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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ㅣ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개인적인 회고록의 형식을 가지면서 시대상과 팩트를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하고 감상이 아닌 감성으로 옛친구들을 기억 속에서 재현하는 이 책의 구성은, 일견 담담하고 평이하게 보이지만 옹골차고 재미나다.
책을 읽으면서 잘 몰랐던 동구 유럽 (이렇게 동구, 서구로 나누는 것도 그들, 빈곤한 유럽에 속하는 이들에겐 거부감이 든다고 했지만)의 근대사를, 십대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그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생으로 또 커뮤니케이션의 전령으로 종횡무진 했던 작가를 통해 배우기도 했고, 소녀들의 성숙하고 깊은 우정을 엿보면서 내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몇몇 관계들에 대하여 짬짬이 돌이켜보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격랑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에는 시도 때도 없이 운동을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야 했다. 이 책 속의 소녀들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배경으로 그런 기로에 서는 사람도 있기는 했겠지만 우리들에겐 당대의 정부에 대한 변혁이 관건이었다. 그 속에서 흑백론, 회색주의자, 양비론 등이 들끓었고, 소녀들은 태반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
나는 아마도 그냥 비겁했던 것 같다. 데모하면 우리 집안이 다 망한다고 주입 받았고 바보처럼 그걸 믿었으나,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몰래 본 광주사태 영상을 안 본 걸로 치부할 수 없었다. 행동하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지지했지만 같이 연대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공적으로는 남자 아이들과 같이 최루탄을 피하고 돌멩이도 던지지만 사적으로는 같이 운동하는 남자 선배들 앞에서 담배도 마음대로 못 피우고 옥상에서 피운다는게 이상하다며, 별 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를 잡기도 하면서 나의 비겁함을 더욱 비겁하게 숨겼다.
슬프게도 나는, 지금도 비겁하다. 그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대도 또 가만히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얼마전에 쌍용자동차 전쟁을 보면서 하고 말았다. 그 때는 그래도 바보 같았기 때문에 이 시기만 잘 보내면 좋은 날이 오는 줄 알았다. 이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당장은 아니지만 천천히, 그렇게 되어가는 줄 알았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서서히 굴러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바보인 나조차도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다. 결국,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만 같아서 무섭다.
먼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네 명의 소녀들이 살아온 이야기일 뿐인데, 그걸 읽은 여파는 이토록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