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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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처음으로 다치바나의 글을 읽은 것은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두번째이다. 비록 두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나는 다치바나식 글쓰기에 반해 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글쓰기는 미사여구나 수식어를 최대한 배제한 단문위주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건조해보이지만 꼭 할말만 하는 그의 습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일종의 일본 동경대생에 대한 종합평가서이다. 동경대생이 정말 학력이 떨어졌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저자는 일본의 근대교육까지 올라가 살펴본다. 저자의 결론은 일본에는 자생적인 대학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국가에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자발적인 정신이 자리잡지 못한 것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서울대학이 과연 진정한 지식의 전당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대학이 갖고 있는 고유한 속성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류대학에 가기 위한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언젠가 다치바나씨가 쓴 것과 유사하게 서울대학을 사례로 한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무조건 비판만 하지말고, 조금은 우호적인 시선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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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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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이 책을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 네트웍이론에 대한 일반적인 개론서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렇게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자는 일관되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그의 가설을 증명하고 있다. 생태계, 영화산업, 바이러스, 인터넷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인터넷이 탄생의 비화는 흥미진진했다. 인터넷은 소련의 핵공격을 막기위해 중앙집권적 이있던 통제체제를 분산형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으로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의 인터넷은 초기의 그런 목적과는 달리 폭넓게 이용되고 있지만...... 지금 이맇게 서평을 올리고 누군가가 읽고 의견을 나누게 된 것도 어찌보면 다 인터넷의 덕이다. 물론 전자서점도 그런 혜택을 누리고는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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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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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은희경은 인기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인기작가란 흔히 대중적으로는 인기가 있지만 문학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주장은 무릇 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탄생한 소설의 본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문학적 엄숙주의가 빚어낸 희비극이다.

개인적으로 은희경씨의 마이너리그를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세계를 드라마틱하게 꾸며내는 이야기솜씨에는 혀를 둘렀다. 여성판 성석제라고나 할까? 그녀의 현란한 글솜씨에 반한 탓일까? 그녀의 후속 소설 상속은 조금은 정체된 느낌을 준다. 행여나 인기작가라는 비판에 스스로 이야기솜씨를 억제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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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미다스 휴먼북스 3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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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날이 앞으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겠는가? 어렸을 적 읽은 위인전 속의 헬렌 켈러는 시각과 청각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애니 설리번이라는 위대한 선생님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이 인간승리의 연속일수는 없는 법, 헬렌 켈러 또한 장애인이기에 앞서 한 인간이었기에 인간적 갈등이나 약점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위인전에는 나오지 않는 헬렌 켈러의 또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많이 놀랐다. 헌신적으로만 알았던 애니 설리번 선생이 사실은 불우한 과거를 지닌 소유욕과 허영심이 많은 여자였으며(물론 헬렌 켈러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지만), 헬렌 켈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간에 알력이 심했으며, 헬렌 켈러가 사실은 부모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는 것들은 위인전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헬렌 켈러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눈과 귀가 먼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는지 부터가 의문투성이였다. 물론 에디 셜리번의 남편이었던 존 메이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단 그것 때문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그보다는 광범위한 독서가 - 헬렌 켈러는 책읽기를 즐겨했으며, 책을 평생의 친구로 여겼다 - 그녀를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만들었다는 측면이 더 옳다. 실제로 중년이후 헬렌 켈러의 사회활동을 보면 그녀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이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은 생계문제와 주변 사람의 만류 등으로 전면에 드러난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그 신념만은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녀가 생계 때문에 카네기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행위를 몹시 주저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에 기울어진 모습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저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정상인과 다름없어 보이는, 아니 무엇인가 성스러운 느낌마저 풍기는 그녀의 모습에만 열광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헬렌 켈러는 우리에게 성녀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을 뿐, 그녀가 무엇을 추구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책은 바로 그녀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앞을 볼 수 없는 나는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가지를 알려줄 수 있다. 아니 볼 수 있는 크나큰 선물을 받은 이들에게 한가지 충고를 할 수 있다. 내일이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처럼 보라. 내일이면 듣지 못하게 되는 사람처럼 들어라. 음악 같은 목소리들을, 새의 지저귐을,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을. 내일이면 촉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따뜻하게 만져라.' - p.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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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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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지향주의자들이 환경보호론자들에게 흔히 하는 질문 하나. 성장없는 환경보호주의가 무슨 소용인가? 인간이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 아니겠나? 환경보호는 성장 후에 해도 늦지 않은 것 아닌가?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끊임없이 시달려 왔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이런 질문을 해대며 먹고사는 문제의 우월성을 과시해왔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우리나라에서만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환경이 성장에 반(反)하는 것이냐 아니냐라는 논란 자체가 생태주의의 커다란 주제로 여져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환경에 반하지 않은 성장이 가능할뿐더러 심지어 성장을 위해서는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는 듣기에만 그럴싸한 논리들이 학계에서 판을 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란은 어차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즉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개인 혹은 집단이나 나라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인은 당연히 성장을 헤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환경보존을 주장할 것이고, 환경문제로 직접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경우에는 환경을 배제한 성장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울분을 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앞에서 상식같아 보이는 앞의 주장, 즉 환경에 반하지 않은 성장이 가능할뿐더러 심지어 성장을 위해서는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 이 사실은 허구임을 밝히고 있다. 즉 성장은 수치에 불과할 뿐 개인의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의 뉴스에서 올해 우리나라의 성장률이 얼마였고, 내년에는 어느 정도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수치로 보도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매년 되풀이되는 이 연례행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과연 저 수치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물론 경기의 동향은 그것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개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수치의 높낮이가 개인의 삶의 정도를 측정하는 도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경제성장을 계속 추구하는 것만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의문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즉 경제성장을 계속하는 것만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성장이 목표가 되는 삶은 결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면서, 그 대안으로 소위 '대항발전(counter development)'를 주장하고 있다.

'대항발전'이란 지금까지의 발전의 의미, 즉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사회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저자는 '대항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줄이는 발전' 즉 에너지 소비, 경제활동의 시간 등 가격이 붙은 것을 줄여야 하고, 둘째, 경제이외의 것, 즉 경제활동 이외의 인간활동, 시장이외의 행동,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대항발전'은 경제용어를 바꿔 말하면 교환가치가 높은 것을 줄이고 사용가치를 높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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