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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에게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9
최영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를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충분히 빵이 굳어버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 굳은 빵에 버터를 바르는 일은 순전히 시인의 몫이다. 그 빵에 버터를 바르지 않고 곰팡이 피도록 방치하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는 일도 시인의 선택이다. ‘너희들’의 주체가 모호하긴 하지만 최영미는 7년만에 시로 돌아왔다. 그녀가 추억하기 위해 돌아왔는지 그녀를 추억하는 독자들을 위해 돌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외치는 그녀는 <꿈의 페달을 밟고> 이후 다른 일들을 해왔다. 산문집을 내고 소설도 썼으며 번역도 했다.

  <돼지들에게>를 들고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녀의 돼지들은 누구일까?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헤아려본다. 시간이 흐르고 때가 쌓인 작품들을 시집으로 묶어내는 의례적인 작업이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꾸준히 시를 쓴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긴장과 날카로움은 무뎌지고 도전과 무모함도 사라졌다. 당연한 일인가. 그래도 시간이 모든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침묵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다만 굳은 빵에 버터나 바르며 ‘너희들을 추억’할 뿐이다.

최소한의 자존심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십대 중반이 되어버린 시인은 인생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사실(fact)뒤에 숨어 있는 진실(truth)이 무엇인가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대꾸하지 않겠다는 말은 생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무덤에서 일어나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죽지 않겠다는, 지금은 아니라는 말은 오히려 그녀의 침묵을 변명하고 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자존심’ 을 생각할 때가 있다. 다만 그 대처 방법은 모두 다르다. 시인은 타인들의 ‘망각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건 자기 스스로 잊겠다는 다짐이다.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

돈과 권력과 약물로 오염된, 아무리 더러운 그라운드에도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 축구이다.

  2002년 월드컵 광풍이 몰아칠 때 썼을 법한 축구 관련 시들이 3부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이다.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는 너절한 시 중의 하나이다. 그라운드에 살아 움직이는 그 한 조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어지지도 않는다. 축구는 축구일 뿐,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라는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육체와 영혼에 대한 어떤 문답

A : 너, 왜 그 남자랑 못 헤어지니?
B : 난 그 남자의 영혼을 봤거든.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말하자면 연민의 정이지.
A : 그런데, 도대체 영혼이 무엇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B : 육체를 뺀 나머지지.

  여전히 사랑 타령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연민의 정과 영혼에 대해 쉽고 일상적인 통찰이 생길 나이가 됐다고 믿는다. 육체를 뺀 나머지가 영혼이라면 개인의 존재나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들이 독자와 쉽게 소통된다는 면에서 최영미의 시들은 인정받을만하다. 어렵고 난해한 시들이 어지럽게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시들을 독자들은 읽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시인들이 시를 쓰지는 않지만 문학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최영미가 거든 성과는 분명하다.

  하지만 <돼지들에게>에서 보여준 시간의 파편들은 퍼즐처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깨진 항아리의 빠진 부품들이 보이는 듯하다. 5부로 구성된 시집은 각각의 다른 이야기들로 겉돌고 있으며 예의 주목할 만한 1부의 긴장감들을 뒤로 갈수록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다.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감각적 표현은 시인의 미덕이다. 그마저 없었더라면 하드커버 시집 한 권이 주는 부담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그녀의 시집을 다시 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00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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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문학의 형식과 내용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논쟁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 분리 될 수 없는 상보적 관계에 놓여있다. 형식이 중요할 수도 없고 내용만 앞세울 수도 없다. 시든 소설이든 그 형식적 특성과 내용이 어우러질 때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낸다. 그러나 이런 형식과 내용이 항상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절제와 균형이 가장 높은 예술성을 담보로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마누엘 푸익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는 형식의 승리다. 소설이 독자에게 전해줄 메시지와 주제를 명확히 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 것이 타당한가 하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논쟁의 의미가 없다고 본다. 논쟁 이전에 작가의 특성과 개성에 따라 소설에 대한 태도와 소설 속에 담아내고 싶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 소설은 1973년에 출판된 마누엘 푸익의 세 번째 소설이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것이 늦은감이 있다. 내용의 파격과 형식의 독특함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 소설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성에 대한 묘사와 다양한 욕망의 형태들을 통해 뒤틀리고 일그러진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추악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는 평가가 가능하겠다.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과 이성에 대한 성적 충동을 다룬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거나 우리 문학 풍토에서 한창 떠들썩했던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논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번역이 미루어졌거나 단순하게 돈이 되지 않을 것같아 번역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태적 성욕에 대한 남자 주인공 레오의 욕망과 여주인공 글라디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이 소설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결론을 독자에게 제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성장 과정과 이후의 의식의 흐름이 어떤 양상을 띠고 변화하는지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과 내재된 욕망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가 이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리둥절한 독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봤던 영화지만 왕가위가 그토록 극찬했던 소설 <부에노르아이레스 어페어>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가위의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서사 구조의 다양성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곧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같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감독이라면 - 모든 감독이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 소설과 다른 예술 장르에서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백년간 혹은 앞으로 몇 천년간 수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와 유사한 사건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하는 것은 모든 감독과 소설가의 고민일 것이다. 무조건 독특한 방식과 새로운 기법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질 수 있는 용기는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왕가위의 극찬이 아니어도 영화 <해피투게더>를 보지 않은 사람이어도 이 소설은 남미 문학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심장이 약하거나 윤리 교과서를 베고 자거나 천사와 친하신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좁은지 넓은지 비교 대상이 없어 알 수 없는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의 생각과 삶의 모습들은 따로 또같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속에서도 분명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닌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60억의 생각이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생각조차 얼려버릴 만큼 계속되는 이 추위가 ‘봄’에 대해서 상상이나 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처럼.


