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5
바오 닌 지음, 박찬규 옮김 / 예담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2002. 2. 21 바오 닌 지음, <전쟁의 슬픔> 베트남 소설입니다. 작가 바오 닌(Bao Ninh, 베트남어 표기로는 바오의 a 위에 쉼표 같은 게 붙어 있습니다)은 이 책이 국내에서 출간된 1999년에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초청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어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에서 이 작가와 작품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답니다. 박찬규라는 분이 옮겼고, 예담에서 1999년에 나왔습니다. 베트남에서 원작이 발표되기는 1991년입니다. 이 책에 대해 저는 객관적일 수가 없습니다. 오래 쉬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 책임 진행한 책이거든요. 당시 베트남에서 가장 화제였던 소설로, 저작권 상황을 알아보니 영국의 Martin Secker & Warburg Ltd.란 출판사가 1983년 영어판을 내면서 전 세계의 번역 판권을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어 그쪽을 통해 작가와 저작권 계약을 맺었습니다. 베트남어 원서로 번역하려 했지만 한겨레신문 베트남 통신원으로, 우리 나라 무슨 방송사 같은 데서 베트남 취재를 가면 그 창구 같은 노릇을 하는 구수정씨(당시 호치민국가대학 역사학과 석사과정 재학)도 절반 정도 번역하고는 그 언어의 맛을 도저히 우리 말로 옮길 수 없어 포기했다는 이야기에 중역을 택했습니다. 저작권 계약을 영어판을 낸 출판사와 했기에 원칙상 영어판을 번역해야 했지만 작가가 영어판보다는 불어판이 자기 원작을 잘 살렸다고 했다는 이야기에 사실상 불어판을 텍스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구수정씨에게 번역 원고를 보내 원작과 대조해 달라고 했는데, 불어판 번역과 원작을 대조 교정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더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서 역사적인 사건 따위 오역의 가능성이 있는 걸 바로잡거나(불어판에서 '원숭이해 대공습' 이라고 번역한 것을 '무신(戊申)년 대공습'으로 바로잡는 따위) 지명, 인명 표기를 원어 발음에 가깝게 고쳐 주는 정도 일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만해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요. 그때 한 가지 배운 것이, tran으로 표기되는 베트남 이름은 '트란'이 아니라 '쩐'으로 발음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린 파파야 향기>나 <씨클로>를 감독한 트란 안 훙은 사실 '쩐 안 훙'으로 발음해야 옳은 거지요. 이 책은 그리 많이 판매되진 않았지만 한번 읽어 본 사람은 다시 잊지 못할 소설이라고들 말합니다. 한데 딱 절반쯤 되는 부분까지는 시점과 공간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당황스러운 넋두리가 이어져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절반을 넘어서면,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지요. 작가 바오 닌은 1952년생으로, 1969년에 고교를 졸업하고 북베트남인민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해에 '영광의 제27청년여단'에 입대한 소년병 500명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단 10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1975년 베트남전을 승리로 매듭지은 사이공 함락 전투에도 참여했고 (이 소설은 그 승리란 것의 현현顯現이 어떤 것인가도 말해 주지요)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실종자수색대에 복무했습니다. 실종자수색대란 전쟁중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부대인데, 베트남 그 울창한 밀림 속에 파묻혀 버린 이름 모를 병사들의 유골을 찾아 안장해 주는 것이 주 임무였지요. 아, 이 사람만큼 전쟁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소설은 1991년 베트남문인회 최고상을 수상했는데, 베트남에서는 원고 상태로 심사를 받고 그 중 상을 탄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지나 봅니다. 1990년 심사에 들어간 이 작품은 최고상 후보로 곧 손꼽혔지만, 일부에서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인민군의 숭고한 이미지를 훼손하고 재향군인회의 분노를 살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일어 <사랑의 행방>으로 제목을 고친다는 조건을 달고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베트남에서 처음 나올 때의 제목은 '사랑의 행방'이었답니다. 재향군인회의 분노를 살 우려가 있다니, 그런 것이 문학상 수상작을 결정하는 논의에 영향을 미친다니 우리 나라에서 <태백산맥>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벌어졌던 일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나 제목을 고쳤을 뿐 내용에는 손대지 않고, 또 어쨌거나 전쟁을 승리했다는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은 소설에 과감히 상을 준 점, 우리 나라보다 낫지 않습니까? 제겐 표지가 코팅되지 않아 반품된 이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모조지에 인쇄하고 유광으로 코팅해 아트지 인쇄, 무광 코팅과도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책, 그런데 코팅 안 된 느낌이 더 좋군요. 오랜만에 이 책을 넘겨보다 보니 음, 눈물이 납니다. 역시 이 책에 대해서는 객관적일 수가 없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슬픔이 저를 압도해 옵니다. *** 이 글을 쓰고 나서 출판계 선배에게 지적받은 사항이 있습니다. '공습'이라 하면 보통 攻襲이 아니라 空襲을 의미하므로, 비행기가 없었던 베트콩의 공격은 "공세"라 해야 한다고. 국어사전에는 攻襲이란 단어가 있는데, 군사용어로는 쓰이지 않나 봐요. - 200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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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a 2007-06-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리뷰를 쓰러 들어왔다가 님의 리뷰를 읽고, 좋은 책 잘 읽었다는 인사는 꼭 드리고 싶어서 님의 서재에도 들렀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분인 듯 하네요. 앞으로도 좋은 책, 계속 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숨은아이 2007-07-0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알아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2002. 1. 15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전 7권, 학산문화사


