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333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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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광장 앞에서 불에 탄 전경 버스를 바라 본 것은 버스 안에서였다. 시위 군중에 막혀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승객들은 그대로 앉아 마냥 기다릴 수도, 내려서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버스 차창 밖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다. 10대 소년의 눈에 비친 87년 6월은 혼돈속의 질서였다. 무엇인지 모를 열기와 함성들, 거대한 강물처럼 군중들은 물결치듯 조금씩 움직였다. 광화문 네거리 빌딩에는 건물마다 아저씨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길가 한켠에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흔드시던 하얀 손수건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6․10 항쟁 20주년을 맞이해서 누군가가 쓴 한겨레 칼럼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인용했다. 희미한 옛사랑도 아니고 그 그림자를 바라보아야하는 현실은 무기력하기만하다. 4․19에 대한 희미한 그림자가 이제는 다른 모습으로 희미하게 보인다. 87년 6월이 희미한 게 아니라 그 시대정신과 민중들의 열망과 가슴속의 뜨거움이 희미해졌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가장 큰 불행을 감지한 것처럼 시인도 소시민의 뒷모습을 노래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2007년 시인은 정년퇴직을 했고 드디어 전업 시인이 되었다. 노년의 김광규 시인을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해 꼼꼼히 들여다본다.

  시집은 제목이 내용을 집약하는 경우가 있고, 부분으로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김광규의 <시간의 부드러운 손>은 제목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고교시절에 가슴에 담았던 수많은 시인들 중 오규원은 세상을 등졌고, 황동규나 김광규는 정년을 맞았다. 세월은 모두를 변화시키고 사람도 시대도 다른 무언가로 바꿔 놓는다.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홉 번 째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목소리는 예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다르면서 변하지 않는 숨결들이 편안하게 읽힌다.

춘추(春秋)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전통적으로 계절의 변화가 생의 변화를 대변한다. 봄에서 가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단순한 세월의 흐름이 생의 진리를 안겨준다는 선(禪)적인 명상으로 깨달은 것도 아니다. 무심한 순간들이 생활 속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그러했으나 인식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산수유 꽃피는 소리보다,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보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화자와 허튼소리 말라는 아내의 눈빛이 떠올라 한참 웃었다. 일상 속에 소소한 마음의 갈피를 잡아내는 시인의 매력은 여전하다.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수많은 시들이 김광규 시의 특징으로 분류된다. 그만큼의 의미와 한계도 지니고 있다. 확장되지 못하고 의미의 영역이 좁아질 위험성이 있다. 시야와 관점이 폭넓다고 해서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문제가 일반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키 높이로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느낌을 받는다. 한 번쯤 발로 툭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 거울’과 같은 시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알의 모레 속에 온 우주가 담겨있다’고 한 윌리엄 브레이크가 생각나게 하는 명편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난 후에 갈잎 손바닥에 고인 한 숟가락 만한 빗물이 거울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나를 비추고 온 생애를 담아낸다. 무심하게 던지는 한 마디가 ‘마지막 빗물’이라는 표현과 함께 시인의 전 생애 혹은 독자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거울이 된다.

가을 거울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울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탐구와 ‘마지막’에 대한 성찰들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소멸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든 소멸이라고 부르든 사라짐이라고 부르든 ‘출입통제선’이라는 경계를 이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그 미련과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올 때가 많다. 삶과 죽음의 그 분명한 경계를 출입통제선 이쪽과 저쪽으로 나눠 놓은 솜씨도 솜씨지만 그 무심한 눈길이 오히려 두렵다. 엉뚱하게도, 이렇게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날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조용히 눈감고 싶다는 시와 무관한 개인적인 욕망! 항상 생활 속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묶여있는 삶의 비극성은 ‘출입통제선’ 언저리에서 서성거린다.