200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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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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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문학 이론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혹은 ‘우리’의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소설은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세풀베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고통과 절망의 극단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소외된 사람들이다. 우리와 다른 돈과 권력을 가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TV 드라마처럼 비현실적 낭만으로 사람들을 미혹케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두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미처 알지 못하고 동시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눈물나게 아름답고 만약 삶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한다.

  무려 서른 다섯 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작품집 <소외>는 단편보다 훨씬 짧은 장편(掌篇)소설의 전형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부터 스웨덴,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넘나들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진한 감동으로 풀어 놓는다. 이 사람들은 베르겐 벨젠 유대인 수용소의 돌멩이에 새겨진 글귀처럼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풀베다는 이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고 깨워낸다. <소외>의 모티브가 된 이 한마디가 이 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작가 의식이기도 하다.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서 악명이든 허명이든 주인 행세를 했던 사람들의 이면에 이름없이 묵묵히 자신의 신념과 삶에 충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풀베다는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그 사람들의 고결한 삶과 숭고한 도덕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살다갔는지 증언한다. 세상의 불의와 억압에 맞서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소외된 모습에 대한 감동적인 세리모니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에서 태어나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다.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붕괴된 후 반독재, 반체제 운동을 벌이다 구속된 후 국제사면위원회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그 후 여러 나라를 거쳐 지금은 스페인에 정착하고 있다. 자신의 삶과 작품을 일치시킬 수 있는 행복한 작가라고 하면 그의 작품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경의가 될까? 신념에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삶이 곧 자신의 신념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루이스 세풀베다는 가장 행복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비달이란 사나이. 비달 산체스. <평생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다>라는 브레히트의 말이 옳았다. - P. 50 ‘비달이란 사나이’중에서

  탐욕은 항상 눈동자를 찔러 대는 쇠 바늘과도 같다. - P. 113 ‘피츠카랄도의 흔적을 찾아서’중에서

  삶이 짧고 허망한 건 확실하지만, 자존심과 용기가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생명력은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함정과 불행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 P. 126 ‘엘베 강의 해적’중에서

  자기가 먹을 빵을 스스로 정당하게 벌어서 먹는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거리나 시간은 아무 상관 없었다. - P. ‘콤파’중에서

  <확실하게.> 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확실함을 증오한다. - P. 131 ‘침묵의 목소리’중에서

  삶의 아포리즘에 해당하는 세풀베다의 이야기는 극성스럽지도 과장되지도 않는다. 그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오랜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들이 계급간 모순에 대한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는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과거의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헌사이다.

  아울러 세풀베다의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환경’의 문제다. 그린피스 특파원으로 활약한 적이 있다는 그의 이력을 살펴보지 않아도 그의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진하게 배어있다. 인간이 숨쉬고 살아가는 기본적 토대를 제공하는 자연에 대한 경외는 인간 자체에 대한 소외 문제만큼 우리에게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의 소임이 단순한 재미와 인㎱?감동에 있지 않다면 세풀베다의 작품에 보내지는 찬사는 분명한 이유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주제와 내용면에서 영미 문학 중심이나 프랑스, 독일 문학이 세계 문학의 전부였던 우리에게 관심과 대상을 넓혀 볼 수 있는 이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만난 그의 작품들을 좀 더 읽어 볼 일이다.


200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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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연애 소설은 영원한 꿈이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보다 지독한 사랑을 했어도 연애소설은 여전히 한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 모든 작가들은 연애소설을 꿈꾼다. 그 꿈은 가장 소중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성간의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방법이 타인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누구에겐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문득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연애 소설은 그래서 모든 사람이 꿈꾸는 영원한 유토피아가 된다. 그 곳에는 나이도 없고 현실도 존재해선 안된다. 꿈꿀 권리와 비현실적 투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어도 상관없다. 비극도 해피앤딩도 다 좋다.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만 있으면 족하다.

  혼자 여생을 보내는 노인에게 연애 소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는 연애의 사소함이 벅찬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고난과 시련의 시작이 연애의 시작으로부터 비롯됐으며, 현실을 닮은 연애소설을 한줄 한줄 음미하는 노인의 삶이 현실 공간의 꿈을 상징하는 소재로 등장한다. 노인과 연애소설의 관계는 그렇게 불협화음처럼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하는 장치로 읽어낼 수도 있다.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짤막한 중편 정도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길이와 무관하게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세풀베다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작품이 될만한 충분한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현란한 수사와 감동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문체와 수사적 기교는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이 담아내는 다양한 상황과 아마존 유역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교감 내지 합일이 보여주는 행간의 의미가 훨씬 더 큰 매력으로 느껴진다.