말할 것도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 Hayao Miyazaki)의 1984년작
만화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의 토대가 된 만화책입니다.
종이책으로 된 만화는 저작권 표시가 1983년이네요.
쓴 김에 책에 나와 있는,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을 적자면
Nausicaa of the Valley of the Wind로군요.
일본어 발음도 알파벳으로 씌어 있습니다. ^^; Kaze no Tani no Nausicaa래요.

두 시간 분량으로 꽉 짜인 만화영화보다 더 엄청난 이야기를
품고, 그래서 사실은 더 암울하고 어두운 회의와 허무의 숲을
더 힘겹게 헤쳐 나가는 나우시카의 이야기,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아무래도 만화가라기보다
철학자로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우리 나라에선 학산문화사에서 2000년 11월에 나왔습니다.
2000년 12월에 1권을 사고는 책꽂이에 방치하다가
1년이 지나서 나머지 여섯 권을 선물받고
병가를 내 쉬던 중, 그것도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책을 집어들었네요.

1권 끄트머리에 소개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나우시카는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이아키아
왕녀의 이름이다. 나는 버나드 엡슬린의 [그리스 신화소사전]에서 그녀를
처음 알고부터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 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소설화한 것을 읽어 봤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엡슬린의 소사전에서처럼
반짝거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나우시카란 어디까지나 엡슬린 문고판
3페이지에 걸쳐 묘사한 소녀 그대로이다. 엡슬린 역시 나우시카에게
특별한 호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제우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유명인물도
1페이지 남짓밖에 써 주지 않은 소사전에서 그녀에게만은 3페이지나
할애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우시카-발이 빠르고 공상적인, 아름다운 소녀. 구혼자나 세속적인
행복보다 악기와 노래를 사랑하고, 자연과 어울리는 것을 더욱 기뻐하는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 바닷가에 떠내려온 오디세우스의 피투성이
모습에도 두려움 없이 그를 구하고 치료해 준 것은 바로 그녀였다.
즉흥적인 노래로 그의 마음을 달래 준 것도 그녀다. 나우시카의
양친은 그녀가 오디세우스를 사랑할까 봐 걱정하여 그를 서둘러
출항시킨다. 그를 태운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해안에서 바라보는
그녀는 그 후 어떤 전설에 따르면 평생 결혼하지 않고 최초의 음유시인이
되어 궁정에서 궁정으로 여행을 하며 오디세우스와 그의 모험 항해를
노래했다고 한다.

[...]

나우시카를 알게 되면서 나는 어느 일본 설화의 여주인공을 떠올렸다.
아마 옛날 이야기(今昔物語)에 나와 있었던 것 같다.
벌레를 사랑하는 아씨라 불렸던 소녀가 있었다.
어느 귀족의 딸이었던 그 소녀는 혼기가 차도록 들판을 뛰어다니고,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해서 주위에서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그 또래 소녀들처럼 눈썹을 밀지도,
이를 먹으로 물들여 장식하지도 않고 새하얀 이와 새카만 눈썹을
그냥 가지고 있어서 모습 또한 이상했다고 씌어 있다.

오늘날이라면 그 소녀는 괴짜 취급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조금 별스런 데가 있어도 자연애호가 또는 개성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볼 뿐,
충분히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다. 그러나 겐지모노가타리(原氏物語 ; 11세기 초,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히카루 겐지와 여성들의 이야기)나
마쿠라노소시(枕草子 ;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 세이쇼나곤이 쓴
궁정 생활의 회상, 견문, 자연 등에 관한 수필집)의 시대에
벌레를 사랑하고 눈썹도 밀지 않은 귀족 처녀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소녀의 운명이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사회의 속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감성 그대로 야산을 뛰어다니며
풀이나 나무,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을 움직이던 그 소녀는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오늘날이라면 그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관습과 터부로 가득한 헤이안 시대에
그녀를 기다렸을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안타깝게도 나우시카와 달리, 벌레를 사랑하는 아씨에게는
만날 오디세우스도, 부를 노래도, 속박을 피해 유랑할 곳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약 위대한 항해자를 만났다면, 그녀는 반드시
불길한 피투성이의 남자에게서 찬란히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것이다.

