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공선옥 지음 / 삼신각 / 1995년 11월
평점 :
품절


2002. 4. 10
공선옥 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1993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삼신각 발행.
96년인가, 한 선배님께 빌려서 읽고는 한 권 사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천리안 애서가동호회 전국모임의 책 경매에 한 회원이
내놓은 것을 샀습니다.

읽은 지 5년이 넘다 보니 사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인상 깊었던
영화나 드라마처럼 충격적인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공선옥의 단편집 ≪피어라 수선화≫를 읽고,
이 여자는 다르다, 그렇지만 도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덕적이란 건 어떤 한계를 느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은,
스스로, 그리고 사회 구조적으로, 또는 운명의 장난으로
그 존재 가치가 비틀려 버린 두 여자 은이와 채옥이
삶을 다시 비틀어 보겠다고 발버둥친 시간이
얼마나 우습게 마감되는지
담담하게,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독자, 저는
운명에 희롱당한 기분이었고,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 절망스러웠지요.

혹시나 이걸 화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그러라고 내버려 두라지.
저는 이 공선옥이란 여자의 깊은 울림을 느꼈다고 믿었어요.

아주 간단하게 문을 닫아 버린 그 마지막 장면으로,
찬물을 확 뒤집어쓰듯, 정신이 번쩍 나는 듯했지요.

앞에서 이야기한 애서동 전국모임 책 경매가 뭐냐면요,
예전에 애서동에서 1년에 한 차례 이상 전국 모임을 할 때
(96년부터 99년까지였던 것 같은데),
꼬마 책 경매, 혹은 책 바자라는 행사를 했지요.

모처럼 오프라인에서 1박씩 하면서 만나는 모임이니
뭔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행사를 하자는 뜻에서,
각자 책을 한두 권씩 가지고 옵니다.
아마 1000원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경매를 해서 책을 판 돈은 전액
북한 동포 돕기 운동에 냈어요.

2000년부터는 전국 모임을 열지 못했지요.
음...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이 책이 1995년 11월에 나왔다고 뜨네요.
93년 초판 이후 판을 한 번 바꾸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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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개정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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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98. 11. 8

우리 시대의 문화 : 호모심볼리쿰 18
<게으를 수 있는 권리 Le droit a la paresse>
                              - -> 위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삐침 있음
폴 라파르그(Poul Lafarge)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1997)



그냥 폴 라파르그라고 하면 누군데?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사
람도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라고 하면 마치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일 것이다. 그 폴 라파르그가 1880년 [평등 L'Egalit]이란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에 이 글을 썼고, 이 글은 1883년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소책자로 출판됐다.

새물결 출판사에서는 미국어판을 그대로 번역한 듯 영어판 서문을 앞
에 싣고 뒤에는 프레드 톰슨이란 사람이 쓴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 전기적 에세이"를 묶어 182쪽짜리 책으로 만들었다("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글 자체의 길이는 80쪽 정도다). 그리고 영 팔리지 않을 것
같았는지 보통 단행본보다 두꺼운 종이에 인쇄하고 양장본으로 만들
어 7500원이란 값을 떡 매겨 버렸다.

못마땅한 일이지만 몇 년 전 한겨레신문에서 이 책에 관한 글을 읽고
언제 우리 말 번역판이 나오나 고대하던 나 같은 소수 독자나 사 줄
책인 모양이니 별수 있으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글 자체는 논쟁적인 정치 팜플렛인지라 학술
논리로 글을 이끌기보다는 일 중독증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기를 인정사
정 없이 공격하는 말투로 시종일관한다. 그러니 가끔 고대 노예제 사
회의 시민을 찬양한다든가 이성애 남성 중심적인 표현을 쓰는 건 너그
럽게 건너뛸 필요가 있다.(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다. ^^;)

사실 노동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이다. 지나친 노동은
인간의 몸을 약하게, 또는 다치게 하고 자연 환경을 파괴하며 인간의
정신을 일정한 틀에 얽어매 버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기보다 일 그 자체에 종속되어 버린 듯하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삶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일하지 않으면 바로 죽어 버릴 듯이 일 그 자체에 매
달렸다. 몇 년 전에 한창 유행한 "프로는 아름답다"는 글귀를 보라.

