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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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은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구멍을 내준다. 늘 보아온 풍경을 달리 보게 하고, 신선한 면을 보게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의나 상식으로 여겨져온 것을 뒤집는 위협도 숨기고 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순히 정의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들이 더 잘 알아듣게 쓰는' 것일 지도 모른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두번 째(지난번 '프라하의 소녀시대' 이후) 접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명료하고, 균형 잡혀있고, 유머러스하고, 교조적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성찰을 담담하게 나누는 그녀의 화법은, 위에 적은 한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될 만한 일관된 주제를 여러가지 사례로 풀어내는 이 한 권의 가볍지도 묵직하지도 않은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엔돌핀의 역할을 한다. 고정관념이나 상습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 같은 이에게도 조금의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주지 않고 그저 그녀의 명강의에 즐겁게 귀를 기울이면서 서서히 마음을 열게 하니, 효과적이기 이를 데 없는 것. 

이것이 그녀가 작가 이외에 가진 또 하나의 직업, 통역사라는 직업이 가진 장점 - 타 문화에 접한 경험이 유달리 많다는 -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마리 여사에 비하면 그 경력이나 실력이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번역과 통역 일을 해보았던 나의 주장이다. 

감히 말해보건대, 마리 여사는 통역사가 아니라 다른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이만큼 혹은 그 이상의 통찰력으로 그 직업을 통해 얻은 모든 정보와 세상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을 것이고, 나로 말하자면 번역/통역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서 얻게 된 지식이나 눈꼽만큼의 통찰도 스스럼없이 나눌 재기를 갖지 못했으니, 아, 읽으면 읽을수록 자괴감에 빠져드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양가도 있고 맛도 있는 달콤한 케잌을 야금야금 베어 먹으면 포만감과 행복감에 빠져들 듯이, 이런 책을 자괴감 때문에 외면한다는 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짓. 내가 같은 직종에서 일했던 당시에 말하고자 했던 수많은 말들이 어두운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가 뽀글뽀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 문장들을 꼼꼼이 읽어나가는 즐거움은 전작에 비해 유달리 그 속도가 경쾌하고 빨랐다는 것을 말해두고싶다. 

그나저나, 마리 여사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마법사 집회에서 받았다는 '악마와 마녀의 사전'이라는 책은, 나도 어디서 얻을 수만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고싶네, 이런 식이라니, 마법사들 너무 귀여운 것 아닙니까. 후후.

사랑: 공짜 이익을 얻기 위해 상대에게 거는 주문의 일종. 이 주문에 걸린 사람은 대가 이상의 것을 받았다거나 상대의 덕을 봤다고 생각한다. 주문을 외는 사람이 착각하여 자신이 손해 봤다고 여길 때도 많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등 일부러 토를 다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본래는 대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희망: 절망을 맛보기 위한 필수품. 

배려: 약자에게는 보이지 않고 강자에게만 보이는 공손함의 표시. 

겸손: 자랑하고 싶은 것을 남이 대신 말하게 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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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2009-11-1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살까 다른 책을 살까 고민하다 결국 다른 책을 사고야 말았네요. 구입한거라면 나중에 대어 가능할까요? 한번은 읽고 싶지만 구입하고 싶은 간절함은 없네요.. (이상한가요?)

치니 2009-11-17 13:28   좋아요 0 | URL
번역 및 통역 일을 많이 한 토니님은 공감이 많이 될 내용이에요. 제가 갖고 있는 책 보낼게요, ^-^ 주소 알려주세요 ~

토니 2010-01-0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정연휴 집에 다녀오는 길에 열심히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혼자 피식피식, 키득키득 웃다가 또 어느 부분에선 '그렇지' 하며 무릎을 치기도 하고. 제가 지금까지 통번역을 했다고 하더라고 이런 글을 결코 쓰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앞으로 백년은 더 일한다고 해도.. 사실 과거 통번역을 했을 때 늘 제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했거든요. 어쩌면 그래서 그만 뒀는지도 모르겠어요. :) 좋은 책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치니 2010-01-04 09:4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래요, ㅋㅋ 한 때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이런 글을 쓰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 그래서 마리 여사가 대단해 보여요. 새해 복 많이!
 
타인의 삶 - The Lives Of Othe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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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대로 살지않으면 머지않아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Il faut vivre comme on pense, sans quoi l'on finira par penser comme on a vécu)  

-Paul Bourget -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인연이 맞아 감상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폴 부르제의 저 말이다.  

용기를 내어, 용기를 내어, 용기를 내어. 용기란, 얼마나 힘든 마음의 결기인가. 영화 속 타인의 삶을 도청하는 남자의 행동은 자신의 양심을 최소한이나마 지키고자 했던 용기였을까, 아니면 그저 예술을 탐미하는 '당신의 관객'으로써 갖는 최소한의 권리 주장이었을까.  