생사(生死)

방독면 쓴 방역요원들이 계사(鷄舍)에
사정없이 분무기로 소독약을 뿜어대고
닭과 오리 수천 마리를 비닐백에 잡아 넣어
한꺼번에 살(殺)처분한다
조류독감 때문이다
출입통제선
바깥의 냇가에는
어디서 날아왔다
천둥오리들 한가롭게 무자맥질하며 놀고
백로 몇 마리 한 발로 서서
명상에 잠겨 있고


070614-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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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스캔들 창비청소년문학 1
이현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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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혹은 1318세대라고 하는 구분과 명칭은 모호하기만 하다. 학생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그저 나이를 기준으로 13세부터 18세까지를 같은 집단으로 묶기도 어렵다.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데 공통점이나 특징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성향을 파악하기 어렵다. 좌충우돌, 아노미, 질풍노도, 사춘기 등 전통적으로 청소년 시기를 명명하는 수많은 말들도 결국에는 성장의 과정에 있는 변화무쌍한 시기를 지적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국적과 세대를 불문하고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 가장 혼란스런 시기이며,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성장통을 겪는 세대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왔으며 유사한 갈등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내보았기 때문이다. 아련한 추억과 부끄러운 기억들, 두근거리는 떨림과 가슴 벅찬 희망이 뒤섞여 자기 생의 주체로 홀로 서야 하는 과정은 우리 모두의 과거이며 미래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창비 청소년 문학’의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이현의 <우리들의 스캔들>은 장편소설을 통해 이 시대 청소년들이 겪는 갈등과 고민의 단면을 보여준다. 장편임에도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이유는 특정한 사건에 얽힌 단순한 문제를 다양하고 다채롭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식상하지만 가장 중요하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학생이며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변하지 않는 관료 조직인 학교의 생리와 모순들은 변화에 민감하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학생들에게 억압과 통제의 수용소로 인식된다. 학교 자체가 가진 순기능을 주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어이없는 일들과 마주치면 할 말을 잊는다. 학교는 늘 학생들의 중심에 놓인다.

  여기서 학교 밖의 아이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간 아이들, 대안 학교의 아이들과 직업을 가진 청소년들은 문학에서도 소외된 느낌이다. 물론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학교에 다니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민이 가장 심각하겠지만 식상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과 혼란스런 가치관의 문제에 직면한 청소년들의 문제를 좀더 깊이 있게 다루어주는 본격적인 청소년 문학을 기대한다. 기성 작가들의 경우에도 이 문제와 주제에 대해서는 소홀한 편이다. 소홀한 것이 아니라 관심 밖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 <지와 사랑>, <수레바퀴 아래서> - 은 한동안 밤잠을 설치게 했다. 사춘기의 혼란스런 시절들을 문학과 함께 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풍부한 감성과 깊은 사색은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들의 희망이며 미래이다. 단순하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과 삶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과정은 마련해주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왜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는지 대안을 찾아보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들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교육은 그러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이 소설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오로지 정해진 규칙과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을 요구하는 것이 학교 교육의 현주소이다. 미래의 학교가 궁금하다. 이대로 계속 버틸 수 있을까? 학교의 관료성은 상명하달과 의사소통 구조의 단절에 있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를 교육의 주체라고 이야기하지만 주체적인 힘이 발휘되거나 소통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학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학생과 교사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학부모는 학교를 불신하며 교사는 학생을 믿지 못한다. 그들의 눈높이가 다르고 교육과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와 마음이다. 사회의 시스템과 학교에 요구하는 일반인들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 상급학교의 진학을 위한 발판이나 취업을 위한 수단으로, 혹은 보다 많은 돈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로 학교가 전락해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사회의 요구에 적응해야 하는 학교는 교육의 방향과 앞날을 위해 제 몸을 바꿔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생들은 빛의 속도로 소통하고 어른보다 먼저 느낀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한 학급의 카페가 운영되고 그 과정에서 교생과 담임 교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나 학교와의 불화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일상과 같은 것이다. 이런 내용이 하나로 묶이면서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에서 하나 하나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며 반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은 충분히 학생들에게 공감을 얻을만하지만 현실적인 측면에서 면밀한 조사가 아쉽다. 한참 사극을 보는데 저 멀리 배경이 된 도로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과 같은 부분이 있다. 디테일을 놓치면 좋은 그림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동 문학도 아니고 성인 문학도 아닌 ‘청소년 문학’이라는 미개척 분야에 대한 창비의 본격적인 도전은 관심과 결과가 주목된다. 보다 다채롭고 적극적인 기성 작가의 참여와 해외 문학 작품의 발굴도 필요하다고 본다. 어른과 청소년들이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을 기대한다. 그 작품들을 통해 세대 간의 공감이 이루어지고 서로의 입장과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청소년 문학도 분명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07061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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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읽었던 책들이 평생의 밑거름이 되지 않나 싶게
저도 그 시절에 많은 책을 읽었어요.
저는 데미안을 읽고 한동안 멍해있었죠.
이제 그때처럼 마음이 짠해지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더군요.