폴 라파르그는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일하라고 말하는지 폭로한다.
"기독교적인 순종을 내세운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인 타운센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일하라, 일하라, 밤낮으로 일하라. 일하면 더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법의 힘으로 일을 강요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
주리라.' 법의 힘을 빌린 노동의 강요는 '너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너무 많은 폭력을 요구하고, 너무 많은 소음을 만들어 낸다. 이와 반
대로 굶주림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끊임없는 압력일 뿐만 아니라, 일과
산업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이고, 또한 가장 강력한 노력을 불러일으
키기도 한다."(59-60쪽)

곧 "장사를 선교하려는 자들the missionaries of trade과 종교를 팔아
먹으려는 자들the traders of religion이 기독교 신앙과 매독 그리고
노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등, 온갖 것으로도 아직 타락시키지 못한
고결한 미개인을 보라. 그리고 나서 비참하게 기계의 노예가 되어 버
린 현대인을 보라."(45쪽)

현대의 과잉 노동에 따른 과잉 생산은 산업의 위기를 부르고, 생산물
을 다 팔 수 없는 기업은 일자리를 줄이고, 따라서 돈을 벌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배고파서 오직 일자리 찾기에만 매달리게 되고("우리에
게 일자리를 달라" "우리는 일할 권리가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아닌가), 그나마 직장에서 떨려 나지 않은 사람들은 짤리지 않
기 위해 더욱 일에 파묻힌다. 더 낮은 임금과 더 많은 노동 시간을
감수하고.

"낮이 끝나면 반드시 밤이 오듯이 지나친 노동 뒤에는 공황이 오는 것
을 피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집단 해고와 가난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산업 또한 어쩔 수 없이 파산하게 될 것이다."(62쪽)

하지만 그러기 전에 "제조업자들은 쌓이고 있는 상품들의 시장을 찾아
전 세계를 헤집고 다닌다. 그들은 면화 제품의 배출구(시장)를 찾기
위해 콩고를 병합하고, 통퀸을 점령하고, 대포로 만리장성을 공격하라
고 정부를 몰아붙인다. ... 상품 뿐만 아니라 자본에도 잉여분이 있다.
자본가들은 더 이상 그것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면
이들은 담배를 피우며 태양 아래서 한가하게 빈둥대고 있는 행복한
나라를 찾아내 기차 선로를 놓고 공장을 세워 그 저주받을 노동을 수
입한다."(64쪽) 그리고 그러한 산업 식민지에서 이 모든 과정이 되풀
이된다.(우리 나라 기업들이 외국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근면'만을
강요하며 노조를 탄압하는 추태가 생각난다.)

인간의 기술력과 기계가 이 노동의 족쇄를 풀어 줄까? 그러나 "노동에
대한 맹목적이고 완강하며 가히 살인적인 열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
줄 기계를 자유로운 인간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기계로 변질시켜 버렸
다. 이리하여 기계가 많이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만큼 인간은 궁핍해
지게 되었다."(67쪽) 왜냐하면 기계가 일을 대신해 주는 만큼 노동자
들이 노동 시간을 줄이고 휴일을 더 많이 가지게 되기는커녕, 자본가
들은 기계 수를 늘리는 대신 노동자 수를 줄이고, 남은 노동자들은 기
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노동 강도를 더욱 높이고 기계를
돌릴 수 있는 시간만큼 노동 시간을 늘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람
들은 말한다. "신성한 노동,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일이 가장 즐
거운 나는 아름다운 프로!"

노동이 신성시되는 반면 소비는 죄악시된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재
화와 용역은 누군가 소비해야만 돈이 되는데, 노동자들은 그것들의 소
비 현장에 들어갈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 "분수에 어긋나는 소비는
경제의 적!" 분수에 어긋나는 소비라. 그놈의 분수란 누가 정해 놓은
기준이란 말인가?

그런데 "과잉 생산으로 죽어 가고 금욕주의 때문에 메말라 가는 노동
자의 이중적 광기에 직면하게 된 자본주의 생산의 커다란 문제는, 더
이상 생산자를 찾거나 생산력을 배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발
견하고 이들의 식욕을 자극해 허구적인 수요를 창출하는 데 있다."(7
7쪽) 그래서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았다는 말이 자랑이 된다.

그래서 라파르그는 주장한다.
"왜 1년 동안 할 일을 반년 만에 해치우나?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
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
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뺏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81쪽) - 이게 바로 IMF 시대 우리
나라가 부닥친 문제의 해답 아닐까?

