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들에게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9
최영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를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충분히 빵이 굳어버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 굳은 빵에 버터를 바르는 일은 순전히 시인의 몫이다. 그 빵에 버터를 바르지 않고 곰팡이 피도록 방치하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는 일도 시인의 선택이다. ‘너희들’의 주체가 모호하긴 하지만 최영미는 7년만에 시로 돌아왔다. 그녀가 추억하기 위해 돌아왔는지 그녀를 추억하는 독자들을 위해 돌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외치는 그녀는 <꿈의 페달을 밟고> 이후 다른 일들을 해왔다. 산문집을 내고 소설도 썼으며 번역도 했다.

  <돼지들에게>를 들고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녀의 돼지들은 누구일까?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헤아려본다. 시간이 흐르고 때가 쌓인 작품들을 시집으로 묶어내는 의례적인 작업이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꾸준히 시를 쓴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긴장과 날카로움은 무뎌지고 도전과 무모함도 사라졌다. 당연한 일인가. 그래도 시간이 모든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침묵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다만 굳은 빵에 버터나 바르며 ‘너희들을 추억’할 뿐이다.

최소한의 자존심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십대 중반이 되어버린 시인은 인생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사실(fact)뒤에 숨어 있는 진실(truth)이 무엇인가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대꾸하지 않겠다는 말은 생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무덤에서 일어나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죽지 않겠다는, 지금은 아니라는 말은 오히려 그녀의 침묵을 변명하고 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자존심’ 을 생각할 때가 있다. 다만 그 대처 방법은 모두 다르다. 시인은 타인들의 ‘망각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건 자기 스스로 잊겠다는 다짐이다.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

돈과 권력과 약물로 오염된, 아무리 더러운 그라운드에도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 축구이다.

  2002년 월드컵 광풍이 몰아칠 때 썼을 법한 축구 관련 시들이 3부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이다.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는 너절한 시 중의 하나이다. 그라운드에 살아 움직이는 그 한 조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어지지도 않는다. 축구는 축구일 뿐,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라는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육체와 영혼에 대한 어떤 문답

A : 너, 왜 그 남자랑 못 헤어지니?
B : 난 그 남자의 영혼을 봤거든.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말하자면 연민의 정이지.
A : 그런데, 도대체 영혼이 무엇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B : 육체를 뺀 나머지지.

  여전히 사랑 타령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연민의 정과 영혼에 대해 쉽고 일상적인 통찰이 생길 나이가 됐다고 믿는다. 육체를 뺀 나머지가 영혼이라면 개인의 존재나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들이 독자와 쉽게 소통된다는 면에서 최영미의 시들은 인정받을만하다. 어렵고 난해한 시들이 어지럽게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시들을 독자들은 읽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시인들이 시를 쓰지는 않지만 문학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최영미가 거든 성과는 분명하다.

  하지만 <돼지들에게>에서 보여준 시간의 파편들은 퍼즐처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깨진 항아리의 빠진 부품들이 보이는 듯하다. 5부로 구성된 시집은 각각의 다른 이야기들로 겉돌고 있으며 예의 주목할 만한 1부의 긴장감들을 뒤로 갈수록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다.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감각적 표현은 시인의 미덕이다. 그마저 없었더라면 하드커버 시집 한 권이 주는 부담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그녀의 시집을 다시 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00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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