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인 최영의는 소와 싸울 때 '너 소야? 나 최영의야!' 라고 말하고 나서, 한 손으로 소의 뿔을 잡고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난타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넘버 3>에서 송강호가 한 말이다. 그런데 소는 그렇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 책은 그렇게 '잡으면' 안 된다. '너 책이야? 나 독자야!' 하고 집히는 대로 읽는 일은 난독亂讀이요, 페티시fetish이다. 좋은 독서가 되려면 '나는 왜 이 책을 읽는가?'라는 강한 동기 부여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두 권의 책은 난독이거나 페티시가 아니라면, 또 다른 독서질병讀書疾病인 관음증에 가깝다. - p.178,『장정일의 독서일기 7』

- 본문의 '두 권의 책'은 앨리노어 허먼『왕의 정부』, 마거릿 크로스랜드『권력과 욕망』
-『독서일기7』은 기존 범우사에서 랜덤하우스로 출판사가 바뀌었다.

인용한 글은 마침 책을 쇼핑하듯 읽지 말아야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좀 더 집중해야지, 반성하던 시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던 문단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출간을 접하자마자 바로 주문한『장정일의 독서일기 7』은 인쇄일이 10일로 찍혀 있다. 책을 주문한 것은 12일이었으니 이 정도면 장정일의 팬이라고 해야 하나.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서평가 장정일의 팬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장정일의 독서 리스트를 '매우' 신뢰하는 편이다. 이를 테면 국내의 모든 번역본 중 민음사의『호밀밭의 파수꾼』이 가장 좋았다는 얘기에(독서일기 7) 안심했고, 자기네 언어로『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수 있는 중국인이 부럽다고 하는(독서일기 5) 부분에선 생각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느꼈다. 또한 아마도 그의 독서일기 시리즈에 가장 자주 등장했을『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경우,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전반 30여 페이지쯤 읽었을 때 책을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온라인 세상의 확장으로 타인과 만나는 것이 쉬워진 요즘, 비슷한 취향을 발견하면 우선은 반가움을 느끼게 되고 그 반가움은 내처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고작해야 같은 소설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는(『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이른바 문화소비의 세대가 아닌가. 이건 책도 마찬가지. 
사실 새로운 책을 만나는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매우 비슷한 데가 있어서 거의 대부분 첫 한 문장, 혹은 앞 몇 페이지에서 그 만남이 즐거울 것인가 악몽이 될 것인가 결판이 난다. 

언젠가 저녁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내 책 치고는, 꽤 많이 상한 이유로 눈에 띈『장정일의 독서일기』는(이 책은, 아마 출간 당시만 해도 연작 계획이 아니었던지 '1'이라는 숫자가 빠져 있다), 책이 왜 이렇게 상한 거지, 이리 저리 들추다가 공지영 작가 소설에 관한 저자의 감상에 공감을 느끼면서 정리는 이미 뒷전이고 기어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게 했다. - 실제로 소설이 아닌 이런 류의 책들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서대로 읽기보다는 틈틈이 넘겨서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공지영의《고등어》(웅진출판, 1994)를 읽다.
(중략…)일전에《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같은 작가의 소설을 두고 한 평론가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우스운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말했고 나는 관습과 역할 그리고 더 나아가 상징과 신화에 도전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의사 페미니즘은 TV를 통해(연속극) 매일, 아침 저녁으로 쉴새 없이 반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평론가는 페미니즘적 수준 성취는 물론이고《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이라는 나의 불평마저 접수하길 거부했다. 자신은 그런 문장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고등어》를 읽으며 나는 불평을 넘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앞서의 '형편없는 수준' 운운 하는 대목은 상당 부분 작가의 오문과 악문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 한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사회통념에 반하는 소설을 저작, 출판했다는 명목으로 감옥까지 갔다 온 주홍글씨가 붙은 불온한 작가 장정일과 국내 여성작가들 중 단연 베스트셀러 작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작가 공지영. 하지만 장정일은 그 스스로 작가인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거대한 독서량을 비축한 한 사람의 독자 혹은 서평가가 아닌가. 좋은 글을 쓰는 것과 좋은 비평을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작가 공지영이 독자 장정일의 지적에 한 번쯤 주의를 기울여주길 바란다면 오지랖 넓은 것이 될까.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면서 더 이상 자필 기록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기 전까지만 해도 책을 사면 책 표지 안쪽에 구입 날짜와 간단한 메모를 하던 때가 있었다.『장정일의 독서일기』표지 안쪽에는 '96년. 3.21. 거듭남을 위해'라고 씌어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메모를 했는지 지금은 물론 기억에 없다.