라파르그는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고 노동 시간을 줄이면 자본가들
이 기를 쓰고 기계의 생산성을 높일 테니 결국 인간은 더욱 풍요롭게
살 수 있으리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노동 시간을 줄여
생산 과잉을 해소하면 원자재도 적게 소모될 테고, 따라서 환경도 그
파괴 속도를 늦출 테고, 사람들이 환경 보호에 투자하는 시간도 늘어
날 테고, 자연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심신을 맑게 할 여유도 늘어나
리라고. 생산이 줄어들면...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면 될 일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중에 다음과 같이 게으름을 설교했다. '저 꽃들이 어
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는 못하였다'(공동번역성서 루가 12:27 - 역자).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면 화를 내곤 했던 여호와는
숭배자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최고의 본보기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그는 딱 6일만 일하고 영원히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48쪽)

그러면 인간은 왜 게을러야 하나? 라파르그는 글 끄트머리에 이렇게
게으름을 칭송한다.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95쪽)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
는 게으름은 이기적인 소유욕의 반대말이며 부지런히 돈만 좇게 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적이다.

폴 라파르그가 하루 노동 시간 12시간인 시대에 이 글을 썼다면, 프레
드 톰슨은 하루 노동 시간 8시간인 시대(1989년쯤)에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 전기적 에세이"를 썼다. 노동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리
고 노동자들이 소비와 여가에 신경쓸 수도 있게 되었지만, 진정 게으
를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지는 않았다. '여가'가 산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동화 인간Homo automobilis'은 지출 경비, 산업 재해 그리고 환경
파괴 면에서 '도덕적으로 볼 때 전쟁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을 자행
하고 있다. 열악한 보수를 받는 날품팔이꾼인 우리로서는 '계약금도
없이 외상으로 우리의 족쇄가 될 자동 레저 기구를 사들여서', 돈을
갚기 위해 야근이나 부업을 하고 그래서 줄어든 여가를 더욱 더 광란
적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 가며 소비하게 된다."(155쪽)

곧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그만큼 이에 상응하여 여가 시간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자동 기계와 그 연관 산업이 기술적-경
제적-문화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 산업은 해롭다고 여겨지
는 분야에까지 서비스 산업을 확장해 이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들
었다. 건설업과 부동산업 그리고 정부 정책에 따라 우리는 한 장소에
서 일하고 수 마일 떨어진 다른 곳에서 수면을 취하고 또 다시 다른
곳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즐긴다.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은 이런 결
과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술수를 부리지만, 실제로 이런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간과 재화를 모두 빨아먹는다. 우리의 문화
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착취할 고용주를 찾아다니고, 우리를 지배
할 정치가를 선출하여 이들이 마음대로 조직하는 삶의 양식을 자유라
고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든다."(158쪽)

그래서 프레드 톰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들이 동료와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160쪽)

좋은 말이다. 찬성한다. 하지만 프레드 톰슨 역시, 무작정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게으르게 보내는 시간에 뭔가를 채워 넣으려는 강박 관념
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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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이거 제가 쓸려고 와봤더니 숨은 아이님이 이미 너무 잘 써주셨네요. 저도 이거 처음 나왔을 때 샀는데...추천 제가 했어요. 흐흐.

숨은아이 2005-03-2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오래 전에 쓴 것인데, 너무 잘 쓰기는요. 쓸데없이 길기만 하구만요. --a 바람구두님 리뷰 써주세요! 보고 싶어요! ^^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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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4. 1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지음, 송은경 옮김.
오래 전에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새물결)를 읽고 천리안의 애서동에
글을 쓰면서, 다음에 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고 글을 올리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인지 몰라. ^^;

그 뒤에 이 책을 읽긴 읽었는데,
요 3년간 정말 사생활이 거의 없이 살았거든요.
그러다 올해 들어 내 시간은 내가 챙겨야 한다고 생각,
감히 다시 글을 올리기 시작했죠.

'게으름'이란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잇따라 산 걸 보면
그 무렵 '근면'이란 가치관에 회의를 품게 되었나 봅니다.
전에는 일이 재미없을 때 뭔가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죠.
내 마음에 드는 책, 나를 자극하는 책을 만드는 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별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라도,
엉망진창인 원고 상태를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는 먹게끔 뜯어고쳐 말끔히 수리해냈을 때,
정복의 쾌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일은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날것과 같은 재료를 가지고 책을 만드는 재창조 과정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사생활도 없이 한 1년을 그 '재미있는 일'에
모조리 바치고 나니, 여유 시간이 나자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바쁜 일 사이의 짬,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도 많이 있습니다.
전시회나 공연, 그리고 그 동안 자주 못 만난 사람들...
나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을 들여다보고...
일말고도 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야근에 저녁 시간을 온통 바쳐야 할 시기가 옵니다.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일에 묶여 있을 때는
이 일만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나면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다가
다시 일의 족쇄에 팔다리가 묶여서야 안도감이 든단 말입니다.