sceptic 2007-06-1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살 이전과 이후의 독서는 질적으로 다르니까요...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던 시절이죠...
 
국경꽃집 창비시선 275
김중일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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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불편한 시가 싫어진다. 그 불편함은 내 마음의 불편함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 시의 언어와 이미지가 이성이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서걱이는 모래바람처럼 시의 언어들이 모래알처럼 뭉치지지 않고 흩어지는 시는 견디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게 변화가 오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주의가 유행처럼 버질 무렵 시의 내용과 형태가 완전히 너덜거릴 때까지 콘크리트 벽에 문지르던 시절이 있었다. 의도와 이미지만 남고 시는 사라졌다. 종류는 다르지만 언어의 틈새와 의미의 간극을 짚어내는 건조한 시들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선함도 생의 감각이나 통찰도 전해주지 못하고 삐걱이며 겉돌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중일의 <국경꽃집>은 시간과 사람 그리고 기계 사이를 넘나들며 다양한 변주를 울리고 있다. 상상력의 측면에서는 탁월하지만 생경한 이미지와 혼란스런 시점의 이동이나 황망한 공간이동 현실에서 벗어난 서술들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 그치고 있다. 시를 읽는 느낌이야 백인백색이니 물론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이성의 어느 지점을 자극하거나 언어의 힘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

1

  잠깐 엎드려서 낮잠을 자고 있었어. 꿈결인가……어느 익숙한 손길이 내 둥글게 구부러진 등과 어깨를, 흐느끼며 거칠게 잡아흔드는 거야. 도대체 뭐지? 눈을 떴을 때, 나는 국경꽃집 카운터에 앉아 있었어.
  - ‘국경꽃집의 일일’중에서

  표제어가 되고 있는 국경꽃집은 시인에게 경계선으로 금기의 선으로 보여진다. 국경은 눈에 보이는 실선이 아니라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는 가상의 선이다. 넘지 못할 금기의 선은 아니겠지만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 된다. 모호한 시간과 공간의 경계 속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팔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풍경일 것이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환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워주는 일이 시인의 몫이다. 김중일은 그 경계선에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개처럼 모호한 영상만 가슴에 남는다. 

  봄 밤

이 밤 사장님이
지구 반대편 나스까 고원을 순시하신다

검은 도화지 위에 번진 도시의 불빛,
밤의 지분이 마드는 무정형의 불면

죽은 버드나무에 기대 우는
노파의 동굴같이 캄캄한 입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는 박쥐들

또다시 사장님께서 버드나무에게로
멀고 먼 손을 뻗으시어, 철컥, 철컥,
가는 잎 수천수만 개 재개발하시는 봄밤

결재문서 속 검은 셀로 지정된 표를 따라
칸칸이 지나가는 첫 번째 전동차

먼 출장에서
노란 택시를 타고 사장님이 돌아오신다

  사장님의 존재가 화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의미 이전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면 할 말이 없으나 현실의 지난함을 신화와 환상의 세계로 표현하는 것들이 때로는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 또다시 접한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젊은 시인의 생경한 언어들은 ‘철컥, 철컥’ 마음의 문을 잠가 버린다.

  하늘이 푸르고 바람이 시원하니 더 없이 행복하다는 식의 시만을 원하는 독자는 없다. 다람 새로움과 생각의 깊이 다양한 층위의 언어들이 보여주는 놀라움을 기다리는 욕심많은 독자들을 위해 시인들의 고통과 불면의 밤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도 그들을, 그 시간들을, 그렇게 태어난 시들을 기다린다.


