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루시의 우리 무당 이야기
황루시 / 풀빛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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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4. 3. 11

황루시 지음, <황루시의 우리 무당 이야기>, 풀빛
2000년 9월 초판 1쇄 발행

표지에 “무속 문화 이해의 길잡이”라는 말이 부제처럼 붙어 있습니다.

저는 무속, 무당, 굿 같은 것하고는 영 상관없이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서 굿을 한 번쯤 벌였을 법도 한데,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시골에서 자랐다면 서낭당이나 정월의 마을굿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나고 자란 수원은 (지금의 수원이나 당시의 서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도시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도시였거든요.
어쩌면 나름대로 새마을운동의 기수(?)였던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일례를 들면 고스톱이 있습니다.
또래 친구들을 보면 보통 고스톱을 집에서 어른들 노는 것을 보고 배웠던데,
전 화투라면 할머니가 아버지 몰래 재수떼기 하는 것 정도밖에 본 게 없어
지금도 고스톱을 칠 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질색하셨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어린 시절
무속은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청소년기에 교회를 다녔으니
(보수 기독교계의 배타성을 아시지요?),
무당이나 굿은 절대 가까이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여겼지요.

하지만 2001년 12월 24일(크리스마스이브로군요),
약속 시간을 기다리느라 들어간 서점에서 이 책을 사 들고 나온 것은,
나이 들면서 막연히 키운 궁금증 때문일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세상을, 우주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을지,
신과 소통한다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는 과연 어떠할지...
일제 통치와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뒤죽박죽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으려면
무속은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연의 힘을 두려워하고
자연 만물의 신성을 믿는 심성이 (일본뿐 아니라)
우리 문화에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한국신화 탐사”라는 강좌를 듣기 시작한 올 1월에나
책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이 책을 찾아 책장을 넘겼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옛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우주를, 자신이란 존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어떻게 세계관과 가치관을 구축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비밀을 암시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나라의 신화에 관한 책을 슬금슬금 모으고 있는데,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워낙 게을러 무슨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책을 읽는다니까요.
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신화는 대부분
굿에서 무당이 부르는 무가로 전승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무가에 신화가 나오느냐면,
굿은 여러 신을 모시고 제물을 바치며
여기 모인 사람들을 굽어 살피소서 비는 자리인데
(혹은 슬픈 넋을 무사히 저승으로 데려가서
편안히 쉬게 하소서 하고 비는 자리인데),
신을 모시는 과정에서 그 신의 내력을 죽 읊습니다.
그래서 무당은 이 땅과 하늘, 사람이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창세신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제석본풀이 - 당금애기 등),
저승으로 넋을 데려가시는 신이 어떤 신인지(바리공주 등),
우리 마을을 지키는 신(서낭님), 우리 집을 지키는 신(성주신)의 내력 등등,
굿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신화를 구연합니다.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면 그 신의 내력을 다 읊을 필요가 없을 텐데,
역시 굿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굿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지금 모시는 신은 이러이러한 신이니
믿고 맡겨라 하는 뜻에서 무가를 부르는 셈이니까요.

요즘에는 여러 가지 신화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나옵니다만, 우리 자랄 적에는 한국에 신화가
단군 신화, 박혁거세, 김알지 이야기 정도밖에 없는 줄 알았지요.
교과서에 있는 건국 신화가 신화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겁니다.
우리 이전 세대는 굿판 구경을 하면서,
또 할머니 무릎에서 신화를 들을 수 있었고,
우리 이후 세대는 그림책, 동화책으로 다 읽을 수 있는데,
억울하게도 우리 세대는 이것도 저것도 얻지 못한 거예요.

