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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 때 전학을 세 번 다녔는데, 이미 어색하고 수줍은 단계를 거치고 서로 익숙해진 아이들 속으로 끼어드는 일은 전학생 아이에게는 인생의 대단한 모험이다. 즉 나로서는 그러한 모험을 세 번이나 한 셈인데 그 때의 영향인지 낯선 곳은 기피하고, 혹 가더라도 본능적으로 불편해하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또한 그 덕분인지 적응력은 나름 강한 편이니 이쯤되면 일장일단인 셈인가 싶기도 하고.
이곳 서재도 마찬가지. 알라딘서점이야 물론 낯익고 친숙한 곳이지만, 알라딘서재는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시행착오가 예상되지만 어쨌든 일단은 열심히 친해져볼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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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책중엔 누구나 다 알지만 의외로 읽은 이는 별로 없는 책이 있다.『삼국지』가 바로 그런 책이다.
나 역시『삼국지』에 등장한 많은 인물들의 면면은 물론이고 그들이 치룬 전투에 대해서도 꽤 제법 알지만 막상 책은 읽지 않았다. 지나치게 잘 아는 이야기는 스스로도 내가 이 책을 읽었나 싶게 익숙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8, 9년쯤 된 것 같다. 당시 내가 제일 재미있게 했던 컴퓨터 게임은 공명전이었다.
공명전은 주인공 공명과 (삼국지의 내용에 의해 간혹 전투에서 빠지기도 하지만)유비, 관우, 장비 기본 옵션에 데리고 있는 군사들 중 필요한 인물들을 골라 조조와 손권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전형적인 롤플레잉 게임인데, 게임을 하는 동안 내 군사들 중 가장 레벨이 높은 인물은 단연 조운(자룡)이었다. 내 일방적인 애정을 받은 조운은 역사의 주인공들인 유비, 관우, 장비보다도 더 레벨이 높았고 매 전투마다 발군의 전투력을 발휘, 승전보를 올렸다.
그렇다고 편애하는 장군을 계속 내보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조조나 손권 같은 적장들의 레벨은 당연히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전투를 봐가면서 맞붙여야지 안 그러면 애꿎은 장수만 잃는다. -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게임을 넘기면 다시 살아난다
즉 나관중의『삼국지연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삼국지』의 내용을 꿰고 있으면 전투에서 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적벽전을 치를 때 조조에게 관우를 맞붙이면 전투를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끝낼 수 있다. 한편으론 관우가 조조에게 진 빚을 잊지 못하고 조조를 놓아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관우 넌 이번 적벽전투에선 제발 빠져!' 해봤자 소용 없다. 역사를 바꿀 순 없으므로 싫든 좋든 관우를 적벽전에 내보내야 한다. 각설하고...

지난 달에『삼국지』를 모태로 하는 영화 두 편,《삼국지 : 용(龍)의 부활》과《적벽대전 1부》를 봤다.

