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다이노 - 한국어 더빙 수록
피터 손 감독, 레이먼드 오초아 외 목소리 / 월트디즈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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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지구의 주인공은 공룡이었다. 인간이 아니라. 그 많던 공룡이 살아진 이유 중 가장 유력한 설은 행성 충돌이다. 공룡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생명체가 사리진 것을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공룡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공룡 이야기가 아이들 책과 잡지에 늘 소개되곤 했는데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굿 다이노는 공룡 이야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좋은 공룡이 주인공이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아기 공룡은 설상가상으로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다. 만약 자신을 괴롭히던 인간 아이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공룡 알로는 외로움체 지쳐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알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아인 아이 스팟과 함께 가족을 찾아나서면서 점점 성장해간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소한 위기도 극복하지 못하던 알로는 친구를 위해 희생을 할 줄도 알게 된다. 결국 알로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엄마와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글을 쓰고 보니 뻔한 스토리다. 그러나 이 애니메이션의 미덕은 나약한 한 공룡이 어떻게 장애를 넘게 되는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아빠가 자신을 위해 계곡에서 몸을 던져 죽게 되는 장면에서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눈물이 이미 한가득 눈동자에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공룡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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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1부 (스페셜 리허설 에디션 대본) 해리 포터 시리즈
J.K. 롤링.잭 손.존 티퍼니 원작, 잭 손 각색, 박아람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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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은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끝날듯 끝나지 않으며 이어지던 해리포터 시리즈가 막을 내리자 독자들은 또다른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초조해지고 말았다. 해리포터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지점에서 조안 롤인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 해리포터 이야기는 마치 초반분에 아역으로 인기몰이를 하던 사극 드라마에 성장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리 포터 이야기의 중심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들이라는 점이다. 수염이 듬성듬성 난 피터팬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영리했다. 장르를 바꾸자. 일단 시나리오를 써서 연극 무대에 올려 관객들의 반응을 보자. 반응이 좋다면 그 때 소설로 바꾸어 써도 좋다. 시니리오니 집단 창작도 가능하다. 연극 대본은 소설과는 전혀 다른 전문분야이니까.

 

만약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작가였다면 무슨 개소리냐며 이런 제안을 걷어차버렸겠지만 조안 롱링은 겸허하게 해리 포터에 대한 전세계 팬들의 열화같은 요구를 받아들였다. 정부의 생계보조금을 받으며 카페에서 글을 쓰던 시절의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내용을 보자. 역시 큰 줄기는 어른이 된 해리와 아들이 겪는 갈등이다. 해리는 아들의 모습에서 어린시절의 자신과 기억조차 없는 부모를 함께 떠올리며 혼돈에 빠진다. 도대체 이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잘 보살필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다. 그가 아무리 영웅이고 초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들과의 관계는 쉽게 풀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과연 연극무대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직접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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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즈음에 되돌아보는 우리 대중음악 (양장) - 대화로 푸는 한국 가요사
최준식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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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이란 지난 세월을 충분히 돌아볼 나이인가, 아닌가? 여하튼 중요한 건 육십살쯤 되면 회고록 비슷한 걸 내도 욕할 사람들은 없다. 단 백 이십살 이상까지 젊음을 유지하며 산다면 예외가 되겠지만.

 

글쓴이는 푸대접 받는 대중음악에 열이 받아 이 책을 썼다. 그렇다면 제목이 좀 더 섹시해야 맞다. <예순 즈음에 되돌아보는 우리 대중음악>이라니? 흘러간 옛 노래 타령 느낌이 물씬 나지 않는가? 내가 편집자라면 <악에 받쳐 쓰는 우리 대중음악>이라고 하겠다. 실제 내용은 이 제목에 더 걸맞다.

 

제목 때문에 내용이 가려 아쉬움이 커서다.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대중음악의 역사를 사건별로 재미있게 구성한 점도 돋보인다. 만약 연대기별로 주욱 늘어놓았더라면 아주 자루해졌을 것이다.

 

작곡가와 작사가에 주목한 점도 좋았다. 사실 우리에게는 가수가 주인공같지만 사실은 곡을 쓴 사람이야말로 실제 주인공이다. 영화에서 아무리 배우가 빼어나도 감독의 역량이 없다면 형편없어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박춘석 같은 위대한 작곡가는 동상제작은 물론 길이길이 업적을 기려야 할 대상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왜 법정 스님은 그렇게 칭송하면서 우리 삶의 애환을 함께 한 위대한 작곡가는 푸대접하느냐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거의 최근까지 노래를 섭렵하고 있다는 점이다. 넥스트나 서태지의 천재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흔히 대중예술은 만들어 소비하고 버리는 인스턴트 문화로 여겨진다. 어쩌면 대중문화는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그중에는 보석이 숨어있는데, 그 보석이야말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유산이다. 미국의 대중음악이 하나의 업적으로 살아숨쉬는 걸 보면 언젠가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단 정부가 주도하는 창조예술 어쩌구라는 정책만 폐기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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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달콤한 향기
버트 랭카스터, 토니 커티스 / 피터팬픽쳐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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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달콤함 향기>는 <내부자들>의 모티브가 된 영화다. 권력의 가까이에 붙어 밀고당기기로 세력을 불리는 언론인과 그 곁에서 똘마니 노릇을 하다 배신을 당한다는 설정까지 거의 흡사하다. 실제 <내부자들>에서도 이 영화를 언급할 정도다. 일종의 오마주인 셈이다.