장정일의 독서량은 알려진 것처럼 한 마디로 거대(!)하다. 한 개인이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졸 학력이라는 드문 이력을 가진 소설가 장정일은 제도권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한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아니 감히 그런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내게 교육의 허와 실을 되짚어 보게 하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장정일의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다음 소설을 기다려 본 일도 없고 이미 읽은 소설도 왜 읽었을까 후회했다. 그러니 나는 소설가 장정일의 팬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평론가가 되고 싶었다던 독자 장정일은 매우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과 평론 가운데쯤 걸쳐져 있는 그의 독서일기를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다음 독서일기를 기다리게 된다.
(여담이지만)그의 소설은『아담이 눈뜰때』『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내게 거짓말을 해봐』등을 읽었는데 단짝 친구K의 언니의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이 이 소설들이었다. 당시 꽤나 자극적이고 민감한 내용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몰고 다녔던 그의 소설을 K와 나는 금기를 엿보는 심리라고 할까, 다소 불온한 동기로 읽었는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그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 혼자만의 자아도취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밖의 기타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 몇 편 안 되는 소설로 장정일이 우리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분명하다.
결국 작가 장정일과 독자 장정일에 대한 내 호오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청준에게 실망한 것은 아니다. 평소에 당신을 싫어했으니까. 그런데 묻고 싶다. 당신을 4.19세대라고도 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가라고도 하는데, 잠든 어린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넣는 애비는 마땅히 그 ㅈㄷㄱㄹ를 잘라 씹어버려야 하지 않나? - p.60,『장정일의 독서일기 5』

이처럼 영화《서편제》의 원작 소설과 원작 작가인 이청준을 싫어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독자 장정일은, 정작 자기가 쓴 소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정일은『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내 심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내가 쓴 모든 작품의 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헤아리셨을 테지만, 이걸 쓰면서 무척 괴로웠다. 사회적 통념과 작가의 상상력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가 너무 커서 자아분열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두 절벽 사이에 내 몸으로 다리를 놓는 것만 같았다. 두 발은 이쪽에 두 손과 머리는 반대켠에. 하지만 그 괴로움과 찢김이 바로 작가가 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작가가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 p. 171, 계간지『리뷰』(96. 겨울호)

요즘 국내소설을 읽다보면 작가만큼이나 자질을 제대로 갖춘 평론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너무 일찍 간 故김현의 자리가 새삼 참 아쉽다.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 p.176,『장정일의 독서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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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0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작가는 '아담이 눈뜰때'만 아주 어릴때 읽어본적이 있어서 이렇게 서평을 잘? 하시는 분인줄 몰랐네요^^ 아낙네님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5   좋아요 0 | URL
엄밀하게 말하면 서평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독서감상에 가깝다고 할까요, 글에서 쏟아지는 작가의 직접적인 표현이나 주관적인 감상이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이 있어 저는 참 재미있게 읽는 독서기예요. ^^
 

쇼타임(미국)에서 제작한 미드《튜더스》1시즌 열 편 중 2편까지 봤을 때, 도서관에 갔다가 마침『천일의 스캔들』을 발견하고 대출하면서 도중에 책을 읽고 다시 드라마를 보는 뒤죽박죽 순서가 됐다. 소설은 역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고 아무래도 시각적 효과가 돋보이는 드라마 쪽이 역사 고증에 더 충실하다는 느낌이 든다. 참고로 소설과 드라마는 같은 인물, 같은 배경을 다룬다는 것 외에는 아무 연관이 없다.