글을 쓰는 작가의 양심이란 1984년 동독에서 어디까지 책무로 치환되어야 할까. 아니 1984년 동독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지금 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침묵하는 작가들에게 이 영화 속 파울처럼 '당신이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걸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백배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 있을까.  

자신이 하는 예술이 자신의 삶보다 절대적이라서, 그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만큼은 몸을 팔 수도 있었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권력 앞에서 배신할 수 있었던 크리스타는, 그녀의 때늦은 후회는, 그저 용기 없음에 지나지 않는가. 그녀가 권력 앞에서 소신을 지켰다면, 그래서 예의 도청하는 남자가 그녀의 아름다운 연기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녀를 그리워 할 것인가 기억 속에서 잠깐 아름다웠던 한 여인으로 버릴 것인가.  

믿고 싶은 것이 사람에 의해 지켜지는 것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면, 우리는 잠시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언급된 음악이 그러하다. 레닌이 '내가 그 음악을 계속 들었다면 혁명은 성공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그 소나타. 그 소나타 때문에 한 상급 국가 공무원은 우체국 집배원이 되었고 그가 구해 준 작가는 베스트셀러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거듭 났다. 이것은 믿고 싶은 것이 지켜진 예가 아니다, 내가 잘못 말했다. 나는 잠시 위안을 받기 보다 세상이 그저, 우연 속에 기대고 있다는 허망함을 맞이한다. 슬프다, 사람이여. 그래서 크리스타에게 예술이 그토록 중요했음을, 음악이 그토록 위대함을, 영원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임을, 다시 깨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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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0-0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좋죠, 치니님!!
별 다섯개 이상을 마구 주고 싶은, 그런 영화에요. 드디어 보셨군요!

치니 2009-10-03 14:51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드디어!
블리저인가 블러저인가, 벌써 이름은 가물하지만, 그 도청하는 국가정보부 아저씨, 제이상형이에요. 으흐. 가만보면 제가 베니니를 비롯해서 대머리 외국 아저씨들 좋아하는 듯.

니나 2009-10-03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 지금 제 앞에는 영국에 간 후배가 보낸 터너의 엽서가 있고
그런 말이 적혀있어요
<"이런 아름다운 예술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곤 해요
어쩌면 사람 구할려고 예술이 있는게 아니라, 사람이 살아볼려고(어떻게든)
예술을 하게 된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사람이 남는게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게 남는건가... 생각들었네요
문득, 저도 허망하기도 하고 영원도 부질없어 뵈기도 하고 ^^ 히.

치니 2009-10-03 14:53   좋아요 0 | URL
영국에 간 후배, 영국에 간 후배, 아아 이 영국이라는 글자만 왜 폰트 44로 보이죠.
얼마 전에 오키나와 갔다왔는데, 이눔의 유럽여행병 도졌나봐요. ㅋㅋ

사람이 살아볼려고, 예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겠죠, 아마도. 그나마 사람이 살아볼려고 한 것 중 예술이 제일 낫긴 하겠구요.
가을인데 허망, 허무, 이 쪽으로 가면 안되는데, 으 노력해도 잘 안되네요.

네꼬 2009-10-0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나는 영화를 너무 몰라서 이런 작품도 본다 본다 본다 본다 하면서 미루고 있었어요. 볼게요, 뭐, 치니님이 이러시면.

치니 2009-10-03 14:54   좋아요 0 | URL
액션영화를 즐기는 터프 네꼬님, 가끔은 이런 영화로 힘 좀 빼봐요 ~ ^-^
응응 야한 장면도 나온단 말여요. 히히.


2009-10-04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5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6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6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니 2009-10-1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보셨네요! 남동생이 권해서 본 영화인데 별 수천개는 주고 싶더라고요... 근데 도청하는 아저씨 제 타입이기도한데 ㅋㅋ 저도 대머리 좋아하거든요.

치니 2009-10-14 11:50   좋아요 0 | URL
그 남동생, 차암, 알수록 멋진 청년입니다.^-^
흐흐, 그런 타입이란 말이죠, 오케 접수!

hanicare 2009-10-1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죠?
그런데 예술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뭐고 간에
내 곁의 삶은 그냥 그대로라는 사실이 슬픕니다.가을탓을 할까요? 비겁하게......

치니 2009-10-16 14:08   좋아요 0 | URL
네, 볼 당시보다 지나고나서 더 생각이 많기도 합니다.
한번 더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를 거 같기도 하고요.

