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동안 나는 아주 많이 바빴다. 주로 남의 말을 듣거나 남의 글을 읽거나 남의 얘기를 남에게 전해주는 일이었다. 일을 정리하고 나면 늘 그렇듯이, 내가 아는 단어는 다 써버린 것 같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볼품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에 돌돌돌 소리를 내며 굴러다닌다. 설상가상으로 이 단어들을 어떤 순서로 연결해야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노트북의 먼지를 털고 서재에 들어와 오래간만에 여기저기 참견하기로 작정했는데, 이 집 저 집 기웃거려보니 다들 참 안녕하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다들, 어휘는 산술급수로 늘고 그 조합으로 인한 아름다운 문장은 기하급수로 느셨다. 입이 딱 벌어지게 똑똑하거나, 눈부시게 아름답거나, 진저리 치게 찐득거리거나, 못 견디게 귀엽거나, 다들. 영혼까지 너덜너덜해진 나는 정말이지 부럽고 서러워서 콱 울어버릴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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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동거녀가 끓여 놓은 (네꼬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무국을 먹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출근을 하기가 싫었다. 메신저로 "언니, 나 출근 안 하고 두 시간 있다가 한번 더 먹고 싶었어. 사람들이 저마다 보온병에 소고기무국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시는 문화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입은 아직도 그 맛을 그리워해"라고 했더니 동거녀는 "그것 참 절절한 표현이다"라고 답을 보내왔다. 그럴 거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진심이니까. 진심은 그렇게 눈에 보이게 마련이니까. 그러다가 며칠 전에 읽은 아주 좋은 소설이 생각났다.
나는 아주 좋은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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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소재, 신묘한 기법, 시끄러운 대화, 야단스러운 여행, 과도한 자의식.... 이 난무하는 '요즘' 소설에 물렸다면, 또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소설의 미래라고 믿고 있다면 꼭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아마 대부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만 꼭 끝까지 읽어야 한다. 어떤 것이 소설이 되는가, 혹은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쓰는가,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읽는 동안도 그렇지만 책을 덮은 뒤 지금까지도 내내 이 소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다. 잔잔하고 따뜻한 물결이 가만가만 내 얼굴을 어루만져준다. 특히「달빛 고양이」(응? 그러고 보니 고양이가 있었네)가 나는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작가 스스로가 따뜻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소설이다. 작가 스스로가 착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작가 스스로가 능청맞지 않고서야, 작가 스스로가 독자에게 손을 뻗어 아픈 배를 문질러주려하지 않고서야. 계획과 틈새를 노린 취재와 야심만으로는 이런 소설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낫다. 내 비록 단어는 많이 잊었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고양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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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떠들썩한 모임을 갖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여행을 갔는데, 올해에는 아무 준비를 못 했다.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말해준다는 '어바웃 어 보이' 영화 속의 대사를 안 들었어야 하는 건데.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걱정이 된다. 그래서 나는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꺼내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건 꽤 두꺼운 책이고,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려면 시간이 많이 드는데다가, 또 나는 워낙 책을 읽는 데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 이 책만 읽을 게 아니고 이 책 저 책 기웃대며 해찰을 부릴 거니까, 어렵지 않게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이 책을 붙잡고 있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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