 

권력의 세상은 흔히 동물의 왕국에 비유된다. 왕 혹은 여왕 노릇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처절하게 벌이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가는 이치가 흡사한 셈이다. 먹음직스러운 자리는 제한되어 있으니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을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교과서가 되지만 이야기 측면에서 보면 무궁무진한 소재가 된다. 이 영화의 두 축인 버트 랭카스터와 토니 커티스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모관계를 맺는다는 설정부터가 흥미롭다. 평상시같으면 전혀 대면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치는 셈이다. 마치 박 대통령이 최순실과 손을 잡듯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얼핏 보면 이들은 주종, 곧 주인과 하인 관계 같지만 주인은 지시만 하는 동안 실제 하인이 하는 일이 늘아나면 관계가 역전된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문고리 3인방이 박 대통령에게 향하는 통로를 딱 막어서니 이들 세명이 권력이 되는 것과 같다. 헤겔의 주인 노예 변증법 관계가 적용되는 순간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나약하다. 원해부터 선하고 악한 인간이 정해진 게 아니다. 각자 위치에 따라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적절히 행동해 나갈 뿐이다. 따라서 악을 근원적으로 뿌리뽑는건 일종의 진공상태를 만들자는 말과 다름이 없다. 적당히 해먹게 내버러두어야 한다. 물론 상한선을 정해서. 파국을 향해 치닫는 두 주인공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미 무한궤도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마치 박 대통령과 최순실처럼. 그들은 한 때 누렸던 성공의 달콤한 향기에 취한 채 큼큼한 구석방에서 나머지 생을 썩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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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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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평론가의 임무는 책을 끝까지 성실하게 읽고난 후 독자에게 책의 장점과 단점을 글로 알려 책 선택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문제는 모든 평론가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 다른 것을 떠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평론가가 드물다. 두터운 책이면 책일수록 더욱더. 아니라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을 것이다. 다 읽었다구 임마 니가 뭔데? 내 말은 성실하게를 지켰느냐다. 잽싸게 휙 읽고 책의 인상적인 구절 몇 개를 늘어놓은 다음 그 구절에 대한 평가를 하는 식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문학 평론은 이런 식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런 방식이 자신의 지식욕을 과시하기 위한 겉멋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부터는 태도를 싹 바꿨다. 성실하게 읽기가 우선이다.  

 

<롤리타>만큼 문제작이 또 있을까? <차텔레 부인의 사랑> 정도. 그러나 두 작품의 다른 점은 차탈레 부인은 시간이 흐르면서 왜 그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지라고 의아해 했다면 <롤리타>는 여전히 충격적이라는 사실.  주인공은 소아성장애자다. 곧 어린 여자에게 집착하는 아저씨다. 이점은 예나 지금이나 용납하기 어렵다. 실제로도 범죄다. 범죄자가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작가도 이 점을 잘 알고 법정에서 진술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꾸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정작 범죄는 소아성애가 아닌 살인이었다.

 

<롤리타>를 단순한 성도착 소설이 아닌 위대한 작품으로 만는 것 바로 이런 예측불가능한 전개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롤리타 또한 피해여성이 아니라 함께 성을 즐긴 님프였다는. <은교>는 <롤리타>의 오마주임에 틀림없다. 여자중학교 하교시간에 떼를 지어 몰려 나오는 교복차림의 여학생을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 작가가 떠오른다.

 

<은교>가 마지막 자존심을 놓아버리지 못한 반면 <롤리타>는 절대적으로 몰두했다. 여학생 치마밑 쭉 뻗은 다리를 흘낏 거리는 것과 호텔 방에 들어가 수면제를 먹이고 몸을 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작가는 위험한 선택을 했지만 그 결과는 불멸의 작품으로 살아남았다. 그 어떤 도덕적 평가도 이 책 앞에서는 무릎 꿇어라. 그리고 제발 끝까지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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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 2017-04-12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 좀 똑바로 읽어요ㅋㅋㅋ작가가 비웃고 있는게 바로 님 같은 놈들이거든요 와 더러워ㅋㅋㅋㅋ다른건 다 버려도 도덕은 버리지 마세요 제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