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디언의 굴레 -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차별,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호남의 이야기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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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메시지는 사실 간명하다. 호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남 사람들이 스스로를 직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 27쪽

그러나, 책의 메시지는 간단하지 않다. 조귀동의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은 계층 간 불평등을 넘어 지역으로 옮겨간다. 대한민국의 가히 ‘인종차별’이라 할만한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해묵은 차별은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을까. 단순히 정치인들의 투표전략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저자가 광주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베용어인 ‘전라디언’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표현을 제목으로 내세운 건 출판사의 전략인지, 핵심을 비껴가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도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책은 전라도에 대한 심층적인 사회학적 보고서다. 

우리는 흔히 특정 지역, 특정 세대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무감각하다. 계층과 계급 문제를 세대 갈등으로 치환하며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문제를 비껴가듯 특정 지역과 세대, 성별 문제를 비틀어 범주화하는 언론과 정치권의 언어를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저자는 거시적으로 전라디언의 탄생 배경을 살핀다. 핵심은 물론 정치다. 사회, 역사적 배경을 찬찬히 살피면서 전라도가 어떻게 소외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이용되었는지 분석한다.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일부 국민의 편견과 오해로 치부하기엔 전라도 출신이 겪은 불공정과 불이익의 객관적 수치가 너무 분명하다. 

조선일보 기자의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 대한 관심도 놀랍지만 보수의 반대편인 전라도에 대한 분석과 관심은 단순히 광주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의 분석대로 지역을 탈출해 중산층에 편입했거나 계층 사다리를 뛰어 넘은 전라디언의 정치, 사회적 이념 지형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의 흑인 또는 아일랜드 인이라는 자극적인 1장부터 매우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지금-여기’ 우리가 대한민국을 톺아본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이 아니라 산업화 열차의 꼬리칸에 올라타기도 힘들었던 지역의 경제 상황, 민주당과 결부되기까지의 정치적 배경을 들여다보는 1~3장이 외부에 해당한다면 4장~6장까지는 부패와 무능의 도시가 되어버린 광주와 지방 토호세력의 문제를 분석하고 이중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언에 해당한다.