무속을 공부하며 관동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활동하는
이 책의 지은이 황루시(이름이 한자로 縷詩랍니다. 시적이죠?) 선생은
처음에 탈놀음과 같은 우리나라 전통극을 공부하다가
진오기굿(진혼굿이라고 할 수 있다)을 한 번 보고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연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굿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굿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제 의견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강의 중에 들은 바로는 외국의 인류학자가 와서
처음 굿을 볼 때도(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굿을 보면 그 연극적인 짜임새 때문에 맥락을 다 이해한다고 합니다.
신화를 구연하면서 무당은 그 신화의 화자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요
(판소리를 1인 오페라라고 하는 것과 같겠지요),
굿판에서 장고나 제금을 치며 추임새도 넣고 하는 남자
(이들을 ‘양중’이라 한답니다)는 경우에 따라 1인 촌극도 벌인답니다.

황루시 선생은 70년대 중반부터 굿판을 찾아다니고 무당들과 사귀면서,
무속의 문화적, 민속적 의미 외에 무당들 개인의 인생과 고통까지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1. 도봉산 호랑이’에서 대학 시절 도봉산에서 만났던
맑고 착한 아주머니 이야기로 서두를 떼고,

‘2. 내가 만난 무당들’ 편에서는 현존하는 동해안 지방, 제주도,
서울 지역, 평안도 만신(우리나라 무속은 서울 경기 지역과
동해안 지역, 이북, 서해안 지역, 제주도로 그 권역을 나누어
볼 수 있다 합니다. 지역권에 따라 전승되는 무가의 내용과
굿의 형식이 다르다구요. 물론 무당 개개인에 따라서도
조금씩 다르구요)과 그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적고는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무당이란 존재의
사회적 의미와 그 실상을 이야기합니다.

‘3. 굿의 현장’ 편에서는 죽음을 이해하는 넋굿(죽은 이의 한을
위로하고 편안히 저승으로 보내기 위한 굿),
소외된 자의 잔치 조상굿(평소 제사 때 소외되는, 제주는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의 넋까지 강림해 한을 풀고 간다고 합니다.
아들 없이 돌아간 작은할아버지, 객지에서 병사했다는 외가 쪽 오촌아저씨,
혼인 전에 죽은 작은집 딸, 전쟁 중 헤어져
생사도 모른 채 잊고 지낸 큰집 조카 등등),
공동체를 다지는 마을굿(가장 대규모로 잘 전승되는 것이
4-5월의 강릉 단오제라 합니다. 요즘에도 영동 지방을 아우르는
대규모 축제로 이루어진다구요)의 현장을 묘사하고,
그 의미를 짚습니다.

마지막으로 ‘4. 무속의 리얼리즘’에서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일상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공존했던 무속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흔한 시선 - 왜곡되고 편향된 - 을 지적하고,
무속의 실제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 신과 함께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써 주변 사람들을 널리 배불리 먹이는
자리, 죽은 이나 산 이나 할 이야기 다 하고 울음으로써 한을 푸는 자리가
바로 굿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굿이 어떤 것이다 하고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굿을 한번 봐야겠습니다.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별스런 존재로 여겼던 ‘무당’을 조금 친근하게 느끼게 되었다는 겁니다.
찌르면 아프고, 욕하면 상처받으며,
‘사제자’라는 힘겨운 운명의 굴레를 힘들여 지고 가는 이들.
흔히 무당이나 점바치를 비웃을 때
“남의 일은 다 안다 하면서 제 죽을 날은 모른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무당이란 존재가 원래, 남의 아픔은 건져 올리면서
자기 아픔은 돌보지 못하는 존재랍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허락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당네 집에 굿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하지 않고,
다른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원해서 무당이 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세습무당은 보고 자란 문화 때문인지
굿판에서 산 부모의 한 때문인지 정말 그것밖에는 할 수 없어서,
신이 내린 무당은 버티고 버텨봤지만
신을 거부할수록 불행만 닥쳐오고 가족이 죽어나가서.
그래서 무당들은 다른 사람을 욕할 때
“니네 집안에 무당이나 나라” 한답니다.
아프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손진태 선생이란 분이 1930년에 조사한 김쌍돌이본 창세 무가에서도
신이 저주하는 장면에서
"가문마다 기생 나고,
가문마다 과부 나고,
가문마다 무당 나고,
가문마다 역적 나고,
...
삼천 중에 일천 거사 나너니라" 합니다.

