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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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작품을 읽는 것이다. 시가 전하는 메시지도 형식도 분명히 말할 수 없이 중요하지만 언어예술로서 본질적인 즐거움은 시어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화려한 묘사와 촌철살인의 재치로 무장한 재기발랄함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긴장감, 그 말들이 연상시키는 이미지, 이미지가 증폭시키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독자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미식가가 미묘한 혀끝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듯 온 몸 전체로 퍼지는 시의 맛을 음미하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허수경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 이후 5년 만에 독일에 건너간지 14년. 고고학자 결혼했고 여전히 고고학 발굴현장에 있는 그녀의 시는 모국어에 대한 찬사를 넘어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여준다. 그녀에게 모국어는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을 텐데도 전혀 녹슬거나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를 창비에서 펴낸 후 이번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펴냈다. 두 출판사의 색깔이 희석된 후 벌어지는 재미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낯익은 당신

빛인가, 당신, 저 손등 아래 지는 당신, 봄빛인가 당신, 그래, 한 상징이었을지도 모를 당신, 뭉큰, 손에 잡히는 600그램 돼지고기 같은, 시간, 저 육빛인 당신, 혹, 당신 빛 아닌, 물인가, 저 발 아래 일렁이는 당신, 물 냄샌가 당신, 그래, 한 기호였는지도 모를 당신, 덜컹, 덜컹, 발에 잡히는 영상 25도 물 온도 같은, 시간, 저 온탕인 당신, 혹 당신은 물 아닌 흙인가, 저 땅 아래 실은 끓고 있는 바위 같은 당신, 아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 망설이는, 바위인가, 사방 100킬로 용암의 얼굴 같은, 저 낯익은 당신

  오랫동안 눈길이 머무는 시는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비평가를 위한 시 읽기가 아니라면 편안하게 맘에 드는 작품에 오래 시선을 멈춘다. 고고학적 상상력으로 시간을 넘어선 초월적 대상으로서 ‘당신’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무화된 시간 속에 확인하고 싶은 당신의 얼굴이 남아있기만 하다면 생은 계속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녀에게 중요한 당신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당신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저 낯익은 당신’은 누구인가.

기쁨이여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물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날 기다리고 있었던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이 시를 읽다가 문득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가 생각났다. 슬픔과 기쁨을 분리해서 돌아보지 못한 시야의 확장을 질책하는 슬픔은 기쁨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나 허수경은 기쁨과 슬픔을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대상화한다. 화자가 직접 슬픔과 기쁨을 상대한다. 물론 이 시에서도 ‘기쁨’이 주된 공격목표(?)가 되지만 슬픔이 없으면 기쁨의 정체성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한다. 기쁨이여 슬픔에게 감사하라. 그런 후 화자에게 손을 내밀라.

  무화(無化)된 시간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허수경은 그것에 대한 기억의 집을 짓고 있다. 청동의 시간이든 감자의 시간이든 ‘시간’이 주는 거대함 앞에 고개 숙여 ‘순간’을 살고 있는 인간의 비루함을 질책하는 듯하다. 질책이나 깨우침은 독자의 주관적 판단이나 느낌일 테지만 허수경의 비극적인 목소리가 메마른 울림으로 들리는 것은 아직도 ‘희망’에 대한 그녀의 말 때문이다. 문학과지성사 시집의 맨 뒤쪽 표지는 시인의 육성을 가장 생생하게 들려주는 창이다. 그 창 너머에서 허수경은 말한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200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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