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길가에 세워진 세개의 광고판.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한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았는가?
죽어가면서도 강간을 당했는데 왜 가해자는 아직도 잡히지 않는가?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태풍 소식에 뒤숭승하다. 한국 기상청의 예보 능력을 믿지는 않지만 이번엔 정말이다를 하도 외치다보니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다. 진짠가봐? 그러나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 빗나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경로가 달라지고 있다. 일본의 예측이 맞았다. 수도권을 포함한 서울을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지방을 경유하여 강릉으로 빠져나간다.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다 문득 깨닫는다. 남쪽 지역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겠군. 나는 방관자인가, 아니면 가해자인가?
딸이 죽었다. 그 와중에 강간을 당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3년이 지났다. 남편은 집을 나갔다. 보란듯이 열아홉 먹은 여자애와 살림을 차렸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다. 그러다 결심한다. 알리기로. 차도 잘 다니지 않는 외딴 도로에 버려지다시피했던 광고판에 문구를 남긴다.
죽어가면서도 강간을 당했는데 왜 가해자는 아직도 잡히지 않는가?
경찰서장은 뭘하고 있는가?
첫 두 문구에 놀라던 사람들도 마지막 문장에 혀를 찬다. 서장은 온 마을의 자랑이었다. 비록 강간범을 잡지는 못했지만. 게다가 그는 췌장암을 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이에게 죽창을 꽂는다며 원망을 해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탕, 서장은 삶을 마감한다. 그녀는 공공의 적이 된다. 그나마 의호적이던 소수의 사람들도 등을 돌린다. 급기야 광고판까지 불태워진다. 과연 밀드레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영화를 지배하는 감정는 분노다. 모두가 화를 안고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그 와중에도 이성이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하며 실마리가 풀린다. 그래 우리의 목표는 다시는 그런 더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놈들을 쓸어버리는 거야. 자, 함께 총을 들자.
덧붙이는 말
영화속 등장인물은 마치 아수라에 빠진 듯 해맨다. 서로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건 진정한 사랑이다. 그 순간을 잡아낸 것만으로도 내게 이 영화는 올해의 베스트다.
언젠가 영화제목을 원어 그대로 쓰고 있다. 딱히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이왕 할거면 제대로 하는게 맞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다. 직역하면 미주리주 에빙 외곽지역에 세워진 세 개의 광고판쯤 되겠다. 너무 길어 줄이는 건 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쓰리 빌보드는 심했다. 단수와 복수의 구분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쓰리 빌보즈라고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