내 안에서 나우시카와 벌레를 사랑하는 아씨는 어느샌가
동일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 [애니메쥬]의 사람들에게 만화를 그려 보라는 권유를
받고 들뜬 마음에 자기 류의 나우시카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화근이 되어, 오랜 옛날에 재능이 없어
만화를 단념할 때의 그 아픔을 다시금 곱씹게 되고 말았다.
이제는 어떻게든 이 소녀가 해방과 평화의 나날에
이르러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글을 보면 미야자키 역시 '구원의 여성상'을 그리는
남성 작가 중 한 사람일 뿐인 것도 같지만,
저는 미야자키의 만화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이 사람은 흔한 낭만주의자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느낀 적이
많습니다.

물론, 미야자키의 여주인공들은 암담한 인류에게 희망이 됩니다.
암담한 것은 무슨 재앙이 닥쳐와서가 아니라,
인류 그 자체가 암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가 암담한 인류의 일원으로 살면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회의와 절망에 온 존재로 맞서는
여주인공은 슬픔을 압니다. 자신의 아픔은 없이
대중의 요구에 따라 한결같이 따뜻한 품을 내주는
박제화한 여신이 아니라, 생동하는 전사의 박력을 갖추었기에
인간의 여성이 지니는 의지 중 아름다운 부분을
실감나게 보여 줍니다.

미국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여자이면 대개 그에 맞서는
악녀가 등장합니다.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도 여주인공의 대립항에
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볼 여지도 없는 궁지에 몰아
가차없이 파멸시켜 마땅한 미국 만화의 비현실적인 악녀와 달리
미야자키의 작품에 나오는 '나쁜 여자'는 이성과 합리를 대표합니다.
그녀가 냉정하고 때로는 '나빠' 보이는 것도 사실은 상황 파악이
빠르고 냉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성과 합리주의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하며, 이성으로써
인간의 이름으로 짓는 범죄를 깨닫고 그 오류를 납득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크샤나가 그렇고,
[미래소년 코난]에서 몬스키, [원령공주]에서 에보시가 그렇습니다.

여주인공과 함께 하는 남성은 대개 공주를 구하는 기사로
등장하지요.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도 대개 기사, 또는 마음이 따뜻한
전사로서 남자(라기보다 소년)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흔한 만화에서처럼 이 남자 없이는 여주인공 혼자
암것도 못하지도 않고, 또 다른 흔한 만화에서처럼
남자가 여주인공에게만 경도되어
깊고 너른 사고는 도통 할 줄 모르는 멍청이도 아닙니다.
미야자키는 여자와 남자 사이에(꼭 여자와 남자 사이가 아니더라도),
벗 사이, 동반자 관계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소년은 힘이 셉니다. ^^;
미래소년 코난은 두말하면 잔소리이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아스텔,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파즈도 그러하며,
[원령공주]에서 아시타카는 그 힘이 특히 강조됩니다.
미야자키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한 건 근력밖에 없다는 걸
아는 듯합니다. 그걸 아는 남자의 힘은 아름답습니다.


***

이 글을 쓸 때 "마쿠라노소시(枕草子)"라는 말을
내 손으로 쳤으면서도,
이후 그런 책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금 나는 마쿠라노소시 한국어판을 만들고 있다.
작업 의뢰가 왔을 때도 "마쿠라노소시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 지금 이 글을 옮기면서 보고 깜짝 놀랐다.
이 글을 쓸 때는 마쿠라노소시를 내가 만들게
될 줄 몰랐고, 방금 전까지 마쿠라노소시 작업을 하면서도
예전 내 손끝에 이 책의 제목이 슬쩍 지나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것도 인연인가. - 200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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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02.1.17

 

'현대 일본의 마지막 사상가'라는 후지따 쇼오조오(藤田省三)의
글을 묶은 책입니다. 재일조선인 2세인 이순애(李順愛)가 엮고
이홍락이 우리말로 옮겨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냈습니다.
1999년 초, 고대의 정대 후문 쪽에 있는 장백서원에서 마지막으로
산 책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읽기는 2000년에 읽었는데,
제가 2000년에 읽은 책 중 최고였습니다.
누군가 자기 세계관을 진지하게 응시하려 한다면
이 책을 꼭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 제가 특히 별표를 찍어 놓은 글은
[불량정신의 찬란함]과 [소나무에게 들어라]입니다.