가을은 탓을 해도 잘 받아줄 겁니다. ^-^;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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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퇴근 길에 BECK의 음반 Odelay를 듣고있다. 이 음반은 최근에 나온 Modern Guilt보다 쎄고 난해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 곡은 강한 드럼 비트로 시작하는데 듣자마자 누가 뭐래지도 않았는데 깜짝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어지는 곡들은 그야말로 카오스. 이 사람 뭐야, 천재야 장난꾸러기야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야?!  

곡들은 자유롭다. 어떤 쟝르에도 포함되지 않으며, 어떤 의도들은 깊이 파고들며 들어오다가 어떤 의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쑤욱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노래를 하는 젊고 잘 생긴 남자 BECK은 난장을 펼치면서 신나게 놀다가 갑자기 숙연해지는 처량한 음색으로 익숙한 멜로디의 샘플링을 삽입하기도 하고 클래시컬한 작곡의 정수를 보여주다가 쌩뚱맞게 카우보이 모자를 쓴 서부 영화 주인공처럼 컨츄리 리듬을 쿵짝 거린다. 

아, 정신없어. 아, 그런데 나 이미 이 정신없음에 빠져버렸네, 씨디를 뺄 수 없다. 아무리 들어도 더 들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지, 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에. 

사샤 스타니시치, 이 사람도 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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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2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며칠전에 다 읽었어요 치니님.
정신없지만 매력있는 맞아요, 그런 소설이에요.

치니 2009-08-21 13:4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리뷰도 궁금해요, 써주세요 ~ ^-^

nada 2009-08-2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생각할수록 절묘해요.
사샤와 벡의 비교.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잖아요.
정신없는 난해함 속에 피할 수 없는 매력.^^
전 둘 다 미치게 좋아해요. 히.
벡은 어쩜 그렇게 들을 때마다 새로울까요.
저도 오랜 만에 주섬주섬 꺼내봐야겠어요.

치니 2009-08-23 11:19   좋아요 0 | URL
솔직히, 이 글을 쓸 때 독고다이님을 은근 떠올리고 있었는데 으흐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이거 완전 낚은 기분 ~ (나 혼자 ㅋㅋ) 좋습니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혹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건, 휴, 정말 대단해요.

네꼬 2009-08-2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 이런 진짜 최고 멋진 이런 정말 이런 리뷰를 보았나!

치니 2009-08-25 11:10   좋아요 0 | URL
크하 어떤 고양이가 쓴 진짜 최고 멋진 구매 40자평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수많은 알라딘 독자들을 생각해보삼!

삶은계란 2009-08-3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벡을 백뮤직으로 깔고 읽을 걸 그랬군요. ㅜㅡ

치니 2009-08-31 11:40   좋아요 0 | URL
^-^ 삶은계란님, 처음 뵙습니다. 반가워요.

무해한모리군 2009-08-31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선물로 받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삶은계란님 말씀처럼 배경음악으로 벡을 깔고 읽어야겠네요 ^^

치니 2009-08-31 14:51   좋아요 0 | URL
^-^;; 정신없는 벡을 깔고 정신없는(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따라가기 힘든) 이 소설을 읽는 건 매운데 또 매운 걸 먹는 것 같을걸요.
편안한 음악 들으면서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
 
모짜르트와 고래
페테르 내스 감독, 조쉬 하트넷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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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뱃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큰 소리로 그녀가 웃는다. 시니컬하고 차가운 그 웃음 뒤에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하! 첫눈에 반해버린 그녀가 자신을 조롱하고 배척하는 척 하는데도 그가 그녀를 따라 웃는다. 그 웃음 뒤에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의 불안이 역시,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불안한데다가 천재들이다. 아니, 적어도 남들보다 똑똑하다. 아니, 똑똑해서 불안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은 불안한데다가 바보다. 아니, 적어도 남들에게 바보 소리를 들을 거다. 바보라서 불안해졌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불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모짜르트가 되거나 동물인 고래가 되어서야 겨우 약간이나마 잠잠해질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 씩이나 하겠다고? 오오, 노우. 영화는 덩달아 걱정이 잔뜩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시작된 사랑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가 떼로 달려들어 말린대도 멈춰지지 않을 것을. 계속 지켜보는 수 밖에.