'거사'는 스님을 이야기하는데,
무당이든 스님이든 사제자를 불행한 운명으로 인식했던가 봐요.

무가나 굿에서 쓰는 말을 보면 모르는 말이 많습니다.
제 어휘력도 부족하고,생활이 민속 문화에서 멀어지고,
또 전래 입말보다 문어체 번역어투가 익숙해져버린 탓도 있지요.
요즘엔 학교에서 사투리도 따로 배운다던데,
아~ 우리 세대는 정말 못 배운 게 많습니다...


****

엊그제 케이블TV에서 작년에 발표된 다큐멘터리 영화
<영매-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를 보았습니다.
이 책을 영화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 속 굿판에서 죽은 이와 산 가족이 만날 땐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 200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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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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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5. 14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범우사


아웃사이더, 주변인, 뭐 이런 말은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윤리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아웃사이더The Outsider>(1956)란 이 책, 콜린 윌슨Colin Wilson이란
영국 아저씨(1931년생이라는데, 아직 살아서 활동하는 모양입니다)가
쓴 이 책을 전 처음에 소설인 줄 알았어요.
프랜시스 코폴라라는 미국 영화감독이 만든 <아웃사이더The Outsiders>(1983)란
영화의 원작 소설인 줄 알았다니까요.

코폴라 감독의 영화를 다 해진 비디오(정말 해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
였지요. 등장하는 배우들 얼굴도 제대로 구별이 안 됐어요)로 본 것도
이 책을 읽은 1998년이었는데,
그 영화가 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알고 있었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어릴 적에 이쁜 얼굴로 날렸던 배우들이
모두 그 영화로 뜨기 시작했다고 들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잡지를 보면 맷 딜런이니 로브 로, 랠프 마치오,
톰 크루즈 , 다이안 레인 등등이 나올 때마다
저 영화 제목이 꼭 등장했답니다.

음, 그런데 이 책은... 독특하더군요.
비평서라고 해야 할까,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읽고
그것을 비평하는 형태이니 우선 평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지은이가 후기에 적었듯이 '신실존주의'라는 철학을 창안한
철학 책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싶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웃사이더'는 주류에 끼지 못하는 주변인이
아니라, 다수 대중에게서 스스로를 구별하는 철인(哲人)입니다.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응시하는 사람.
그러나 응시하다가 저 혼자 신이 되는 사람이랄까.

불교의 수행법도 결국 스스로를 응시하다가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본래의 자신,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의 일부, 생명의 하나로 보는 겸손한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인간' '거인'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니체의 철학을 모르지만,
왠지 이것이 극단으로 나아가면 절대 권력자를 숭앙하는
파시즘으로 가리라는... 나치즘의 백색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구절 한 구절 뜯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진작 이 책을 알지 못했을까...
읽으면서 안타까워했어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것.
그리고 콜린 윌슨이라는 사람, 겨우 25세에 이런 책을 썼단 말이지,
하고... 놀랐지요.

이 책을 읽고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영화의 실존 주인공,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란 사람도 알았습니다.
대한극장이 지금처럼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직전에
70mm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영했을 때 가서 봤는데,
이 책을 읽은 뒤라서 느낌이 달랐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범우사에서 1974년에 초판이 나오고,
1994년 2판 7쇄를 찍은 범우사상신서 19권 <아웃사이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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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04. 4. 21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 045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박규태 지음, 2001년 8월 초판 1쇄 발행

 

책세상 출판사에서 2000년 봄에 펴내기 시작한
우리시대 문고는 우리 출판계의 새로운 실험이란 점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1980년대 이후 문고판이 독자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것도 다 소설이었지요.
소설이 아니라 해도 대개 고전을 번역해놓은 것이었어요.