노예, 일의 노예.

한 3년 전부터 계속 되풀이되는 일입니다.
이제는 좀 여유를 찾았지만,
그래도 여전한 것은 일을 많이 할수록
할 일이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프랑스의 공산주의자인 폴 라파르그가
노동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일 자체는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 팜플렛입니다.

19세기 말에 그는 이미 6시간 노동제를 주창하면서,
열 사람이 하루에 열두 시간 걸려서 할 일을
스무 사람이 하루에 여섯 시간씩 하면,
스무 사람이 모두 먹고 살 수 있고, 또 스무 사람이 모두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현대의 신자유주의 시장에서는 스무 사람이 하루에 여섯 시간씩
일하는 데가 있었다 해도, 열 명은 자르고 나머지 열 명에게
그 일을 다 하라고 강요하죠.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면 남은 열 명은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하면서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을
빼앗깁니다. 쫓겨난 열 명은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은 있지만 생존을 위협받죠.
먹고 살 수단이 없는 마당에 문화를 어떻게 향유한단
말입니까.

열 사람의 근면, 그 반대편에는 열 사람의 빈곤이 있는 겁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였던
영국의 철학자 러셀(1872-1970)의 정치 칼럼
혹은 문명 비평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1935년에
영국에서 책으로 묶여 나왔고, 제가 읽은 책은 사회평론에서
1997년에 초판이 나오고 1998년에 3쇄를 찍었습니다.

재미있는 글이 많지만, 표제작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주장은
폴 라파르그의 이야기와 상통합니다. 근면이란 노예의 도덕이며,
노동은 인간 생활의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란 이야기이죠.

그들이 19세기 말에, 그리고 1930년대에 이미 한 이야기를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야 되새긴다니.
하긴, 그들이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어도
자본주의의 바퀴는 미쳐서 돌아갔지요.

이제는 사이버자본주의의 시대, 그러나
기계가 발전할수록 인간이 더 편해지는 게 아니라,
노동 시간이 더 늘고 노동 강도가 더 세어지는 건
어딜 봐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세 사람이 나누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사흘 걸려 할 일을,기계가 좋아지니
한 사람이 열두 시간에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 두 사람은 잘리지요.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하루에 열두 시간 일해 일을 다 해냅니다.
나머지 이틀은 쉬냐구요? 아니지요.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으니
일거리가 계속 늘어납니다.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이라는 글에서 러셀은
실용주의적인 지식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비판하지요.
실용주의적인 지식이란 바로 생산, 곧 돈벌이에 직결되는 지식일
테지요. 러셀은 '무용한 지식'이 얼마나 유익한지 말해줍니다.

<인간 대 곤충>, <혜성의 비밀>의 통찰력과 유머를 비롯해,
이 책에 실린 나머지 그리 길지 않은 글에서
신선한 충격을 맛보는 기분은 꽤 좋습니다.
뭐 물론, 그가 서구 문명에 속한 사람이라는 한계는
은연중 드러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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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여우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50
한성옥 그림, 팀 마이어스 글, 김서정 옮김 / 보림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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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3. 20

그림책 <시인과 여우>, 보림


원제는 Basho and the Fox.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일본 에도시대의
유명한 하이쿠 시인이랍니다. 이름을 우리 한자 발음으로
읽으면 '파초'네요. 시인의 이름답죠?

하이쿠는 5·7·5음절(다 합쳐 봐야 17음절)로 이루어지는 짧은 시,
재작년엔가 류시화 시인이 일본의 전통 시인 하이쿠를 모아 번역해
<한 줄도 너무 길다>는 책을 낸 적이 있죠.

<시인과 여우>는 팀 마이어스(Tim Myers)라는 미국인 작가가
이 바쇼라는 시인을 소재로 꾸며낸 이야기에
한성옥이라는 한국인 삽화가가 그림을 그려,
미국에서 여러 상을 탔다고 하는 그림책입니다.
2000년에 미국의 Marshall Cavendish Corporation이란 곳에서
영어로 출판했습니다. 우리말로는 김서정 옮김, 2001년 보림 발행.

하이쿠 같은 짧은 이야기에(모두 32쪽),
숲을 에두르는 강줄기를 흰색으로 표현하고
빛과 볕과 그림자로 계절과 시간을 표현하는 그림이 좋습니다.

이 책에는 하이쿠가 세 편 나오는데,
하이쿠 한 편이 책의 한 면 전체를 차지합니다.
하이쿠는 단 세 줄로 인쇄되지만, 한 면 전체를 채운 그림이
그 세 줄에 집중하는 방식이 재미있어요.