소설『천일의 스캔들1,2』(개정전 제목은 <천일의 앤 불린>)은 메리 불린과 앤 불린 자매가 주축인 소설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메리 불린은 헨리8세의 애인이었고, 앤 불린은 헨리8세가 아라곤의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성공회를 만드는 동기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대개 앤의 언니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에서는 동생으로 등장하는 메리가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이 소설의 장점은 분량이 꽤 됨에도 만 이틀을 넘기지 않고 금방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소설임을 감안, 연대별로 큰 줄기를 따라가면 당시의 시대 상황과 흐름을 쉽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Farewell My Love'는 국내에선 영화와 동명의 제목인 '천일의 앤'으로 알려진 ost  곡인데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한편 언제 어디서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옛날 영화《천일의 앤》에 등장했던 앤은 막연하나마 절대 권력자에 의해 연인과 억지로 헤어지고 왕의 여자가 되는 비운의 여인으로 기억에 남아있는데《튜더스》에서 다시 만난 앤은 한마디로 장희빈스럽다고 해야 할까...  

 

《튜더스》시즌 1은 울지 추기경의 사망까지 내용이 전개된다. 이후 시즌은 아마 헨리8세의 반복되는 이혼과 재혼, 블러디 메리(Bloody Mary)를 거쳐 엘리자베스1세의 얘기까지 내용이 진행되지 않을까 싶지만《로마Rome》가 시즌2를 끝으로 제작비 문제로 더이상 제작하지 않는다는 걸 보면《튜더스》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며느리도 모를듯...

주인공 헨리8세 역을 맡은 조나단의 인기가 매우 높은데 나는 '예쁘면(혹은 잘 생기면) 다 용서가 되는' 너그러운 인간이 못 돼서 나쁜 놈은 아무리 멋있어도, 물론 아깝기는 하지만, 그냥 나쁜 놈으로만 보인다. 앤 불린 역시 마찬가지. 사실 권선징악 지지자인 나는 동정받는 악인이라는 캐릭터에 공감하지 않는다.

역사가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우연히, 정말 우연히 일어나지만 그중 드물게 우연이 필연을 낳고 바로 그 필연이 거대한 세계 지도의 조각을 맞추기 때문이지 않을까. 요컨데,
헨리8세는 어려서 형이 요절하는 걸 지켜봤고, 절대 군주가 되었지만 기다리는 아들은 태어나지 않고, 왕비의 시녀 앤이 눈에 띄고, 앤은 정부가 아닌 왕비가 되기를 원하고, 앤은 울지 추기경과 사이가 나쁘고, 카톨릭은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때마침 루터에 의한 신교가 유럽에 확산되고 있었고, 헨리8세는 결국 로마교황청에 등을 돌리고 성공회를 열고, 왕비와 이혼함과 동시에 앤과 결혼하고, 앤에게서 딸 하나를 얻고, 훗날 앤의 딸은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 정치적/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루는 엘리자베스1세가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셰익스피어같은 당대의 문인이 등장하고, 영국이 해상을 장악하고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 것 모두 엘리자베스1세 시절이다.

여섯 명의 아내들 중 두 명은 참수형시키고, 한 명은 아들을 낳았으나 출산 직후 산후욕으로 사망, 두 명은 이혼, 왕이 먼저 사망한 덕에 살아 남은 운좋은 마지막 한 명까지... 해서 잔혹 동화 '푸른 수염'의 모델이기도 한 헨리8세는 알려진대로 사생활이 무척이나 복잡하고 난삽하다. 하지만 통치자로서는, 비록 이혼이 목적이었다고는 하나, 면죄부 판매 등으로 부정부패가 정점에 달했던 당시 로마 교황청과 결별, 영국 국교 성공회를 일으키고, 통치기간 중 부국강병을 실현했으며, '지식이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스스로 지성인이면서 지식을 장려하고, 또한 젊었을 땐 유럽에서 가장 잘 생긴 왕자로 인기가 높았다고 하니 그놈의 아들 타령만 아니었으면 참으로 바람직했을 인물이 아닌가 싶다.

