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소설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문학 이론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혹은 ‘우리’의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소설은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세풀베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고통과 절망의 극단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소외된 사람들이다. 우리와 다른 돈과 권력을 가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TV 드라마처럼 비현실적 낭만으로 사람들을 미혹케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두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미처 알지 못하고 동시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눈물나게 아름답고 만약 삶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한다.

  무려 서른 다섯 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작품집 <소외>는 단편보다 훨씬 짧은 장편(掌篇)소설의 전형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부터 스웨덴,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넘나들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진한 감동으로 풀어 놓는다. 이 사람들은 베르겐 벨젠 유대인 수용소의 돌멩이에 새겨진 글귀처럼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풀베다는 이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고 깨워낸다. <소외>의 모티브가 된 이 한마디가 이 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작가 의식이기도 하다.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서 악명이든 허명이든 주인 행세를 했던 사람들의 이면에 이름없이 묵묵히 자신의 신념과 삶에 충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풀베다는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그 사람들의 고결한 삶과 숭고한 도덕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살다갔는지 증언한다. 세상의 불의와 억압에 맞서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소외된 모습에 대한 감동적인 세리모니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에서 태어나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다.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붕괴된 후 반독재, 반체제 운동을 벌이다 구속된 후 국제사면위원회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그 후 여러 나라를 거쳐 지금은 스페인에 정착하고 있다. 자신의 삶과 작품을 일치시킬 수 있는 행복한 작가라고 하면 그의 작품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경의가 될까? 신념에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삶이 곧 자신의 신념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루이스 세풀베다는 가장 행복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비달이란 사나이. 비달 산체스. <평생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다>라는 브레히트의 말이 옳았다. - P. 50 ‘비달이란 사나이’중에서

  탐욕은 항상 눈동자를 찔러 대는 쇠 바늘과도 같다. - P. 113 ‘피츠카랄도의 흔적을 찾아서’중에서

  삶이 짧고 허망한 건 확실하지만, 자존심과 용기가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생명력은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함정과 불행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 P. 126 ‘엘베 강의 해적’중에서

  자기가 먹을 빵을 스스로 정당하게 벌어서 먹는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거리나 시간은 아무 상관 없었다. - P. ‘콤파’중에서

  <확실하게.> 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확실함을 증오한다. - P. 131 ‘침묵의 목소리’중에서

  삶의 아포리즘에 해당하는 세풀베다의 이야기는 극성스럽지도 과장되지도 않는다. 그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오랜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들이 계급간 모순에 대한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는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과거의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헌사이다.

  아울러 세풀베다의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환경’의 문제다. 그린피스 특파원으로 활약한 적이 있다는 그의 이력을 살펴보지 않아도 그의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진하게 배어있다. 인간이 숨쉬고 살아가는 기본적 토대를 제공하는 자연에 대한 경외는 인간 자체에 대한 소외 문제만큼 우리에게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의 소임이 단순한 재미와 인㎱?감동에 있지 않다면 세풀베다의 작품에 보내지는 찬사는 분명한 이유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주제와 내용면에서 영미 문학 중심이나 프랑스, 독일 문학이 세계 문학의 전부였던 우리에게 관심과 대상을 넓혀 볼 수 있는 이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만난 그의 작품들을 좀 더 읽어 볼 일이다.


200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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