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김누리 교수의 한국 사회 탐험기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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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독일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의 시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 그래, 환멸 속에서도 한 걸음 나가야 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253쪽

여기저기 옮겨지는 촌철살인의 단문들. 그리고 가슴을 녹이고 공감을 일으키는 미문들.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호소문들. 우리 삶은 어쩌면 수많은 텍스트로 둘러싸인 거대한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닐까. 유튜브와 인스타, 틱톡으로 무장한 감각적 영상들이 뇌를 자극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짤막한 시구절에 열광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라는 말로 2차대전의 비극과 참상을 표현했던 브레히트처럼 김누리는 볼프 비어만의 입을 빌려 이 시대의 희망과 절망을 비튼다. 그럼 충분히 절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었을까. 근대 이전 계급 사회에서도, 구한말의 혼란과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의 혼란과 한국 전쟁의 틈바구니에도, 반민특위가 해체와 자유당 부정선거에도, 군사 쿠데타와 유신정권에도, 5․18과 박종철 고문치사에도 절망할 권리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랜 전통과 문화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한다.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정신문화가 내재한 민족이라는 환상처럼 어이없는 일이다. 때때로 자기만의 정신 승리법과 대리만족은 재벌과 연예인 걱정만큼 정치인에 대한 환호와 경멸로 나타난다. 누군가 이 절망을 바꿔 줄 거라는 기대만큼의 크기로 실망은 분노로 치환된다. 역사는 언제나 그 희망이 헛되고 헛되었음을 증명한다. 68혁명의 혜택(?)을 한 줌도 받지 못한 한국은 겨우 87년 체제가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신자유주의와 함께 IMF라는 후유증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여기는 어디이며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냉정한 현실 인식 없는 긍정과 희망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비판적 거리 두기를 비관적 냉소주의로 받아들이면 ‘절망할 권리’는 모든 사람이 당당하게 누릴 수밖에 없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쓴 칼럼을 주제별로 엮은 이 책은 관념적 현실 비판이 아니다. 뻔한 시론時論의 지겨움은 논리 없는 자가당착, 진영논리를 앞세운 반대, 계급 이익을 앞세운 이기주의, 반성과 대안 없는 비난 때문이다. 김누리는 독일의 현실을 자주 언급하며 유럽과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을 비교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현상을 통해 본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눈앞에 선거, 단기적 이익 앞에서 대증요법에 급급하다.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지난 일을 잊는 데는 수준급이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다이나믹 코리아의 현실 때문이 아니라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태도와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불안사회, 무례 사회, 방관 사회, 노예 민주주의를 언급하는 책의 서문은 ‘환멸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제와 다른가. 10년 20년 전과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노력은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다. 정치 혐오는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약한 자아를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광장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일상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한 한국 사회의 ‘이상한 현실’을 설명해 준다.” 일상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를 규정한다. 자신의 한계는 스스로 정한다. 말과 행동은 생각의 자기 검열을 통해 드러난다.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희망은 없다.

사회, 정치, 교육, 대학, 외교 등 주제별로 엮인 글이 지난 8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굵지한 사건을 환기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다. 대체로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이라는 환상이 깨어진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는 상황에서 우리는 또다시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비아냥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김누리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이들은 대개 이 사회의 교육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수한 ‘우등생들’인 까닭에, 이들의 천민성은 그대로 사회의 성격을 대유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사회에 미래는 없다.”라는 말로 기득권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환상을 버리고 일상 ‘속’의 민주주의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호소다.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는 대신 현실에 ‘적응’하며 독자 생존에 몰입하는 순간 현실이 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부모도 스펙이라는 말 앞에 할 말을 잃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훈계하며, 돈 되는 일이 아니면 관심 갖지 말라는 충고를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경제다.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환상은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니 가난과 실패는 모두 네 탓이라는 암묵적 합의와 인정이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모범생과 우등생을 일치시킨다. 국영수 성적이 좋은 소수 카르텔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을 고치는 대신 그 자리에 끼지 못해 안달을 하고 내 자식만은 그들의 리그에 참여시키고 싶은 욕망이 앞서는 한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있다.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제,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가진 폐해를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찬반을 결정하는 한 절망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교육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보다 ‘내 자식’에게 유리한 방식을 고민하는 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유럽의 대다수 나라들이 하는 대로 ‘정의로운 교육’을 실천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네가지를 폐지해야 한다. 첫째는 대학입시 폐지, 둘째는 대학 서열 폐지, 셋째는 대학 등록금 폐지, 넷째는 특권 학교 폐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상식이자 일상이다.”라는 말은 헛된 망상으로 들린다. 답을 모르거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고민과 선택의 문제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행복한 미래? 지옥같은(빨리 읽지 말 것) 현실? 오늘과 내일 앞에 붙는 수식어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써야 한다는 자각이 ‘절망할 권리’를 잃게 한다.

라이피즘lifism이라 명명한 주의, 주장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프로파간다로 작동하긴 어렵다. 역사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도 다수에게 통용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파시시스트 히틀러도 합법적 권한을 위임받아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다수 대중은 이를 지지했고, 그 불가피성에 동의했다. 수구세력의 저항과 기득권 전쟁이 언제 한 번이라도 만만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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