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V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좋아한다. 오늘도 저녁을 먹으면서 내내 TV를 보았다. MBC 드라마넷에서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다가(이제 자막 순서도 외울 지경), 아마도 이세상 최고 귀여운 리얼리티 쇼일 EBS <유아독존> 뒷부분을 보았다.(시간이 잘 안 맞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보니 예상대로 강렬했어요. 6,7세 어린이들이 여행도 가고 싸우기도 하고 농사도 배우고 그러는 모양인데 오늘 제가 본 건 이를테면 '지하철 개찰구 지나갈 때 무서워 죽겠어요' 고발 편이었어요. 개찰구 가로막이 튀어나올까봐 벌벌 떨며 모험을 하다시피 취재하는 자기들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는 어른들을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할머니는 지나갈 때 안 무서워요?" 하고 묻는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애틋하던지요!)
내처 역시 EBS의 <세계의 교육 현장을 가다>를 봤다. "요즘은 집에서고 교육기관에서고 애들을 과보호하는데, 10세 이전에는 어렵지 않은 난관을 계속 만들어줘야 한다." 는 확고한 신념으로 꽤 엄하게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본의 어떤 보육원이 나왔다. 체육시간에는 서커스에 가까운 고난도 체조를 시키고 5세 이전에 주산을 가르치고 '실제 수준보다 약간 높은' 읽기 공부를 하고 3세전후부터 몸으로 음감을 익히는 훈련(!)을 받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이 무척 행복하고 건강해 보였다.(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죠. ㅠㅠ) 아 이웃나라에서는 몸도 정신도 튼튼하고 공부도 잘 하는 아이들이 쑥쑥 자라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MBC <황금물고기> 잠시 시청. 이렇게 해야 건전함과 방탕함의 균형이 맞다. 그다음 균형을 찾은 기념으로 얼마 전 첫 방송을 한 OCN <마이애미 메디컬>을 보았다. 보수파 제작자 제리브룩하이머 할아버지의 웰메이드 유혹에 언제나 쉽게 넘어가는 나는 이번에도 뻔한 패턴(각자의 사연을 간직한 유능한 주인공들, 한 시즌 내에서 점차 고조되는 갈등, 급박한 상황의 인간적인 선택, 결국 팀웍으로 사건 해결)을 알면서도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TV를 끄지 못했다.
명색이 편집자이면서 책 볼 시간을 TV에게 거의 항상 빼앗기는 처지라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사실은 책보다 TV가 좋은지도 모른다. 어쩐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시무룩). 장기복용중인 내 인생의 비타민 <무한도전>이 아마 제일 좋은 것 같고, <선덕여왕> <추노> <신데렐라 언니> <구미호-여우누이뎐>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잘 만든 드라마들을 좋아하고, 이따금 뒷골을 잡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다진 다음에야 보는 <PD 수첩>도 중요한 날엔 꼭 보는 편이다. 그런가 하면 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따금 <제빵왕 김탁구>를 보면서 적어도 저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개연성 있는 욕망에 끝까지 충실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고 요즘엔 누구 누구가 나와 있는지 알아나 두자는 심정으로 <뮤직뱅크> 같은 걸 일부러 틀어보기도 한다. TV는 바보 상자인데... 하는 괜한 부끄러움이 엄습할 때가, 나도 있다.
그럴 때 제일 좋은 처방전은 <텐아시아>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이다.(사실은 매일 아침 일과예요.) TV를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 곳곳을 매우 수준 높은 기사로 훑어주고 파헤쳐주고 긁어주고 때려주는 이 놀라운 웹진은, 오랜 시간동안 나도 모르게 TV프로그램이라는 것, '대중' 문화라는 것을 약간 폄하하는 기분으로 대하지 않았나 하는 거센 반성을 하게 해준다. 고마운 <텐아시아>는 기자들도 기자들이지만 외부 칼럼니스트들도 재미난 사람들이 많다. 얼마 전 그중 두 분이 책을 냈다고 해서 당장 주문해 받았다. 두 권을 같이 읽고 있는데(한 권도 제대로 못 읽는 주제에 두 권을 같이 보는 건, 한 권은 만화책이기 때문이에요) 둘 다 재밌다. 그분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시겠지만 혼자서는 꽤 오래 지켜온 의리를 과시하는 뜻에서 여기 링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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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나라의 앨리스>에는 각오했던 대로 역시 모르는 외국 상표 이름이 난무하지만, 그런 단어의 가시덤불을 헤치면 진심 어린 '패션 에디터'의 생생하고 뜻깊은 산문을 만날 수 있어요. <그래요, 무조건 즐겁게>는 뭐, 이크종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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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엄청 내 속이 황폐하던 옛날 그 시절에 TV가 없었다면 지금 난 어떻게 됐을까? 새벽에 캔맥주를 따서 볼륨을 한껏 줄인 채 불꺼진 거실에서 늦도록 TV를 보며 마음을 달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퇴근하고 와 동거녀가 없으면 무조건 TV부터 튼다(라디오와 또 달라요). 그러면 마치 식구가 있는 것만 같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나의 애인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해야 될 때면 꼭, 볼륨을 낮춘 TV를 틀어둔다고 한다. 나는 그 점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