헨리8세의 여러 번의 결혼 중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아들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왕비가 예뻤으면 했다는 욕심 많은 헨리8세. 가히 판타지에 가까운 초상화 기술을 믿지 못해 네 번째 결혼 상대자인 독일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 앤(클레브의 앤)을 결혼 전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클레브스 집안의 강한 반발에 결국 결혼식 당일에서야 왕비의 얼굴을 보게 되는데, 넙적한 얼굴에 또 거구였던 신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는 얘기에 이르면 이 대단한 왕이 귀엽기까지 하다. 결국 네 번째 왕비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무시 당하다 7개월 만에 이혼을 당했다고 하니, 그래도 죽음은 면했으니 바꿔 말하면 역시 미인박명인 걸까 싶기도 하고.

헨리8세를 비롯 앤 불린, 메리 여왕, 엘리자베스1세까지 인물들 자체가 워낙 강렬한 데다 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보니 아무래도 드라마를 볼 때도 인물에 치중하게 된다. 하지만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시점에서 헨리8세 때부터 시작된 튜더 왕조 인물들을 둘러싼 구교와 신교의 대리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유의하면서 봐도 재미있다. - 물론 재미를 담보해야 하는 미디어의 특성(=허구성)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앤 불린의 딸이자 영국의 부흥기를 이끈 엘리자베스1세의 얘기를 다룬 영화로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한《엘리자베스'Elizabeth', 1998》와《더 골든 에이지The Golden age》가 있다. 전자가 여왕으로 등극되기까지의 내용이라면 후자는 이후 45년의 통치 기간을 다룬다. 여담이지만《더 골든 에이지》는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무엇보다도 픽션이 지나치다.
 

이 시대 혹은 이런 배경에 관심이 있다면 역시 구교와 신교의 극한 대립으로 벌어진 1572년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사건이 배경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여왕 마고Quees Margot』(이자벨 아자니, 다니엘 오떼이유, 벵상 뻬레 등)도 볼 만하다.
참고로 여왕 마고는 엘리자베스1세와 대립각을 세웠던 비운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시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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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마흔 세 번이나 해지는 걸 봤지."
그리고 조금 후에 너는 덧붙여 말했다.
"그런 거 알아요? ……아주 서글퍼지면 해지는 게 보고 싶거든요……"
"마흔 세 번을 본 날 그럼 너는 그토록 슬펐단 말이냐?"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 pp.27-28『어린왕자』, 김 현 옮김 / 출간일. 1991,04(중판, 초판: 1973), 문장


- 내가 가지고 있는『어린왕자』는 정가가 1,500원이다. 예전 책을 보게 되면 무엇보다도 책 값이 정말 많이 올랐구나, 놀란다.
-『어린왕자』는 (故)김 현의 번역을 최고로 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H의 언니로부터였다. H의 언니는 불어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현지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검색을 해보니 김 현의 번역본이 보이질 않는다.
- 같은 책을 다독 하지 않는 독서 습관을 가진 나로서는 이례적으로 꽤 여러 번 읽었던 이 얇은 소설은, 굳이 시기를 나누면 어렸을 때는 별나라의 모험담 정도로 읽었던 것 같다. 두번째 읽었을 때(이십대 초반)는 세간의 "어쩌구저쩌구~"에 동승하여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소설 속 함축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치기어린 자세로 읽었던 것 같고(가장 안 좋은 독서 행태) 그리고 바로 오늘 오전,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손에 잡힌『어린 왕자』를 다시 읽는데, 이 소설이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소설이었던가ㅡ 했다. 발췌한 부분은, 특히 굵은 구절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던 장면.
- 들쭉날쭉한 문장 부호와 동시대성이 다소 떨어지는 어휘가 새삼 눈에 띈 김에, 양장에 새로운 활자체에 종이질도 더 좋은 김화영 교수님의 새 번역본을 살까 싶어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다. 하지만 미리보기로 잠깐 내용을 보고 일단 보류.『어린 왕자』는 故김현의 번역본이 가장 낫다고들 하는데 정말 제일 뛰어나서인지 아니면 오래 되어 내 눈에 익숙해진 탓인지 하여튼 낡고 오래된 이 책이 더 맘에 든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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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 대하소설과 관련된 얘기는 이미 시중에 차고 넘치므로 이 부분은 생략하고,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만 정리