호남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것인지 고민하는 에필로그는 추상적 담론으로 읽힌다. 구체적인 현실 분석은 디테일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행 선거구제 개편, 지방 분권에 대한 논의, 균형 발전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은 없다. 정책 제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밝혔듯 자성의 목소리에 방점을 두고 있으나, 그건 전라도 출신 저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태도일 터.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의 지적대로 이중 차별과 지역내 계층과 계급에 따른 이해관계의 타파에 있을 것이다. 이는 전라도를 넘어 어느 지역에나 존재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자극적 문제의식을 외면하지 말고 논의의 출발로 삼았으면 좋겠다. 정면으로 응시하며 긴 안목으로 바라봐야 그나마 조금씩 해결책과 의미있는 노력이 이어지지 않을까.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한 전라디언, 복합쇼핑몰로 벌어진 세대와 계층간 견해차가 바로 문제의식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한 이상향을 실현한 시대도 국가도 없다. 다만, 그것이 왜 문제인지 고민하는 사람과 편견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이용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독자가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이런 접근 방식과 태도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계급 이익에 충실한 투표, 이해관계에 따른 이념 지도가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심화시킬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 우리는 추상적 정치 선동과 언론에 대한 비판 의식이 부족한 걸까.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생각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강한 사람들이다. 무지보다 무서운 편견과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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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 EBS CLASS ⓔ
노명우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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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쓸 시간이 없어 길게 쓴다는 어느 작가의 한 마디가 빛나듯 속담은 공동체의 지혜를 함축한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갈고 다듬어져 대구와 리듬이 생기고 기억하기 좋고 전달하기 쉽다. 민족과 국가마다 유사한 속담을 볼 때마다 인류의 삶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때도 많다. 지역과 인종과 무관하게 인간의 속성은 문명발달의 속도에 맞춰 달라지지 않는다. 한 사회의 집단지성이라 할 만한 속담은 사회학자에게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다. 노명우처럼 대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 호흡하며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회학자에겐 더욱 그렇다. ‘한 줄 사회학’은 ‘속담 사회학’이다. 단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뼈를 때리는 촌철살인. 한마디로 담아낼 수 없을 때 말과 글이 길어진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를 비교할 수 없으나 그 감동과 무게와 부피를 분량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노명우의 거의 모든 책을 읽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동어반복과 일관된 관점의 혼돈이 없다. 지적 과잉으로 흐르지 않고 새로운 정보과 관점의 변화가 참신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스한 눈길이다. 무엇보다도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다듬은 생각들에 대체로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님을 통해 한 시대와 사회를 보고,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세상 물정을 엿볼 수 있는 노명우의 이야기는 편안하게 읽히지만 한참 고민하며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어, 존 던(John Donne)의 「사람은 섬이 아니다」에서 언급한 대도시적 무관심이 어빙 고프만의 예의 바른 무관심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현대인에게 양면의 칼날처럼 활용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자기방어 매커니즘은 타인의 개입을 거부하는 시스템이다. 허용적 태도와 무질서 사이에서 길을 잃고, 질서와 규정은 권리와 의무를 돌아보게 한다. 둘 이상 모이면 갈등이 생기는 법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생각도 감정도 판단도 선택도 태도도 행동도 제각각이다. 그들이 모이면 최소한의 룰을 정하기 마련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며 문화와 관습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한 줄 속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시간을 견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속담은 너무 많다. 노명우는 그중 열두 개를 골랐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까지 누구나 알고 실제 생활에서도 사용하는 속담들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지방선거가 다가오는 요즘 다시 생각해 볼 속담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는 속담에서 플랫폼 노동과 그림자 노동을 읽어내고,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속담 하나하나가 모두 지금-여기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와 닿아 있다. 현재적 유용성이 없다면 어떤 속담도 활용되거나 전해지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인간 사회가 드러내는 욕망과 검은 속내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입맛이 쓰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밴드왜건 효과를 거두는 인플루언서를 통해 견물생심, 박탈감이 계속되고 1초도 멈추지 않는 비교, 비교, 비교...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우리는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노명우는 디지털 디톡스, SNS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연 가능할까. 그 도구와 방법은 무엇일까.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을 사는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주류를 거슬러 사는 ‘인디적’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자기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세우고, 자신만의 원칙을 따르며 선택하고 결정하고, 다른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에 흔들리지 않고 “My Way”를 걸어갈 수 없다. 이어서 노명우는 “모방은 우리가 행동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갖게 해주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동일한 행위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단단한 토대 덕분에 현재의 행위는 스스로 이루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된다.”(게오르크 지멜,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56쪽)라고 말한다. 모방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My Way”를 걸어갈 수 있을까. 각자의 판단과 각자의 노력이라고 말하기엔 무책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어차피 자신의 몫이다. 우리가 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거시적 안목에서 전체를 보고 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 후 삶의 태도와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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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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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ESG 경영(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말)’이나 ‘RE 100(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은 이제 일상적인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기업 경영이나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과 탄소 중립 등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 사이에서 심각한 디커플링 현상을 경험한다. 녹색성장이라는 허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이토 고헤이는 ‘탈성장’을 주장한다. 너무 나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성장’을 멈추자거나 ‘발전’은 곧 공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친환경, 사회적 책임을 기업 경영에 도입하려는 노력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전지구적 환경문제는 생각보다 시급하고 중요해졌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피부에 닿을만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 종이컵을 쓰지 않고 텀블러를 들고 다니거나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정도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이토 고헤이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냉소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하게 설득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태풍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이라는 우화가 때때로 시기를 놓치고 후회를 만든다. 행동과 실천은 사랑처럼 타이밍이 중요하다.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까.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새로 시행되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최대 공동목표인 ‘SDGs(지속가능한 개발 목표 또는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sms 현대판 아편이라는 말로 현 상태의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기후변화와 제국적 생활양식에 대한 객관적 자료는 충격적이다. 긍정적, 낙관적 전망의 토대는 대체로 과학기술의 발달이 환경문제에 실마리를 제공할 거라는 환상이다. 계속해서 그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성장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한 마르크스의 말년 저작들은 생소하다. 갈등과 대립은 이념과 세대, 빈부와 성별을 넘어 경쟁과 각자도생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 된 지 오래다. 세계 경제 10대 강국의 위상을 생각할 때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논쟁거리가 아니다.