아니나 다를까, 일인칭으로 살던 이들에게 이인칭의 존재는 그 자체가 부담이다. 폭죽같이 눈이 부시던 소통은 이해보다는 오해 쪽으로 치닫기 십상이고, 죽도록 사랑한다고 해도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차라리 죽고 말지.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비정상인들은 그걸 모르는 비정상인들에 비하자면, 조금 더 불행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소위 정신과 같은데서 나누는 정상/비정상의 구분 기준에 따른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구분이 궁극적으로 필요한 건지도 가능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이들이 그렇다. 어차피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자신들이 하는 사랑에, 단 1%의 미래도 걸 수 없다. 한 치 앞을 모르는게 인간사라는 점을, 이들보다 수없이 체득한 사람들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체념이다. 그러니 아무리 옆에서 사랑이 곧 미래인 것은 아니지 않겠냐고 말해주어도, 이들에겐 소용 없다.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삶의 한 부분을 결정해주는 것 만큼은 견딜 수 없다. 이제껏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에 경기가 일어나도 잘 참아왔고 새들과 토끼만이 유일한 말동무여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견뎌왔는데, 사람끼리 조금 눈이 맞았다고 나를 바꾸려 든다고? 안 될 말이다.  

이렇게 아마 안될거야,로 흘러가던 영화가 서둘러 그동안의 고민이 무색하게 두 사람의 해후 장면을 감동적으로 만들어내고 앞서의 불안요소들이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 해피엔딩을 맺는 것이 내게는 조금 어리둥절한 부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Love is all you need, 그렇게 믿고싶은 우리들을 위무해주려는 최소한의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받는 편이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무더운 여름의 막바지. 

사족: 영화 디비디를 선물 받으면, 그 선물을 준 상대가 어떤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한 순간도 놓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보느라 전체를 조감하면서 보기가 살짝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다음에 만나서는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는지 꼭 말해주셔야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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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1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랑 섹스한 모든 남자들의 공통점은 아침외 되고 나면 그들이 없다는 거야."
"난 아침에 여기 있을거야. 여기 살잖아."


이 부분이었어요, 치니님.

치니 2009-08-17 16:23   좋아요 0 | URL
아, 네...^-^ 그 대사가 나오는 부분에서 안도의 미소가 흘러나왔었는데.
그랬군요.
 
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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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인적인 회고록의 형식을 가지면서 시대상과 팩트를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하고 감상이 아닌 감성으로 옛친구들을 기억 속에서 재현하는 이 책의 구성은, 일견 담담하고 평이하게 보이지만 옹골차고 재미나다. 

책을 읽으면서 잘 몰랐던 동구 유럽 (이렇게 동구, 서구로 나누는 것도 그들, 빈곤한 유럽에 속하는 이들에겐 거부감이 든다고 했지만)의 근대사를, 십대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그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생으로 또 커뮤니케이션의 전령으로 종횡무진 했던 작가를 통해 배우기도 했고, 소녀들의 성숙하고 깊은 우정을 엿보면서 내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몇몇 관계들에 대하여 짬짬이 돌이켜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격랑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에는 시도 때도 없이 운동을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야 했다. 이 책 속의 소녀들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배경으로 그런 기로에 서는 사람도 있기는 했겠지만 우리들에겐 당대의 정부에 대한 변혁이 관건이었다. 그 속에서 흑백론, 회색주의자, 양비론 등이 들끓었고, 소녀들은 태반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 

나는 아마도 그냥 비겁했던 것 같다. 데모하면 우리 집안이 다 망한다고 주입 받았고 바보처럼 그걸 믿었으나,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몰래 본 광주사태 영상을 안 본 걸로 치부할 수 없었다. 행동하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지지했지만 같이 연대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공적으로는 남자 아이들과 같이 최루탄을 피하고 돌멩이도 던지지만 사적으로는 같이 운동하는 남자 선배들 앞에서 담배도 마음대로 못 피우고 옥상에서 피운다는게 이상하다며, 별 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를 잡기도 하면서 나의 비겁함을 더욱 비겁하게 숨겼다. 

슬프게도 나는, 지금도 비겁하다. 그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대도 또 가만히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얼마전에 쌍용자동차 전쟁을 보면서 하고 말았다. 그 때는 그래도 바보 같았기 때문에 이 시기만 잘 보내면 좋은 날이 오는 줄 알았다. 이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당장은 아니지만 천천히, 그렇게 되어가는 줄 알았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서서히 굴러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바보인 나조차도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다.  결국,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만 같아서 무섭다.  

먼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네 명의 소녀들이 살아온 이야기일 뿐인데, 그걸 읽은 여파는 이토록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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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8-1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치니님 덕에 좋은 작가를 알게 된 것 같네요.
읽어보고 싶어요!

치니 2009-08-11 09:47   좋아요 0 | URL
괴물님이 읽어보신다면, 저보다 훨씬 제대로 된 리뷰를 적어주실 것 같아요. ^-^;; 저는 이 리뷰 쓰구서 아이 참 지지리도 못썼네 싶드라구요. 그러니 꼭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또치 2009-08-11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저도 읽어볼랍니다.

치니 2009-08-11 12:43   좋아요 0 | URL
우앙, 또치님도 읽어보시고 리뷰 부탁!

2009-08-11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2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2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3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4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4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