1.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한강』을 연이어 읽는 동안 꽤 자주 떠올랐던 '남자의 논리'. 신문 연재글의 특징인지 특정 에피소드에서는 여지없이 남성적인 본위(本位)가 강하게 드러난다.

2. 역사를 올바로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자본주의가 팽창하고 물질의 가치가 중요하게 된 베이비붐 이후의 세대일수록 자기 안의 중심을 잡는 일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아는 것은 개인의 중심을 잡는데 가장 큰 무형의 자산이다. 정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가치 있는 투자(=역사 바로 알기)를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3.『한강』을 두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주인공이 없어 글이 산만하며, 그래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작가의 첫번째 대하소설 『태백산맥』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가끔 본다.『태백산맥』과『한강』은 읽는 관점을 달리 해야 한다.『한강』은 세태소설, 연대기에 가깝다.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독자에게 얘기를 전달하는 역할로만 읽히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한 예로 유일민, 유일표 형제는 다른 여느 인물들처럼 분단이 낳은 연좌제의 가장 큰 피해자로만 읽혀야 마땅하다.

4. 소설을 읽고 소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해방전후사의 인식』, 일명 '해전사'를 읽어봐도 좋겠다. 비슷한 제목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역사를 보는 저술의 관점이 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하소설은 시작했을 때 한참에 몰아서 같이 읽는 것이 좋은데 어쩌다『아리랑』혼자 뒤처진 것이 아쉽다. 

- 조정래 대하소설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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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스》는 '~시즌4초반', 《24》는 '~시즌6'입니다

괴팍한 의사 하우스가 주인공인 미드《하우스 House》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편견이 없는 하우스와 편견이 가득한 그의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윌슨은 위선자
포어맨은 자신이 나쁜 걸 숨기지 않는 처세에 능한 자
체이스는 자신이 나쁜 걸 (다들 아는데) 안 그런 척 하는 어설픈 애송이
캐머런은 순진한 이상주의를 고수하는 답순이
커디는 적당히 계산적이고 적당히 인간적인 타협적인 상사 

쯤 되겠다. 그래서   

하우스는, 윌슨의 위선을 증명하는 것에 열심이고,
포어맨에겐 대놓고 비아냥대고,
체이스는 어린애 다루듯 하고,
캐머런을 포어맨처럼 만드려는 검은 야심을 가지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하우스가 커디를 좋아하는 건 당연해보인다.

미드《24》와《하우스 House》를 즐겨 보는 이유 중에는 잭 바우어와 그레고리 하우스 두 사람의 역할이 크다. 이 두 사람의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그들이 창의적인 중간 관리자라는 점이다.
조직의 명령 체계는 대개가 '상급 경영자 -> 중간 관리자 -> 하부 조직원' 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주인이 출타를 하면서 하인 둘에게 각자 돈을 맡긴다. 주인이 없는 동안 하인A는 돈을 땅 속에 묻어 두고, 하인B는 돈을 굴려서 두 배로 불려 놓는다. 돌아온 주인은 하인A는 꾸짖고 하인B는 칭찬을 한다. 그러자 돈을 안전하게 잘 관리한 것이 왜 잘못이냐고 항의하는 하인A에게 주인은 쓸모 없이 땅에 묻어 두기만 한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일 것)
상부의 명령을 받는 중간관리자는 명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이를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하면,  

1번, 시키는 것만 잘 한다.
2번,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한다.
3번, 시키는 것 이상을 해낸다.

