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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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4. 1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지음, 송은경 옮김.
오래 전에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새물결)를 읽고 천리안의 애서동에
글을 쓰면서, 다음에 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고 글을 올리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인지 몰라. ^^;

그 뒤에 이 책을 읽긴 읽었는데,
요 3년간 정말 사생활이 거의 없이 살았거든요.
그러다 올해 들어 내 시간은 내가 챙겨야 한다고 생각,
감히 다시 글을 올리기 시작했죠.

'게으름'이란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잇따라 산 걸 보면
그 무렵 '근면'이란 가치관에 회의를 품게 되었나 봅니다.
전에는 일이 재미없을 때 뭔가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죠.
내 마음에 드는 책, 나를 자극하는 책을 만드는 건
아주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별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라도,
엉망진창인 원고 상태를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는 먹게끔 뜯어고쳐 말끔히 수리해냈을 때,
정복의 쾌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일은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날것과 같은 재료를 가지고 책을 만드는 재창조 과정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사생활도 없이 한 1년을 그 '재미있는 일'에
모조리 바치고 나니, 여유 시간이 나자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바쁜 일 사이의 짬,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도 많이 있습니다.
전시회나 공연, 그리고 그 동안 자주 못 만난 사람들...
나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을 들여다보고...
일말고도 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야근에 저녁 시간을 온통 바쳐야 할 시기가 옵니다.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일에 묶여 있을 때는
이 일만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나면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다가
다시 일의 족쇄에 팔다리가 묶여서야 안도감이 든단 말입니다.

노예, 일의 노예.

한 3년 전부터 계속 되풀이되는 일입니다.
이제는 좀 여유를 찾았지만,
그래도 여전한 것은 일을 많이 할수록
할 일이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프랑스의 공산주의자인 폴 라파르그가
노동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일 자체는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 팜플렛입니다.

19세기 말에 그는 이미 6시간 노동제를 주창하면서,
열 사람이 하루에 열두 시간 걸려서 할 일을
스무 사람이 하루에 여섯 시간씩 하면,
스무 사람이 모두 먹고 살 수 있고, 또 스무 사람이 모두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현대의 신자유주의 시장에서는 스무 사람이 하루에 여섯 시간씩
일하는 데가 있었다 해도, 열 명은 자르고 나머지 열 명에게
그 일을 다 하라고 강요하죠.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면 남은 열 명은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하면서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을
빼앗깁니다. 쫓겨난 열 명은 책 읽을 시간, 친구를 만날 시간,
문화를 향유할 시간은 있지만 생존을 위협받죠.
먹고 살 수단이 없는 마당에 문화를 어떻게 향유한단
말입니까.

열 사람의 근면, 그 반대편에는 열 사람의 빈곤이 있는 겁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였던
영국의 철학자 러셀(1872-1970)의 정치 칼럼
혹은 문명 비평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1935년에
영국에서 책으로 묶여 나왔고, 제가 읽은 책은 사회평론에서
1997년에 초판이 나오고 1998년에 3쇄를 찍었습니다.

재미있는 글이 많지만, 표제작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주장은
폴 라파르그의 이야기와 상통합니다. 근면이란 노예의 도덕이며,
노동은 인간 생활의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란 이야기이죠.

그들이 19세기 말에, 그리고 1930년대에 이미 한 이야기를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야 되새긴다니.
하긴, 그들이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어도
자본주의의 바퀴는 미쳐서 돌아갔지요.

이제는 사이버자본주의의 시대, 그러나
기계가 발전할수록 인간이 더 편해지는 게 아니라,
노동 시간이 더 늘고 노동 강도가 더 세어지는 건
어딜 봐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세 사람이 나누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사흘 걸려 할 일을,기계가 좋아지니
한 사람이 열두 시간에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 두 사람은 잘리지요.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하루에 열두 시간 일해 일을 다 해냅니다.
나머지 이틀은 쉬냐구요? 아니지요.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으니
일거리가 계속 늘어납니다.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이라는 글에서 러셀은
실용주의적인 지식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비판하지요.
실용주의적인 지식이란 바로 생산, 곧 돈벌이에 직결되는 지식일
테지요. 러셀은 '무용한 지식'이 얼마나 유익한지 말해줍니다.

<인간 대 곤충>, <혜성의 비밀>의 통찰력과 유머를 비롯해,
이 책에 실린 나머지 그리 길지 않은 글에서
신선한 충격을 맛보는 기분은 꽤 좋습니다.
뭐 물론, 그가 서구 문명에 속한 사람이라는 한계는
은연중 드러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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