속도와 방법의 문제가 남는다.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당황스럽게도 정치적 이념도 개입된다. 성장과 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치를 대가는 참혹할지도 모른다. 지나친 위협이나 공포심리를 자극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물론 이상주의에 가깝다. 방법이 틀렸거나 적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가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더디게 할 것이고, 나름의 이론가들의 굳건한 신념은 정확한 미래 예측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며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지만 이 책은 논의의 출발로 적당해 보인다. 기후 정의라는 ‘지렛대’를 이제 현실에 적용해보려는 단계다. 2000년에 인류의 문명을 인신세(*인신세 : ‘Anthropocene’에서 ‘anthropo-’는 ‘인류’를, 지질학적 시대를 지칭하는 ‘-cene’는 ‘새로운’을 뜻한다. ‘인류세’라고 옮기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 역어가 명확히 합의되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의도를 존중해 역자가 ‘인신세(人新世)’라고 옮겼다.)로 분류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파울 크뤼천의 제안이었다. 새로운 지질시대 개념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명명한 것이다. 인류세든 인신세는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먼 훗날, 아니 우리가 사는 지질시대의 종말을 앞당기는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하지 않다는 저자의 지적에 귀 기울일만하다.

기업 경영자, 정치인, 행정가 등 정책을 입안하고 경제를 운용하는 주체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합의가 없으면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 패러다임은 전환하기 어렵지 않을까. 문제는 인식하고 있으나 해법은 요원하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혀 쉽게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고민은 모두의 현실이고 그 결과는 생존과 직결된다. 탈성장 자본주의를 외치는 저자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우리가 경험한 대로 ‘그렇게’ 돼 버린다.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① - 사용가치경제로 전환

-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경제로 전환하여 대량 생산 ․ 대량 소시에서 벗어나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② - 노동 시간 단축

- 노동 시간을 줄이고, 생활의 질은 높이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③ - 획일적인 분업 폐지

- 노동을 획일하게 하는 분업을 폐지하여 노동의 창조성을 회복시키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④ - 생산 과정 민주화

- 생산 과정에서 민주화를 진행하여 경제를 감속시키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⑤ - 필수 노동 중시

- 사용가치경제로 전환하여 노동집약적인 필수 노동을 중시하자.

경제의 규모 축소scale down와 속도 둔화slow down, ‘가속주의accelerationism’가 아닌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로 요약되는 사이토 코헤이 주장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모두 호흡을 가다듬고 심각하게 현실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언제, 누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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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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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없는 역사는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살았던 모든 순간이 기록된 건 아니다. 땅속에 묻혀 흔적이 남아 있거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문명을 이루며 문자를 발명한 후에도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과대 포장과 확대 해석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도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어쩌면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기록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이며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가장 오래된 역사는 무엇일까.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수메르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가 역사와 신화의 혼재인 것처럼 길가메쉬라는 실존 왕에게 입힌 화려한 신화의 옷은 당대의 현실을 가늠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 왜곡된 사실도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는 것일까.

실증주의 역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과장된 기록으로 인류의 과거를 가늠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신화일까. 보헤미아 프라하 출신의 독일 시인 릴케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고 했다. 초야권까지 소유한 실존 인물 길가메쉬가 현실에서 채우고 싶은 욕망은 없어 보인다. 단 한 가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일련의 과정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뼈대를 이룬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이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도 단 한 번뿐인 삶에 정답을 찾지 못한 건 아닐까. 모두 죽는다는 전제가 삶의 목적과 방법을 오히려 왜곡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며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독촉하는 건 아닐까.