그런데 책세상문고의 우리시대 시리즈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소장 인문학자들이
새로이 쓰는 인문교양 문고라는 점에서,
한국 출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 1권 <한국의 정체성>이란 책을 읽고,
생각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좀 낯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정체성이란 게 대체 뭔가 하는 궁금증으로 이 책을 사 보았는데,

책의 내용은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이다, 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정체성은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정체성이란 게 뭔가 하는 것이더군요.
독자에게 "이런 이런 과정과 방식으로 생각해라" 하는
사유의 교본이랄까요.

이른바 "한국적"이라고 하면
흔히 현대의 우리 모습이 아니라 왠지 옛것, 전통 문화만을 떠올렸는데,
그게 아니다, 한국의 정체는 현대를 살아가는,
뭔가 뒤죽박죽인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다,
하고 생각하게 된 게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인 듯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시대 시리즈 45권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을
산 건 아마 신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를
제가 아주 좋아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어찌 일본인의 마음을 다 알겠습니까.
다만 일본 사람들은, 일본 문화는 예로부터 "몸"을 중시했다고 합니다.
전에 <세계의 유사 신화>란 책에서 일본의 창세 신화를 읽었을 때도
이렇게 에로틱한 신화는 더 없을 거야... 생각했더랬지요.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에는 그 에로틱한 창세 신화
(일본 땅이 생겨난 내력을 이야기하는 신화)가 좀더 자세히 나옵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신이 관계해서 일본 땅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지요.
일본의 성(性)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니 문란하니 말이 많은데,
어찌 보면 인간, 자기 자신의 몸을
자연 그대로 긍정하는 데서 나온 문화는 아닌지...
우리는 유교 전통 속에서 몸을 꽁꽁 숨기고 가리고,
억압했다고도 할 수 있잖아요.


인간의 몸을 중시했다는 건 현실 긍정으로도 이어지나요.
일본의 종교는, 심지어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세계적 종교도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현실, 현세, 실존하는 세계를 긍정하는 경향이랄까요.
우리나라의 종교들이, 결국 현세의 복을 구하면서도
이승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궁극적 목표를 극락왕생, 죽은 뒤 천국 가는 데 두는 것과는 대조됩니다.

일본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와 일본의 전통 문학, 사상 등등은 모두
사물과 자연의 정조를 느끼는 것을 가장 높은 덕으로 친다고 합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른바 "사물의 마음을 헤아려 아는 것",
그걸 "모노노아하레(物哀)"라고 한다는데,
문득 한국의 민간 신앙, 샤머니즘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을 부를 때 호토케(佛 : ほとけ)라 한대요.
우리가 돌아가신 분을 가리켜 "고인"이라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 말이 "부처님"이란 뜻이라니,
모든 사람이 곧 부처라는, 현세의 모순투성이 인간 하나하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심성이 여기서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고 이 책의 지은이께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또 매년 7월 13일(지역에 따라서는 8월 13일이나 음력 7월 13일)은
오봉(お盆)날이라 하여 우리의 추석 때처럼 국민적 대이동이 일어나는데,
오봉날은 원래 우란분(盂蘭盆), 곧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며
예불을 올리는 불교의 명절에서 왔다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날 타계(주로 산)에 있던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을
찾아온다 하여, 이날 집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간다고 합니다.
모든 현세의 존재를 신성시하기에
죽은 우리 자신들(조상이나 죽은 원혼)에 대해서도 삼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현세와 존재 자체를 긍정하다 보니 선악의 엄격한 구별도 모호해,
18세기에 일본 국학을 완성했다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모노노아하레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선악의 중요한 관건"으로
본다는군요. 선악의 기준이 윤리적이라기보단 미학적인 셈이지요.

그런가 하면 외부에서 전래된 신앙이고 사상이고 간에
온갖 것이 별 비판 없이 받아들여져,
전통적인 것과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변증법적인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냥 "정신적인 잡거성"(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을 이룬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 책의 본문을 조금 옮겨보겠습니다.

