다. 직업, 재산, 성별, 학벌, 종교, 인종, 나이와 무관하게 인간은 각자 다른 언어를 통해 저마다의 크기에 맞는 세계에 산다.
그 세계가 타인의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낭패다.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의 차이는 각자 구축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각개전투가 아닐까. 언어학자 최혜원의 『휴랭 머랭』은 각자 구축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세계를 점검한다. 공동체의 언어는 시대를 조망하고 욕망을 가늠하며 그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제목 ‘휴랭human language’은 인간의 언어 줄임말이다. ‘머랭machine language’은 기계의 언어를 줄였으나 우리말 ‘뭐라는 거야?’라는 의미의 ‘뭐래?(머랭?)’이라는 의미도 있고, 억지스럽지만 ‘머랭meringue’의 동음이철어로 읽을 수도 있다. 책 내용은 제목처럼 약간의 아재(?) 개그―아재의 정체성이 있는가. 언제부터, 몇 살부터, 남성만의 전유물로서 아재 집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나 아재의 대척점에 있는 아지매 개그는 왜 불가능한가. 아니, 처녀총각, 애기어른 개그는 가능하지 않은가. 유감이 많지만 일단 논점일탈이니 접어두자―를 섞은 유머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비속어, 은어, 유행어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책을 읽기 전에 저자 혹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내용의 전반을 지배하고 때때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유명 저자의 경우 특유의 아우라로 독자를 억압하고, 짓눌린 독자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독서 행위 자체에 감읍하기 일쑤다. 특정 직업, 학력, 성별, 인종, 종교, 나이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니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언어학자’라는 표피를 벗겨내면 언어학 일반 이론에 대한 대중적 재미와 우리시대 언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의미를 함유한다. ‘의미와재미’라는 출판사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언어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트렌드를 포착한다. 언어는 말과 글을 포괄하지만 말과 글은 전혀 다른 층위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그 차이를 설명하느라 애쓴다. 아무리 텍스트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으나 이 책을 읽는 독자만큼이라도 말과 글의 힘을, 언어가 인간에게 주는 재미와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봤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