07060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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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안팎
유희석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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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 개념과 기점에 대한 논의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대정신(Zeitgeist)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사회적 논리나 현상에 대한 시각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근대는 중세를 넘어서면서 비롯된 다양성에 대한 반성이자 인류의 진보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과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는 탈근대에 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근대에 관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여러 분야에서 관심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근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탈근대의 문제가 시기상조라고 여기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아직도 전근대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고 하면 지나친 발상일까? 그렇지 않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적 현상이나 이론들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보이지 않는 공간들은 우리들 의식의 영역이다. 이러한 의식이 반영되어 눈에 보이는 현상들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술이고 문학이다.

  유희석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은 문학 평론집이다.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비평에 대한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다양한 논란이 벌어졌지만 여전히 비평은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 권위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학문적 관점에서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진다면 독자와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져만 갈 것이다.

  간만에 펼쳐든 평론집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복합적이다. 개인적으로 김현 선생이 떠나고난 후에는 거의 평론집에 손을 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몰입했거나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지만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비평의 기능에 대해 다시 생각했던 기억이 아득하다. 김현의 글은 또 다른 종류의 문학으로 읽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단 이성적인 설득과 논리적인 타당성 저편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문장들이 큰 역할을 했다. 평론과 무관하지만 그의 <행복한 책읽기>는 지금도 가끔 꺼내 뒤적거려본다.

  비평의 시대가 가버렸어도 여전히 유효한 비평의 기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유희석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은 문학을 통해 시대 정신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정치한 논리와 예민한 감수성은 평론가가 지녀야할 덕목이다. 유희석은 이 책에서 이상과 김수영, 기형도와 고은의 시를 통해 근대 극복의 이정표를 제시하려는 시도를 한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소설가와 통일 시대를 중심으로 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 문학의 풍토와 환경들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개별 작품들을 통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간격들을 메워줄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내가 읽어낸 징후들은 근대의 극복의지가 아니라 시대 정신을 앞서간 흔적들이다. 현실을 뛰어넘는, 시공을 초월한 환타지가 아니라 미래의 가치와 현실을 뒤엎는 부정정신만이 살 길이다. 영문학자답게 보들레르와 근대, 근대성, 모더니즘, 리얼리즘에 관한 폭넓은 성찰과 비판적 글쓰기는 저자의 왕성한 활동과 더불어 현재의 상황들을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 서양문학과 근대 극복의 지평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4부의 경우 현실 극복의 의지가 아니라 서양문학의 극복과 근대의 극복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찾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빛만을 쫓던 시대의 문학가들은 행복했다고 말하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다양성과 복잡성의 혼돈 속에서 문학의 지향점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뚜렷한 목적과 분명한 목소리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폭넓은 시야와 다양한 목소리들은 언제든 우리의 사고의 폭을 넓혀 준다. 개별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중요하지만 시대나 상황을 통찰할 수 있는 흐름들을 읽어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다시 그의 평론집을 읽게 될지 알 수 없으나, 해석에 반대하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을 어렴풋하게 읽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책으로 기억할 것이다.


07053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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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선집 1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광규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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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신입생 무렵으로 기억한다.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반향을 일으킬 제목이 주는 강렬함에 이끌렸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는 한 마디를 지금도 기억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시의 제목을 소설의 제목으로 빌려왔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 후니까 브레히트의 시집을 처음 접한 것은 스무 살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란색 표지의 강렬함과 브레히트의 흑백 사진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더구나 김광규의 번역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나에게는 꽤나 인상적인 책이었다. 책꽂이를 뒤적이니 책이 없다. 당연히 그곳에 있을 거라 믿었던 대상의 부재를 확인하는 순간 느껴야 하는 당혹감. 과거의 시간과 그리움들은 그렇게 추억 속에나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서점을 뒤적였지만 절판되었고 중고책 사이트 고고북에서 검색하니 한 권이 나왔다. 얼른 주문하고 우여곡절 끝에 수원 남문서적에서 열흘 만에 책이 도착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추억에 잠겼고 책장을 넘기다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 사랑함으로써 행복한 나
1997. 7. 5  蓮