"일본인은 어떤 새로운 것(타자, 다시 말해 불교)을 수용할 때,
그것을 끊임없이 이전의 것(자기, 다시 말해 신도)과 동화시키고 현재화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형성된 '현재'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냥 계속 첨가되어 축적된다. ...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처럼 자기와 다른 타자를 일단 무한정 포용하여
그것을 자기 안에 평화 공존시키는 일본인의 사상적 관용성을
'정신적 잡거성'이라고 비판했다."(49쪽)

그렇다고 해도 역시 한 나라 사람들, 한 민족의 마음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에 유학해 불도를 닦고 와서
아주 독특한 종파를 창시한 중세 일본불교의 창시자들은,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절망 끝에 나온 결론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모노노케 히메>에서 나오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입니다.
고백하건대 유물론자였던 제가 모자라나마
자연과 세상 만물에 대해 삼가는 마음 자세를 가다듬게 된 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들 덕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노노케 히메>는 최대, 최고 걸작이지요.

책제목에 나오는 아마테라스는 태양신인데,
지금은 보통 여신으로 보지만 고대에는 남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듯... 고대 일본 신도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신이랍니다.

책 끄트머리에 "더 읽어야 할 자료들"이라 해서
일본의 신화나 종교,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책만 있는 게 아니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1990)도 있습니다.
묘하게도, 지금(4월 16일부터 25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을 합니다.
어제 <7인의 사무라이>를 보고 왔는데,
사실 요즘 시간도 여의치 않아
그냥 오랫동안 벼르던 <7인의 사무라이>만 보고 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이 책을 다 읽으며 "더 읽어야 할 자료들"에
이 책의 지은이가

"거장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로는 <라쇼몬>(1950)이라든가
<칠인의 사무라이>(1954)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내게는 <살아가기>(1952)라든가 <붉은 수염>(1965)을 보면서
밤새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꿈>은 여덟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인데,
그 중 제1화 <여우비>, 제2화 <복숭아밭>, 제5화 <까마귀>,
제8화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쓴 부분을
본 것입니다.

<살아가기>는 <이키루生きる>인 것 같고,
<이키루>와 <붉은 수염>, <꿈>까지 다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합니다.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보러 가야겠습니다.
이 책을 산 건 2001년 9월이고,
올 3월 초부터 계속 읽으려고 갖고 다니다가,
하필이면 지금에야 다 읽었습니다.
진작에 읽었으면 지은이가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했던 것도 다 까먹었을 텐데.
무슨 인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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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작품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진웅기.김진욱 옮김 / 범우사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2002. 5. 3
≪아쿠타가와 대표 단편선≫, 인덕, 1999


요즘에는 소설이라는 분야 자체가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 못하지만,
얼마 전까지 일본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이라는 말이 앞에 붙으면
그 소설은 꽤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양지라든가 유미리 같은,
재일한국인 작가가 이 상을 타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우리 나라의 이상문학상 정도 된다고 할까...

그러나 이상문학상은 기존에 활동했던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아쿠타가와 상은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는군요.
1935년에 처음 시상하기 시작했다니 유서 깊네요.

하지만 제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작품이
도대체 어떻길래? 하는 생각이 든 건 아쿠타가와 상이란 것
때문은 아닙니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의 영화 <라쇼몬羅生門>(1950)을
보고 나서였지요. 영화를 보니까 원작이 궁금해져서요.

그런데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경우, 제가 소설을 먼저 읽었다면
대개 영화에 실망하게 되더군요. 자기가 읽으면서 상상했던 것만큼
영화가 구현하지 못했다는 불만족감(<작은 아씨들>이 그랬어요),
소설과 영화가 너무 똑같이 굳이 영화를 따로 보는 의미를
찾지 못한 허무함(<제인 에어>가 그랬어요),
영화가 소설을 심하게 배신해 느끼는 모욕감과 분노(<태백산맥>이 그랬지요)
따위 때문에.

그런데 <라쇼몬> 원작을 읽어 보니,
구로사와 감독은 아쿠타가와의 소설에서 그 배경과 등장인물, 그리고 문제의식만
가져왔을 뿐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하나 만들어 내었더군요.
야,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원작인 소설은,
촌철살인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려 주는 듯했어요.
신국판으로 9쪽밖에 안 되는 분량에 담은 인간 탐구의 백미.