수메르어는 그림문자(5100년) 이전에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악카드어(4600년), 에블라어(4300년), 히브리어(3000년)으로 이어지는 기록의 역사는 현존재를 먼지만큼 아득하게 만들어버린다. 천문학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겸손’이다. 타인과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떠하든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든 존재의미를 찾기 어렵다. 수천 년 전 수메르에는 엔메르카르-루갈반다-두무지-길가메쉬로 이어지는 막강한 권력자가 있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인 수메르가 “그리스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교과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오디세이아뿐만 아니라 고대 영국의 영웅 서사시이며, 게르만족 최고의 서사시인 〈베어울프(Beowulf)〉에서부터 북유럽의 신화 연대기 〈잃어버린 이야기들(The Book of Lost Tales)〉의 집필자인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장편소설 〈반지의 제왕(The Lora of The Rings)〉에 이르기까지 영웅 문학의 출발점이요, 최고(最古) 정점에 길가메쉬 서사시가 우뚝 서 있다! ”

수메르의 권위자가 쓴 영역본을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책을 고민했으나 라틴어를 공부한 천병희의 판본을 믿듯 수메르어와 악카드어 기록을 직접 해석한 김산해의 책을 선택했다. 그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악카드어의 기록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여러 판본으로 치자면 최후대에, 달리 말하면 마지막 개작(改作)DP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성서의 기록보다 적어도 수백 년이나 앞서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인간이 2000여 년간이나 믿어온 ‘진실의 혼돈’이었다.”라고 말한다. “히브리 신호와 그리스 신화에 앞서 악카드어로 기록된 원본들이 있었다! 악카드어로 기록되기 전에 수메르어로 기록된 진짜 원본들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를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행운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4000여 년 전 수메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부터 부활하기까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혜인 셈이다! ”라는 감탄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 권의 책으로 남은 기록이 아니니 순서를 정하고 수메르어 기록과 악카드어 기록의 조각들을 맞춰 배열하는 작업은 오롯이 번역자의 몫이다. 450쪽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분량이지만 지루함을 덜기 위해 사진과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번역투의 문장도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어나 고대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배경 지식에 해당하는 긴 각주는 본문을 읽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건너뛰지 말고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 낫다.

신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엔키가 창조한 ‘인간’은 오늘도 고단하다. 매일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뜨는 건 어쩌면 하루살이로 매일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닐까. 또 하루 저물어 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오늘을 살았을 테지만 어둠이 내리면 잠자리에 들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내일을 산다. 그 종착역이 어디든 4800여 년 전 길가메쉬가 느낀 두려움 대신 자기 삶의 끝을 가늠해 보면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얼마나 계속될지 모를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잠자는 자와 죽은 자는 얼마나 똑같은가! 죽음의 형상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도다! 바로 그것이다. 너는 인간이다! 범인이든 귀인이든, 꼭 한 번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고, 하나처럼 모두 모여든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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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립니다 *^^*

sceptic 2022-03-08 18:21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김누리 교수의 한국 사회 탐험기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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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독일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의 시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 그래, 환멸 속에서도 한 걸음 나가야 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253쪽