가 되겠다. 잭 바우어와 닥터 하우스가 기존 규칙을 무시하고, 상부의 명령에 맞서고, 하부 조직원들에게 (하극상에 준하는)무리한 명령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3번, 즉 하인B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3번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강점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기 의사 실현에 있다. 실제로 중간 관리자는 상부의 의사 결정 과정에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한 위치에 있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능력있는 인물에겐 기회로 작용하지만 반대로 능력이 없는 인물에겐 막중한 부담이 된다. 

《24》시즌 6에서 CTU 요원 나디아는 사고 직후 얼떨결에 팀장을 맡는데 불운하게도 나디아는 1번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왜 불운인고 하니 시키는 것은 잘 하지만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는 창의성은 떨어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번 유형은 부하일 때는 유능하지만 의사 결정권자로서의 능력은 함량 미달인 경우가 많다. 결국 매번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지 못 하는 나디아의 자신감 부족 때문에 1분 1초가 급박한 상황에서 유기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의사 결정이 자꾸만 미루어지고 삐걱거리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진다.
- 주. 물론 여기에는 중동권 국가 출신이라는 그녀의 개인적인 상황이 맞물려 있다. 911 사태 이후 등장한《24시》는 철저하게 미국인에 의한 애국주의에 집중하는 드라마다.
《하우스》의 포어맨의 경우, 포어맨은 우수한 자질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의 판단보다 하우스의 판단을 더 신뢰하는, 즉 책임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하우스의 뒤에 숨는 것으로 그가 아직 3번에 도달하지 못하고 1번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시즌 3의 말미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을 관철시켰지만 불행히도 그 판단이 나쁜 결과를 낳자 그 책임에 눌린 나머지, '하우스 같은 의사는 되기 싫다'는 핑계를 대고 하우스에게서 벗어나는 것으로 탈출구를 찾는 것은 당연한 전개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잭과 하우스는 자신의 판단에 언제나 확신이 있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들로 이러한 자신감은 조직에 맞서 자신의 판단을 밀어붙이는 적극성과 능동성으로 이어진다. 즉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자신감이다.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목적 지향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즉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희생을 끌어내고, 조직 구성원과 반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지만 목적지향적인 그들의 역할은 조직의 운영과 유지가 '성과'에 있다는 이른바 '결과론'과 맞물리면서, 과정은 비록 거칠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옳았음이 증명될 때마다 조직 내 그들의 역할이 더욱 견고해진다. 재미있는 점은, 잭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신뢰를 이용하고(그래서 그는 툭하면 "give u my word" 한다), 하우스는 그의 불편한 다리(=장애)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들은 목적지향적인 인간형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잭이 최고 상급자인 대통령과, 하우스가 최고 상급자인 원장과 직접적인 직통 핫라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잭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하우스가 원인 불명의 병을 앓는 응급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최종 의사 결정권자와 즉각적이고 유기적인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렇듯 비효율적이고 경직된 중간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잭과 하우스는 보다 자유로운 조건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스템이 가능한 건 잭과 하우스가 주인공- 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능력 있는 중간관리자이기 때문이다.
비교하자면 상급자 복(福)은 하우스가 잭보다 훨씬 낫다. 잭은 시즌 5, 6에서 그나마 이상적인 상사 빌을 만나지만 그마저도 파란만장한 빌의 인생역전(!) 덕에 잭의 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 거의 안 보는 편인데 《하우스 House》는 드물게 잘 보고 있는 의학드라마다. 

《24》는, (최근)극장용 액션 영화보다 재미있고 스케일 빵빵하고 긴장감 넘치는 대테러방지단의 액션 드라마로 그 중심에는 잭 바우어가 있다.
그런데 시즌이 거듭될수록 내가 정말 정말 궁금한 것은, 왜 클로이는 안 되냐는 거다. 잭은 왜 클로이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 정도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틀 때도 됐는데. 혹, 클로이가 절세미녀가 아니라서?
잭 바우어야, 그러는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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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0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삼밭에그아낙네님~ 글빨 멋지십니다..차근차근 둘러봐야겠네요^^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0   좋아요 0 | URL
칭찬은 아낙을 춤추게 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