후지따 쇼오조오는 1927년생으로, 도쿄대 법학부에서 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호오세이(法政)대학 법학부 교수를 역임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엮은이 이순애는
"물론 후지따말고도 재일조선인 문제라는 사회문제에
양심적으로 대처해온 일본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와 같은
유형·무형의 연대가 없었더라면 재일조선인은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지따만큼 자신의 인식과 존재,
그리고 정념의 절박한 존재양식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영혼
부분에까지 다가서려 했던 일본인 지식인은 별로 없었다"고 씁니다.

일본 글을 직역하면 문장이 참으로 지저분하게 됩니다.
사실 이 책도 그런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기에
물 흐르듯이 순탄하게 읽히지는 않습니다만
한 마디 한 마디 후지따 쇼오조오란 사람의
예리하게 날세운 순백색 신경을 타고
뼛속 시린 사고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아프고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쓴 글도 아닙니다.

전체주의 혹은 파시즘이란 것이 2차 대전, 혹은 냉전 종식,
혹은 군인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졌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러나 정보화, 탈집단화 사회, 아니 그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는 '생활양식에서의 전체주의'를
몸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안락에의 예속' 바로 그것이죠.
자신의 온 존재로 대상, 물질, 세계를 겪고 만나고,
그로써 고통이 따르는 경험을 통해 이해와 지혜를 얻기란
보육기 속의 만능 계측기를 지향하는 현대인에게
불가능해진 걸까요? 일률화한 사회질서에 굴복해
오직 '소비할 자유'만으로 만족하는 현대인에게는?

사회에 적응해 '둥글어진다는 것'은
사실 약자에게는 예사로 비수를 흩뿌리는 행위라는 거,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제가 권력의 노예입니다...

글 중에 <아리랑>의 서장을 해석한
[김산 서사시 서장에 대하여]란 것도 있어 흥미롭습니다.
내 <아리랑>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분명 한 권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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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길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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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 11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이라는 프랑스 남자가 사진을 찍고
앙토넹 포토스키(Antonin Potoski)라는 프랑스 청년이 글을 쓴
책입니다. 원제는 La plus belle route du mond.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란 뜻이지요.
저작권 표시는 2000년으로 되어 있고 마음산책이란 출판사에서
2001년 2월에 우리말로 펴냈답니다. 옮긴이는 백선희.

일회용 사진기로 찍은, 입자가 굵은 사진에서
미얀마의 사원 벽돌을 달구는 열기와
사헬 지역의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합니다.

유명한 사진작가라는 베르나르 포콩은 1997년에
"내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축제에 전념했답니다.
그건 세계 20개국에 걸쳐서 청소년 2000명이 참여한 축제였다는데요,
이때 앙토넹 포토스키가 그와 함께 이 축제를 위해 세계여행을 했답니다.
이 책은 그 여행의 산물인가 봐요.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납치해주기를 꿈꾸곤 했다.
내 등뒤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이야, 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어린이 유괴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경험이 몇 차례 있는
나라 사람으로서, 책머리의 이 글을 보고는
진짜 '꿈꾸고 있네' 하는 생각부터 떠올랐지요.

미얀마의 옅은 황금빛 공기를 말하는 서두,
프랑스 식민지였던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 나라(말리)에서
강렬한 빛에 짓눌리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 그의 몸,
그리고 쿠바의 밝은 빛 아스팔트가 깔린 고속도로를
한국제 자동차를 타고 테크노 음악을 들으며
그 아름다움과 난폭함을 받아들이는 그의 여행.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완전히 벗을 수는 없지만,
하얀 플라스틱 통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고
은색 뚜껑에 검은 잉크로 '말리 우유 딸기'라고만 찍혀 있는
말리의 요구르트를 마시고는 이 나라의 모든 요구르트가
그러리라 생각하고 그 통을 간직하지 않은 아쉬움을
말하는 대목, "떠나온 세계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는
걸 아는 그의 양식, 황금빛 억새가 펼친 양쪽 책장 가득 휘날리고
그 너머 보랏빛 민둥산이 희미하게 보이는 사진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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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9-0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배우시는군요. 멋져요! 저는 전에 배우려고 했지만 게으른 탓에. 그리고 디카가 생기니 내멋대로 찍을 수도 있고 해서. ^^ 그래도 기술이 좀더 좋으면, 카메라가 좀더 좋으면 더 멋지게 찍을 수 있을 텐데 하곤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