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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ㅣ 브레히트 선집 1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광규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평점 :
대학 신입생 무렵으로 기억한다.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반향을 일으킬 제목이 주는 강렬함에 이끌렸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는 한 마디를 지금도 기억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시의 제목을 소설의 제목으로 빌려왔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 후니까 브레히트의 시집을 처음 접한 것은 스무 살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란색 표지의 강렬함과 브레히트의 흑백 사진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더구나 김광규의 번역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나에게는 꽤나 인상적인 책이었다. 책꽂이를 뒤적이니 책이 없다. 당연히 그곳에 있을 거라 믿었던 대상의 부재를 확인하는 순간 느껴야 하는 당혹감. 과거의 시간과 그리움들은 그렇게 추억 속에나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서점을 뒤적였지만 절판되었고 중고책 사이트 고고북에서 검색하니 한 권이 나왔다. 얼른 주문하고 우여곡절 끝에 수원 남문서적에서 열흘 만에 책이 도착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추억에 잠겼고 책장을 넘기다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 사랑함으로써 행복한 나
1997. 7. 5 蓮
연필로 휘갈겨 쓴 책 속지의 메모가 왼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다. 연꽃이란 이름을 보아서는 책 주인은 여성이었을 것이고 세상과 삶에 대해 고민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사랑이 어떤 종류이든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삶을 진지하게 고민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을 했다. 무슨 연유에서 시집을 헌 책방에 내놓았을까? 삶의 곤궁함이나 힘겨움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상적 꿈에 저당 잡힌 젊은 날에 대한 회한이었을까? 헌 책방에서 구입한 시집 한 권으로 참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브레히트도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짧은 멈춤으로 보인다.
- ‘사랑하는 사람들’중에서
세기를 뛰어넘는 ‘사랑’은 그 느낌과 감각, 대상과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혀질 것이다. 영원앞에 사랑은 짧은 멈춤일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와 그래도 사랑함으로써 행복하다고 말하는 어느 독자의 목소리는 분명히 공감하고 있다. 관점과 형식이 다를 뿐.
1898년에 태어나 20세기를 온몸으로 시작했던 시인은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열정과 뜨거움을 표출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양차 대전을 맞이했고 히틀러의 악령을 피해 러시아, 미국, 베를린으로 망명 생활을 하며 끝까지 살아 남았다. 공산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목소리로 세상을 간파했다.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혹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비참한 현실과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시로 토해내고 있다.
현실참여의 목소리가 지니는 문제점은 거칠고 투박하게 문학을 수단화하는 데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내용과 형식을 분리할 수 없지만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이제 화석이 되어간다. 브레히트는 시의 내용과 영역이 지니는 의미를 넘어 선 자리에 위치한 고급한 문학이 아니다. 설익은 구호는 아닐지라도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참함과 불가해함을 타계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읽힌다. 지나친 냉소와 아이러니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이 되고 직설적인 묘사와 열정에 찬 목소리는 시인의 젊은 날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여러 권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선집의 형태로 펴냈기 때문에 브레히트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맛보기 수준의 작품들을 엄선했다. 하지만 단 한 편의 시가 전하는 힘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때가 있다. 초판이 발행됐던 1985년을 생각해 보면 이 시집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고 추억은 사진보다 선명하다.
책을 읽는 친구여, 이 책을 내려놓지 마라.
몇 명의 사내들이 임시 야간 숙소를 얻고
바람은 하룻밤 동안 그들을 비켜가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 ‘임시 야간 숙소’중에서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월,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 ‘배움을 찬양함’중에서
아무것도 아닌 열망들에 대해 목숨을 걸 수 있는 특권을 가져본 사람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겪었던 무수한 시행착오와 삶에 대한 열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 순수함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조폭 영화의 대사처럼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은 강한 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린 걸까. 옛 전우들은 사라져 버렸고 추억은 흑백 사진처럼 앨범을 장식하고 있는 시대는 아니다. 진행형의 역사는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새벽은 어둡기만 하다.
그래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가슴에 ‘사랑’이 남은 사람들이다. 친구에 대한, 혹은 삶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남은 생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늘이 생각난다. 그 시퍼런 투명함에 눈을 베이고 마음을 씻어 볼 수 있는 작은 행복을 감사히 여기며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고스란히 간직해야겠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070522-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