먼저《삼국지 : 용의 부활》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봤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조운이었다. 제목의 '용'이란 조운의 자인 '자룡'을 뜻했던 것.
영화의 문제점이라면, 조운이 명장인 건 분명하나 그래서 삼국지 인물들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인물인 것도 사실이나 그를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충분히 영웅인데 굳이 거기에 신화적인 요소까지 덧입혀야 했는지 영화는 내내 그를 비장하게 몰아댄다. 물론 나는 중국인이 아니므로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정서가 존재하겠으나 한 인물을 영웅으로 조명하는 것과 신화화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적벽대전 1부》
적벽전을 치르기 전까지가 1부 내용이고, 본격적인 적벽전은 2부에서 다룬다. 그런데 주연급 캐스팅 과정의 비화 탓인지 아니면 그것이 원래 감독의 의도였는지 주유(양조위)의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 단지 분량뿐 아니라 2/3 지점이 넘어 가면서부턴 그야말로 주유의, 주유에 의한, 주유를 위한 영화가 되었다. (그냥 '주유전'이라고 해도 됐을 듯...)
연출과 관련, 좀 황당했던 대목도 있다. 공명이 손권과 동맹을 맺기 위한 방편으로 주유를 찾아가는 장면인데, 때마침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있던 주유의 옆으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우아하게 슬로모션으로 날아가는 화면이 나온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감독이 오우삼이었다. (오감독님, 도대체 하얀 비둘기를 얼마나 키우시길래 아직도 비둘기를 날리시는 건가요... --;)
뭐, 어쨌든, 이리하여 이때부터 주유의 말이 난산 끝에 새끼를 낳는 장면도 구경하고, 주유가 공명과 가야금 대결하는 것도 지켜보고, 주유의 집 처마에서 예쁘게 슬프게 비장하게 떨어지는 낙숫물을 보며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부러워하다 보니 어느새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아, 이제 좀 볼만하려나 했더니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조조의 십만군을 주유와 공명이 사이좋게 내려다 보면서 1부가 끝나버렸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영화《삼국지》두 편을 보면서도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원래 어중간하게 알면 궁금한 것도 많은 법. 하여 내 주변에서 유일하게『삼국지』를 읽은 M군에게 계속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었더니만 어지간히 귀찮았던 모양이다. 일주일 뒤에 M군으로부터 택배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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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가 세인트 제임스 홀의 만원을 이룬 청중 앞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큰 소리로 낭독했을 때 그의 심장 박동은 72에서 124까지 치솟았다. 당연한 일이다. 우선 그는 페이긴이 되었다. 측면에 날개처럼 붙은 청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친구 찰스 켄트는 그 몇 분간 디킨스가 “악마의 화신” 같았다고 전한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차양을 친 듯한 눈썹은 무시무시한 파충류의 더듬이처럼 움직였고, 반쯤은 여우같기도 하고 반쯤은 독수리 같기도 한 그의 모습 전체가 굶주린 맹수처럼 사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파충류, 포유류, 조류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려면 누구라도 맥박이 빨라졌을 것이다.) 이어 디킨스는 책의 여백에 써놓은 무대 지시 사항(“몸을 부르르 떤다… 공포에 질려 주위를 돌아본다… 살인이 다가온다.”)을 흘끗 본 뒤에, 빌 사이크스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그는 낸시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빌, 오, 빌.” 그녀는 자신의 피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디킨스는 낸시를 몽둥이로 때리고 사이크스의 목을 매단 뒤에는 무대 밖의 소파에 엎어져 10분 동안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 p.147,「낭독의 쾌감」 

 

앤 패디먼의 에세이『서재 결혼 시키기』의 미덕은, 같은 활자중독자로서 작가에게서 유사한 경험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서 오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트루먼 카포티의 자전적 소설『인 콜드 블러드』가 원작인 영화《카포티》에도 문제의 ‘낭독’ 장면이 나온다. 카포티는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업도 했는데 당시엔 출판 전후에 홍보를 겸한 자신의 책을 낭독하는 행사가 일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낭독’에 대한 부분은 온다 리쿠의 장편『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에서도 잠깐 언급되는데, 작가는 읽는 책이 보는 책이 된 디지털 세대인 지금의 다음 세대쯤에 이르면 아마 다시 ‘듣는 낭독’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라고 자신의 견해를 살짝 내비친다. - 사족이지만,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 타고' 이다. 단어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도 그 느낌이 참 다르다. 왜 쓸데없이 제목을 잘라 버렸을까 궁금한 대목.

나도 낭독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주로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한다. 대부분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혹은 반대로 너무 싫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 낭독을 하는데 내 낭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 하던 친구가 유학을 간 후로, 지금은 M군이 내 낭독의 대상을 도맡아 한다. 처음엔 전화기를 붙들고 M군에게 그 책을 꼭 읽어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다가 급기야 M군이 ‘문제의 책’을 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내 성급함이 전화선을 타고 ‘낭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M군, 처음엔 잘 들어주는 것 같더니 차츰 귀찮아하다가 나중엔 들어주는 척만 하다가, ‘척’하면 한 번 들을 걸 두 번 듣게 된다는 걸 경험한 후에는 이젠 제법 성의있게 들어주고 촌평도 해준다(하지만 여전히 귀찮아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내가 낭독자로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사실 내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이다 보니 ‘낭독’하기에 이르면 스스로 알아서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낭독 전에 자연히 사설이 길어지게 되는데, 전화기 저쪽에서 내 이런 사설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M군이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한다. 

“다 감안해서 들으니까 그냥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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