아쿠타가와의 대표 단편을 묶어 놓은 책은 범우사의 것을 비롯해
몇 종 있는 걸로 압니다. 제가 그 중 박진배라는 분이 옮긴
인덕 출판사의 책을 선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서점에서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

범우사의 ≪아쿠타가와 작품선≫ 차례를 보니,
제가 가진 책에 담긴 작품과 거의 중복되고 네 작품 정도 다른 것 같습니다.
번역한 제목이니까 또 직접 보고 확인해야 확실하겠지요.
두 책 다 <라쇼몬>을 <나생문>으로, 그냥 한자음대로 번역했습니다.
<나생문>은 1915년 작입니다.


***

 검색해 보니 인덕에서 나온 이 책은 절판된 모양입니다.
"아쿠타가와 단편선"이라는 제목으로는 범우사의 것뿐이고,
'어른을 위한 동화'나 일본의 단편선 식으로 엮인 책에
아쿠타가와의 단편이 실린 경우가 몇 개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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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데스몬드 모리스 지음, 박성규 옮김 / 지성사 / 1997년 1월
평점 :
절판


2002. 4. 22데스몬드 모리스 지음 <접촉>, 지성사 데스몬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영국의 동물행동학자입니다. 1928년생이고 아직 사망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지성사에서 1994년에 펴낸 <접촉>의 원제는 Intimate behavior랍니다. 박성규 옮김, 김준민 감수. 지은이가 원래 책을 펴낸 때는 1971년이랍니다. 데스몬드 모리스는 1967년에 발표한 <털없는 원숭이The Naked Ape>가 1991년 정신세계사에서 번역 출간되어 우리 나라에서도 유명해졌지요. 그러나 사실 이 책은 이미 1979년에 <털 빠진 원숭이>란 제목으로 재동문화사(載東文化社)란 출판사에서 우리 말로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직 우리 나라 독자들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나 봐요. 책과 독자의 만남에는 그 운때라는 것도 참 큰 작용을 합니다. 동물행동학자라지만 이 사람은 인간을 동물로서 관찰하는 걸 좋아하나 봅니다. 이 사람의 대표작도 <맨 워칭Man Watching> <바디 워칭Body Watching>, 뭐 이렇습니다. 이 책, [접촉]은 제목을 참 잘 달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제를 직역하자면 '친밀한 행동'이 되는데, 친밀한 행동이란 무엇인지, 그게 도대체 어떻다는 건지 잘 짐작되지 않습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사람의 육체적인 접촉을 다룹니다. 육체적인 접촉이란 닿는 것, 만지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이 어느 때 어떤 접촉을 하는지, 일반화한 접촉 행위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주 쉬운 말로 일상의 행동을 뒤집어 보입니다.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은 약간 소름 돋으면서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되지요. 그럴 때 나 자신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지은이는 서양 사람을 주로 관찰했을 테니 우리와 안 맞는 부분도 좀 있고, 그리고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대체로 매우 인상 깊었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이 팔을 괴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치는 행위에 대한 해석입니다. 우리 앉아 있을 때면 곧잘 팔을 괴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치곤 하죠. 그게 바로 다른 사람 대신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져 주는 행위랍니다. 쓰다듬는 것, 포옹하는 것은 위로와 안정을 구하는 접촉입니다. 누군가에게 위로와 안정을 받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형편도 여건도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다는 뜻을 드러내는 건 자신의 약한 면을 들키는 짓이다, 이럴 때 사람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받쳐서(접촉해서),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에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거예요. 음... 저도 확실히, 좋아하는 사람이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합니다. ^^; 지은이는 서문에서, "두 사람이 서로 몸을 접촉할 때는 무엇이 일어나는데, 내가 연구하고픈 것은 바로 이 '무엇'이다"고 말합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아무리 잘난 척해도 포옹 없이는 살기 힘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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