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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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키는 장인이다. 어떤 글을 써도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다.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까지. 사실 개인적인 스토리를 공개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당사자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망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랄까? 무라카미는 절묘하게 이 지점을 벗어난다. 분명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무언가 있었을 것 같은데 슬쩍. 도리어 일본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일부러 죽인 중국군 소년병사의 차분한 모습에 감탄하는 장면을 끼워 넣는다. 전형적인 일본식 물타기에서 작가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점을 빼놓고 글 자체는 빼어나다. 고양이를 버리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가족을 끄집어 낸 것도 탁월하다. 문장도 여전히 잘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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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 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지만 가장 넓은 세계를 만들어낸 페트로스키 선집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홍성림 옮김 / 서해문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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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은 내 오랜 친구다. 지금도 책상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그냥 전시용이 아니라 언제든 전투에 참가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주로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보면 메모지에 적거나 괜찮은 글귀에 표시를 하는 용도다. 하루를 마감하고 간단하게 그 날 일어났던 일을 정리할 때도 연필을 든다. 쇼핑할 거리가 생겨도 이면지에 적어둔다. 이처럼 다양하게 활용되는 연필은 과연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 <연필>은 나 같은 궁금증을 가진 사람에게 딱인 책이다. 그냥 쉽게 생각했지만 사실 알고 보니 첨단과학(?)이 숨어 있고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당신이 만약 연필 숭배자라면 곁에 두고 짬짬이 읽어볼만하다. 참고로 내가 가장 즐겨 쓰는 연필은 스테들러 옐로우 펜슬(134-HB)이다. 심지도 단단하고 잘 부러지지 않아 만족한다. 한때 파버카스텔에 빠져 지낸 적이 있지만 조금 가벼운 느낌이다. 물론 내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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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수집
설동주 지음 / 비컷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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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현재에 대한 불만족이 크면 클수록 더욱 커진다. 셜록 홈즈를 보라.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배경이 작가가 살았던 시기와 다르다는 건 잘 알지 못한다. 곧 코난 도일은 1920년대에 직전 세대인 빅토리아 왕조를 묘사한다. 영국인들에게는 가장 위대했던 그 때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언제가 그런 시대였는가?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을 다루는 역사물을 보면 세종이나 영정조때를 황금기로 그린다. 재미있는 건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 임진왜란이 그 예다. 


그러나 이처럼 아주 좋거나 매우 나쁘지 않은 평범한 시절은 금세 잊혀진다. 을지로도 마찬가지다. 한 때는 온갖 잡동사니 상점이 들어서 있다가 빈 공간에 야외 술집나 힙한 카페가 들어서면서 힙지로라 불리기도 했지만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질 운명이다. <을지로 수집>은 마지막 기록이다. 젊은이들이 복고에 대해 갖는 특유의 낭만적인 감성이 곳곳에 보이지만 딱히 감동적이지는 않다. 다분히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레트로라는 말에 속지 말라. 살아보면 얼마나 불편한지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막연히 오래된 것이라 사랑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건 무질서의 또 다른 이름이고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고 박원순 시장 시절의 서울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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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풍경 -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유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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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름 이유가 있다. 상자에 갇힌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 모두 박스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고정관념이 바뀌었다. 폰트 때문이다. 곧 다채로운 글꼴 만들기를 게을리 한 탓이다. 이후 이런 저런 다양한 글자체를 접하면서 글자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글자 풍경>은 폰트와 관련된 책이다. 인류는 문자를 발명한 후 다양한 서체를 개발해왔다. 그 중에는 한 나라나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아랍어나 독일어가 대표적이다. 뜻을 몰라도 '아 어느 나라 문자구나'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이 책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로마 활자에서 바흐 악보에 이르기까지. 정직하게 말해 글은 잘 읽히지 않지만 글자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덧붙이는 말


서체에 대한 활용 중 으뜸은 광고다. 소주나 영화 포스터를 보라.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글꼴이 사람들의 시선을 확 잡아끈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파비앙이 방문했던 글꼴 전문가 편을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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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소소설 대환장 웃음 시리즈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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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지하철을 탔다. 근 20년 이상. 심지어는 전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편도 2시간 이상 걸리는 곳까지 일하러 다녔다. 늘 우울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생각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달랐다. 현실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렵사리 자리를 찾아 앉은 남자. 그에게 뺏겨 화가 난 인간, 그 인간의 입에서 나는 불고기 냄새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여인, 학생 앞에 자리 잡고 계속 텔레파시를 보내는 할머니, 억지로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앉은 아줌마, 건너편 육감파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대생 다리에 시선이 꽂힌 중학생, 그 옆에서 경제신문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흘리는 아저씨, 그를 거슬리게 바라보다 앞자리 같은 여성의 허벅지에 꽂힌 옆자리의 백수. 아, 저질 변태. 임산부를 바라보는 불편한 눈들. 어쩌면 일본의 지하철은 우리와 이다지도 비슷한가? 


오늘은 오랜만에 3호선에 올랐다. 코로나가 다시 창궐한다는데 왜 이다지도 사람들이 많은 거지. 절로 짜증이 난다. 마스크로 무장한 채 행여 오해받을세라 한껏 팔짱을 끼고 최대한 공간을 좁히고 있는데 앞에 서있던 여성이 흘낏 나를 쳐다본다. 눈매가 날카롭다. 흥 하다니 재빨리 다른 곳으로 옮긴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대체 나를 뭐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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