바쇼는 "위대한 조상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려고 하지 마라.
그들이 추구하던 것을 찾아라"는 말을 남겼다는군요.
이 책의 첫머리엔 바쇼가 "자기 먹을 것을 먹고, 자기 잘 만큼 자고,
자기 사는 대로 살면서, 자기 시를 썼"다고 나옵니다.
아, 부러워라.

* <한 줄도 너무 길다>는 2000년 3월에 이레에서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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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않은 녀석들을 위한 동화 - 북아뜨리에 13
쟈끄 프레베르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87년 6월
평점 :
절판


2002. 3. 16

 

[착하지 않은 녀석들을 위한 동화]


요즘은 서점에서 나갈 시간이 별로 없어 인터넷 서점에서
보내오는 안내 메일을 보고 이 책 저 책 찜해 놨다가
한꺼번에 주문할 때가 많습니다.
책을 넘겨다보고 사지 않으니 그림책 같은 경우는 속아서 사는
일도 생기지요. ^^; 뭐, 나쁜 책을 잘못 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책이 오더라는 말씀입니다.

책을 직접 살펴보고 살 수 있다는 점말고도 오프라인 서점의 장점은
또 하나 있지요. 그 전에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충동구매할 수 있다는 것.

이 책, [착하지 않은 녀석들을 위한 동화]도 98년 여름,
서점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걸 제목에 끌려 꺼내 보고는
사버린 책입니다.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ert) 지음, 박혜영 옮김.

고려원에서 1987년에 나온 책입니다. 108쪽짜리로,
3000원이군요.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아직도
살 수 있습니다.

원제는 Contes pour enfants pas sages. 1977년에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번역했다는군요.
이 책에는 짤막한 이야기 여덟 편이 실려 있는데,
착하지 않은 녀석들을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예쁘고 선하고 부지런한' '인간'이 언제나 승리한다는
동화를 지어내는 위선적인 백인 어른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타조>는 페로의 동화 <엄지소년>을 뒤틀어버린 이야기인데,
[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같이 기존 동화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전복해 보고자 했다기보다는
짓궂은 장난꾸러기처럼 타조 같은 엉뚱한 동물을 등장케 해
갑자기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어갑니다.

프랑스 사람 페로의 동화는 그림 동화와 같이
우리 같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도 점령했더랬지요.
<엄지소년>은 바로 부모가 너무나 가난해 아들 일곱 명을
숲 속에 버리자, 막내인 엄지소년이 기지를 발휘해 집을 찾아가고,
또 사람을 먹는 '오그르'란 인종을 골탕먹이는 이야기이지요.
(이 책 뒤편에는 친절하게도 페로의 <엄지소년>이 같이 실려 있습니다.)

17세기에 민담을 정리한 페로의 동화는
19세기에 독일 사람 그림 형제가 정리한 동화보다
더 끔찍한 것 같아요. 아마 원래의 민담은 그보다 더 끔찍했겠지요.
페로도 역시 민담을 나름대로 점잖게 각색한 것이지만,
후대에 훨씬 더 점잖고 우아하게 각색한 그림 동화보다 페로의 동화가
더 원형에 가까울 것입니다. 페로와 그림의 동화는 20세기 들어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그 원형인 민담은
상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당시 아이들의 생활 환경을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는지도 모른다고,
문학과지성사의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책에 보면 나옵니다.

부모는 굶어죽을 지경이 되면 자식을 버립니다.
그리고 양고기, 송아지고기, 돼지고기가 충분히 있는데도
사람의 아이를 잡아먹겠다는 '오그르'는 어떤 사람들을 말할까요?

[착하지 않은 녀석들을 위한 동화]의 다른 이야기들은
첫 번째 이야기와 같은 패러디 동화가 아닙니다.
영양, 낙타, 바다코끼리, 기린, 말, 사자, 당나귀가 주인공인데,
<우리 속의 어린 사자> 이야기와 같이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사자의 관점으로 우리 밖의 인간들을 구경하지요.
자유와 조롱. 그것이 이 책의 정신입니다.

자크 프레베르는 1900년에 태어나 1977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당나귀'라는 말을 '멍청이'에게 욕할 때 쓰는 모양인데,
당나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그런 욕을 할 권리는
없다는 거, 지금부터 30년도 더 전에 이 사람은 알았군요.

***

오늘 검색해 보았더니 이제는 이 책을 서점에서 살 수 없군요.
헌책방에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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