  연필로 휘갈겨 쓴 책 속지의 메모가 왼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다. 연꽃이란 이름을 보아서는 책 주인은 여성이었을 것이고 세상과 삶에 대해 고민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사랑이 어떤 종류이든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삶을 진지하게 고민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을 했다. 무슨 연유에서 시집을 헌 책방에 내놓았을까? 삶의 곤궁함이나 힘겨움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상적 꿈에 저당 잡힌 젊은 날에 대한 회한이었을까? 헌 책방에서 구입한 시집 한 권으로 참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브레히트도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짧은 멈춤으로 보인다.
- ‘사랑하는 사람들’중에서

세기를 뛰어넘는 ‘사랑’은 그 느낌과 감각, 대상과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혀질 것이다. 영원앞에 사랑은 짧은 멈춤일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와 그래도 사랑함으로써 행복하다고 말하는 어느 독자의 목소리는 분명히 공감하고 있다. 관점과 형식이 다를 뿐.

  1898년에 태어나 20세기를 온몸으로 시작했던 시인은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열정과 뜨거움을 표출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양차 대전을 맞이했고 히틀러의 악령을 피해 러시아, 미국, 베를린으로 망명 생활을 하며 끝까지 살아 남았다. 공산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목소리로 세상을 간파했다.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혹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비참한 현실과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시로 토해내고 있다.

  현실참여의 목소리가 지니는 문제점은 거칠고 투박하게 문학을 수단화하는 데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내용과 형식을 분리할 수 없지만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이제 화석이 되어간다. 브레히트는 시의 내용과 영역이 지니는 의미를 넘어 선 자리에 위치한 고급한 문학이 아니다. 설익은 구호는 아닐지라도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참함과 불가해함을 타계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읽힌다. 지나친 냉소와 아이러니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이 되고 직설적인 묘사와 열정에 찬 목소리는 시인의 젊은 날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여러 권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선집의 형태로 펴냈기 때문에 브레히트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맛보기 수준의 작품들을 엄선했다. 하지만 단 한 편의 시가 전하는 힘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때가 있다. 초판이 발행됐던 1985년을 생각해 보면 이 시집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고 추억은 사진보다 선명하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임시 야간 숙소’중에서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월,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 ‘배움을 찬양함’중에서

  아무것도 아닌 열망들에 대해 목숨을 걸 수 있는 특권을 가져본 사람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와 삶에 대한 열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 순수함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조폭 영화의 대사처럼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은 강한 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린 걸까. 옛 전우들은 사라져 버렸고 추억은 흑백 사진처럼 앨범을 장식하고 있는 시대는 아니다. 진행형의 역사는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새벽은 어둡기만 하다.

  그래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가슴에 ‘사랑’이 남은 사람들이다. 친구에 대한, 혹은 삶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남은 생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늘이 생각난다. 그 시퍼런 투명함에 눈을 베이고 마음을 씻어 볼 수 있는 작은 행복을 감사히 여기며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고스란히 간직해야겠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07052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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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2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때 한 선배가 선물해줘서 읽은 기억이 나네요.
이제는 읽었던 기억도 다 흐려졌는데 <살아남은 자의 슬픔>만 뚜렷이 남았습니다.
요즘은 가끔 생각합니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 건가. 아니면
살아남은 게 결국 강한 건가...

비로그인 2007-05-2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읽을 때는 그 전에 읽었던 사람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묘한 분위기인데요.

sceptic 2007-05-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2 님, 살아 남은 자가 강한 거겠죠?
그래서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承姸 님, 간만에 헌책방에서 책 구입하고 참 많은 생각과 추측과 상상으로 옛 생각을 좀 했고 원래 주인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承姸


비로그인 2008-10-1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외국시집이라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리뷰 쓰셨쿤요. 좀 냉소적인지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 슬퍼해야 하는 건 아니길 빌며....Thanks To~~~

sceptic 2008-10-14 13:58   좋아요 0 | URL
살아남은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순 없죠...어떻게 살아 남았느냐에 따라 부채감 정도는 가져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