  복잡하고 어려운 구성도 없다. 단순한 구성과 뻔한 갈등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가난한 두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못한 불행을 이겨보려고 아마존 밀림의 개발지역에 정착하지만 아내는 이내 숨을 거둔다. 홀로 남은 남자는 인디오 부족과 어울려 대자연의 가르침을받는다. 그 가르침은 부족이 알려주는 자연의 습성과 생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정착촌으로 돌아오지만 읍장으로 부임한 뚱보와의 갈등과 관광온 양키의 죽음으로 노인은 살쾡이를 잡으러 떠난다. 홀로 남겨진 노인은 그 살쾡이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도와준다는 구조다. 인간을 죽인 살쾡이를 사냥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파괴한 자연이 선택한 길을 따라가는 순응적 역할이 노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소설의 노인은 자연과 인간의 대결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노인이 아니라 대자연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교만함을 확인하는 역할을 대신한다. 양키와 정부 당국으로 대표되는 개발과 인간의 폭력은 조화로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원주민인 인디오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다. 비단 남미의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지국적 환경과 생태의 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다.

  살쾡이와 대결하는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환각과 상상은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구조에 색다른 변화를 주며 소설의 완성도를 높인다. 치밀한 갈등과 완벽한 플롯이 아니어도 좋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만을 위한 소설로만 읽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진지한 고민의 시간도 만들어 준다. 생각날 때마다 그의 소설 몇 권을 더 읽고 싶어진다.


200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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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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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작품을 읽는 것이다. 시가 전하는 메시지도 형식도 분명히 말할 수 없이 중요하지만 언어예술로서 본질적인 즐거움은 시어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화려한 묘사와 촌철살인의 재치로 무장한 재기발랄함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긴장감, 그 말들이 연상시키는 이미지, 이미지가 증폭시키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독자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미식가가 미묘한 혀끝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듯 온 몸 전체로 퍼지는 시의 맛을 음미하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허수경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 이후 5년 만에 독일에 건너간지 14년. 고고학자 결혼했고 여전히 고고학 발굴현장에 있는 그녀의 시는 모국어에 대한 찬사를 넘어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여준다. 그녀에게 모국어는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을 텐데도 전혀 녹슬거나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를 창비에서 펴낸 후 이번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펴냈다. 두 출판사의 색깔이 희석된 후 벌어지는 재미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낯익은 당신

빛인가, 당신, 저 손등 아래 지는 당신, 봄빛인가 당신, 그래, 한 상징이었을지도 모를 당신, 뭉큰, 손에 잡히는 600그램 돼지고기 같은, 시간, 저 육빛인 당신, 혹, 당신 빛 아닌, 물인가, 저 발 아래 일렁이는 당신, 물 냄샌가 당신, 그래, 한 기호였는지도 모를 당신, 덜컹, 덜컹, 발에 잡히는 영상 25도 물 온도 같은, 시간, 저 온탕인 당신, 혹 당신은 물 아닌 흙인가, 저 땅 아래 실은 끓고 있는 바위 같은 당신, 아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 망설이는, 바위인가, 사방 100킬로 용암의 얼굴 같은, 저 낯익은 당신

  오랫동안 눈길이 머무는 시는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비평가를 위한 시 읽기가 아니라면 편안하게 맘에 드는 작품에 오래 시선을 멈춘다. 고고학적 상상력으로 시간을 넘어선 초월적 대상으로서 ‘당신’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무화된 시간 속에 확인하고 싶은 당신의 얼굴이 남아있기만 하다면 생은 계속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녀에게 중요한 당신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당신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저 낯익은 당신’은 누구인가.

기쁨이여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물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날 기다리고 있었던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이 시를 읽다가 문득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가 생각났다. 슬픔과 기쁨을 분리해서 돌아보지 못한 시야의 확장을 질책하는 슬픔은 기쁨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나 허수경은 기쁨과 슬픔을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대상화한다. 화자가 직접 슬픔과 기쁨을 상대한다. 물론 이 시에서도 ‘기쁨’이 주된 공격목표(?)가 되지만 슬픔이 없으면 기쁨의 정체성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한다. 기쁨이여 슬픔에게 감사하라. 그런 후 화자에게 손을 내밀라.

  무화(無化)된 시간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허수경은 그것에 대한 기억의 집을 짓고 있다. 청동의 시간이든 감자의 시간이든 ‘시간’이 주는 거대함 앞에 고개 숙여 ‘순간’을 살고 있는 인간의 비루함을 질책하는 듯하다. 질책이나 깨우침은 독자의 주관적 판단이나 느낌일 테지만 허수경의 비극적인 목소리가 메마른 울림으로 들리는 것은 아직도 ‘희망’에 대한 그녀의 말 때문이다. 문학과지성사 시집의 맨 뒤쪽 표지는 시인의 육성을 가장 생생하게 들려주는 창이다. 그 창 너머에서 허수경은 말한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200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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