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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 - The Lives Of Othe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대로 살지않으면 머지않아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Il faut vivre comme on pense, sans quoi l'on finira par penser comme on a vécu)
-Paul Bourget -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인연이 맞아 감상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폴 부르제의 저 말이다.
용기를 내어, 용기를 내어, 용기를 내어. 용기란, 얼마나 힘든 마음의 결기인가. 영화 속 타인의 삶을 도청하는 남자의 행동은 자신의 양심을 최소한이나마 지키고자 했던 용기였을까, 아니면 그저 예술을 탐미하는 '당신의 관객'으로써 갖는 최소한의 권리 주장이었을까.
글을 쓰는 작가의 양심이란 1984년 동독에서 어디까지 책무로 치환되어야 할까. 아니 1984년 동독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지금 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침묵하는 작가들에게 이 영화 속 파울처럼 '당신이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걸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백배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 있을까.
자신이 하는 예술이 자신의 삶보다 절대적이라서, 그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만큼은 몸을 팔 수도 있었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권력 앞에서 배신할 수 있었던 크리스타는, 그녀의 때늦은 후회는, 그저 용기 없음에 지나지 않는가. 그녀가 권력 앞에서 소신을 지켰다면, 그래서 예의 도청하는 남자가 그녀의 아름다운 연기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녀를 그리워 할 것인가 기억 속에서 잠깐 아름다웠던 한 여인으로 버릴 것인가.
믿고 싶은 것이 사람에 의해 지켜지는 것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면, 우리는 잠시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언급된 음악이 그러하다. 레닌이 '내가 그 음악을 계속 들었다면 혁명은 성공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그 소나타. 그 소나타 때문에 한 상급 국가 공무원은 우체국 집배원이 되었고 그가 구해 준 작가는 베스트셀러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거듭 났다. 이것은 믿고 싶은 것이 지켜진 예가 아니다, 내가 잘못 말했다. 나는 잠시 위안을 받기 보다 세상이 그저, 우연 속에 기대고 있다는 허망함을 맞이한다. 슬프다, 사람이여. 그래서 크리스타에게 예술이 그토록 중요했음을, 음악이 그토록 위대함을, 영원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임을, 다시 깨달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