여기저기 옮겨지는 촌철살인의 단문들. 그리고 가슴을 녹이고 공감을 일으키는 미문들.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호소문들. 우리 삶은 어쩌면 수많은 텍스트로 둘러싸인 거대한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닐까. 유튜브와 인스타, 틱톡으로 무장한 감각적 영상들이 뇌를 자극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짤막한 시구절에 열광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라는 말로 2차대전의 비극과 참상을 표현했던 브레히트처럼 김누리는 볼프 비어만의 입을 빌려 이 시대의 희망과 절망을 비튼다. 그럼 충분히 절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었을까. 근대 이전 계급 사회에서도, 구한말의 혼란과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의 혼란과 한국 전쟁의 틈바구니에도, 반민특위가 해체와 자유당 부정선거에도, 군사 쿠데타와 유신정권에도, 5․18과 박종철 고문치사에도 절망할 권리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랜 전통과 문화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한다.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정신문화가 내재한 민족이라는 환상처럼 어이없는 일이다. 때때로 자기만의 정신 승리법과 대리만족은 재벌과 연예인 걱정만큼 정치인에 대한 환호와 경멸로 나타난다. 누군가 이 절망을 바꿔 줄 거라는 기대만큼의 크기로 실망은 분노로 치환된다. 역사는 언제나 그 희망이 헛되고 헛되었음을 증명한다. 68혁명의 혜택(?)을 한 줌도 받지 못한 한국은 겨우 87년 체제가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신자유주의와 함께 IMF라는 후유증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여기는 어디이며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냉정한 현실 인식 없는 긍정과 희망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비판적 거리 두기를 비관적 냉소주의로 받아들이면 ‘절망할 권리’는 모든 사람이 당당하게 누릴 수밖에 없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쓴 칼럼을 주제별로 엮은 이 책은 관념적 현실 비판이 아니다. 뻔한 시론時論의 지겨움은 논리 없는 자가당착, 진영논리를 앞세운 반대, 계급 이익을 앞세운 이기주의, 반성과 대안 없는 비난 때문이다. 김누리는 독일의 현실을 자주 언급하며 유럽과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을 비교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현상을 통해 본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눈앞에 선거, 단기적 이익 앞에서 대증요법에 급급하다.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지난 일을 잊는 데는 수준급이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다이나믹 코리아의 현실 때문이 아니라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태도와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불안사회, 무례 사회, 방관 사회, 노예 민주주의를 언급하는 책의 서문은 ‘환멸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제와 다른가. 10년 20년 전과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노력은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다. 정치 혐오는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약한 자아를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광장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일상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한 한국 사회의 ‘이상한 현실’을 설명해 준다.” 일상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를 규정한다. 자신의 한계는 스스로 정한다. 말과 행동은 생각의 자기 검열을 통해 드러난다.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희망은 없다.

사회, 정치, 교육, 대학, 외교 등 주제별로 엮인 글이 지난 8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굵지한 사건을 환기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다. 대체로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이라는 환상이 깨어진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는 상황에서 우리는 또다시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비아냥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김누리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이들은 대개 이 사회의 교육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수한 ‘우등생들’인 까닭에, 이들의 천민성은 그대로 사회의 성격을 대유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사회에 미래는 없다.”라는 말로 기득권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환상을 버리고 일상 ‘속’의 민주주의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호소다.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는 대신 현실에 ‘적응’하며 독자 생존에 몰입하는 순간 현실이 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부모도 스펙이라는 말 앞에 할 말을 잃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훈계하며, 돈 되는 일이 아니면 관심 갖지 말라는 충고를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경제다.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환상은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니 가난과 실패는 모두 네 탓이라는 암묵적 합의와 인정이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모범생과 우등생을 일치시킨다. 국영수 성적이 좋은 소수 카르텔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을 고치는 대신 그 자리에 끼지 못해 안달을 하고 내 자식만은 그들의 리그에 참여시키고 싶은 욕망이 앞서는 한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있다.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제,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가진 폐해를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찬반을 결정하는 한 절망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교육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보다 ‘내 자식’에게 유리한 방식을 고민하는 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유럽의 대다수 나라들이 하는 대로 ‘정의로운 교육’을 실천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네가지를 폐지해야 한다. 첫째는 대학입시 폐지, 둘째는 대학 서열 폐지, 셋째는 대학 등록금 폐지, 넷째는 특권 학교 폐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상식이자 일상이다.”라는 말은 헛된 망상으로 들린다. 답을 모르거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고민과 선택의 문제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행복한 미래? 지옥같은(빨리 읽지 말 것) 현실? 오늘과 내일 앞에 붙는 수식어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써야 한다는 자각이 ‘절망할 권리’를 잃게 한다.

라이피즘lifism이라 명명한 주의, 주장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프로파간다로 작동하긴 어렵다. 역사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도 다수에게 통용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파시시스트 히틀러도 합법적 권한을 위임받아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다수 대중은 이를 지지했고, 그 불가피성에 동의했다. 수구세력의 저항과 기득권 전쟁이 언제 한 번이라도 만만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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