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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연애 소설은 영원한 꿈이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보다 지독한 사랑을 했어도 연애소설은 여전히 한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 모든 작가들은 연애소설을 꿈꾼다. 그 꿈은 가장 소중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성간의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방법이 타인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누구에겐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문득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연애 소설은 그래서 모든 사람이 꿈꾸는 영원한 유토피아가 된다. 그 곳에는 나이도 없고 현실도 존재해선 안된다. 꿈꿀 권리와 비현실적 투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어도 상관없다. 비극도 해피앤딩도 다 좋다.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만 있으면 족하다.
혼자 여생을 보내는 노인에게 연애 소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는 연애의 사소함이 벅찬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고난과 시련의 시작이 연애의 시작으로부터 비롯됐으며, 현실을 닮은 연애소설을 한줄 한줄 음미하는 노인의 삶이 현실 공간의 꿈을 상징하는 소재로 등장한다. 노인과 연애소설의 관계는 그렇게 불협화음처럼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하는 장치로 읽어낼 수도 있다.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짤막한 중편 정도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길이와 무관하게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세풀베다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작품이 될만한 충분한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현란한 수사와 감동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문체와 수사적 기교는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이 담아내는 다양한 상황과 아마존 유역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교감 내지 합일이 보여주는 행간의 의미가 훨씬 더 큰 매력으로 느껴진다.
복잡하고 어려운 구성도 없다. 단순한 구성과 뻔한 갈등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가난한 두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못한 불행을 이겨보려고 아마존 밀림의 개발지역에 정착하지만 아내는 이내 숨을 거둔다. 홀로 남은 남자는 인디오 부족과 어울려 대자연의 가르침을받는다. 그 가르침은 부족이 알려주는 자연의 습성과 생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정착촌으로 돌아오지만 읍장으로 부임한 뚱보와의 갈등과 관광온 양키의 죽음으로 노인은 살쾡이를 잡으러 떠난다. 홀로 남겨진 노인은 그 살쾡이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도와준다는 구조다. 인간을 죽인 살쾡이를 사냥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파괴한 자연이 선택한 길을 따라가는 순응적 역할이 노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소설의 노인은 자연과 인간의 대결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노인이 아니라 대자연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교만함을 확인하는 역할을 대신한다. 양키와 정부 당국으로 대표되는 개발과 인간의 폭력은 조화로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원주민인 인디오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다. 비단 남미의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지국적 환경과 생태의 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다.
살쾡이와 대결하는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환각과 상상은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구조에 색다른 변화를 주며 소설의 완성도를 높인다. 치밀한 갈등과 완벽한 플롯이 아니어도 좋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만을 위한 소설로만 읽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진지한 고민의 시간도 만들어 준다. 생각날 때마다 그의 소설 몇 권을 더 읽고 싶어진다.
2005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