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이라는 것을 읽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활자 중독증'이라고 생각했다.
영상이 주는 빠르고 쉽고 자극적인 세계에 재미를 붙인 후에도 그런 생각은 여전했다. 사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쉽게 익숙해지는 반면 한 번 익숙해진 것은 무의식의 어딘가에 체화된 채로 스스로 지속되는 관성이 있기 마련이라서 그것을 잊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활자'에 중독되어 있었다.
언젠가 우리말, 우리글이 없는 낯선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을 때였다. 그때 내가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 활자였고 언어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서 나는 학교 화장실에 놓여 있던 학교 신문, 수업 때 나눠주던 열람표는 물론이고 과자 포장지 뒤에 있는 성분 표시까지도 모두 닥치는대로 챙겨와서는 감동하면서 읽곤 했다. 집을 떠날 때 제일 먼저 챙기는 것도 책이었고 어딘가 낯선 공간에 남게 되었을 때 찾는 것도 '글자가 있는 무언가'였다.
얀 마텔의『파이 이야기』에서, 파이가 227일 간을 태평양 위에서 떠돌다 마침내 문명 사회로 돌아와서 묵었던 호텔에서 읽을 거리, '성경'을 발견하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성경을 세계의 모든 호텔에 비치하는 운동 기구》에 매달 후원금을 보내리라고 결심하는 부분에선 저절로 "맞아, 맞아!" 했다.
예전에 공기를 마시듯 읽어 냈던 독서가 이제 양적으로는 줄어들기는 했지만 보다 진지해지고 집중력이 늘었다. 다시 읽는 고전이 더 재미있어진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요즘들어 TV가 부쩍 재미 없어진 것도 매체가 처한 환경적 혹은 시스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이런 '독서의 변화'와도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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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거리가 책읽기에 편중되었던,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발하게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서(良書)와 함께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부모님께 늘 감사하다.
나는 아직까지도 최고의 연애 소설은,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고 믿는다.
고백하자면 처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을 떨리게 하고 내 정서를 건드렸던 것은 제정러시아의 전후사를 관통하는 이념이나 휴머니즘, 시대적인 고찰 같은 심오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미친듯이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국의 배경과 함께 펼쳐지는 불륜과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삼각관계였다.
그러나 이들 소설이 그저 전쟁통에 귀족들이 연애하고, 불륜을 벌이고, 방탕한 귀족과 매춘부의 신분을 넘나드는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면 톨스토이 사후 1세기가 다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은 그의 소설을 읽어 볼 기회조차 갖지 못 했을 것이다.
이것이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고전의 힘일까.
동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시대를 통찰하고 관조하려고 노력했던 작가의 시선은 시대의 통속 안에 머무르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생한다. 이러한 자생력이야말로 고전 문학의 힘이고 통속 소설과 고전 소설을 가르는 차이일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문학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시선으로 사물을 조명하면서 기나긴 숨결의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나 자신의 모든 구상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 - 레프 톨스토이, 『부활』집필 중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톨스토이의 러시아는 내게 냉전 체제 역사 속 소련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소설이 가져다 준 상상속에서 존재했던 한 세기 전의 설원으로 뒤덮인 광활하고 거대한 시베리아 대륙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또한 그때의 정서적 울림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영화 《Eyes wide shut》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이(내겐 그랬다) 숨 쉴 틈도 없이 곧장 까만 화면으로 바뀌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위로 흐르던 『Second Waltz』는 이후 국내 영화, 드라마 등에 삽입되면서 이제 우리나라에선 완전히 대중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국내에서 쇼스타코비치의 『Second Waltz』를 들을 수 있는 앨범중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앨범은 아마 Chailly와 Jansons가 지휘를 맡은 앨범이 아닐까 싶다.


Decca에서 발매된 Riccardo Chailly의 『Shostakovich The Jazz Album』은(개인적으로 중간 두 곡 정도 늘 스킵하는 곡이 있지만) Jazz suit 1, 2번 전곡이 들어있다. 전반적인 곡들이 모두 즐기기에 부담없고 무난한 레퍼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Second Waltz는 이 앨범의 13번 트랙에 있다.

Chailly가 가볍다면 Jansons는 진지하다. Second Waltz를 좀 더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EMI에서 발매된 Mariss Jansons의 『Symphony No.11, ‘1905’』를 추천한다. 이 앨범에는 11번 심포니말고도 Jazz suit 1번 전곡과, suit 2번 중 6번이 수록되어 있는데 Second Waltz(6번)는 8번 트랙에 있다. Chailly와 비교해서 들어보면 지휘자의 해석이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다.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은 Chailly에 비해 Jansons의 지휘가 훨씬 응집력이 있고 웅장한 힘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그 차갑고 서늘한 대륙처럼.

전혜린은 유고 에세이『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5번을 즐겨듣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때 틀어 놓은 판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제5번이다. 왜 그런지 그걸 듣고 있으면 생각이 정돈되어오는 것 같다. 특히 무언지 웅장하고 엄숙한 시작과 도중의 수많은 군화의 행진 같은 장조가 몹시 마음에 든다. 개인적인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서 더 큰길로 눈을 돌리라고 이 음악은 말해주는 것만 같다(…). - pp.169-170,『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대목을 읽고 언젠가 쇼스타코비치의 15개의 심포니를 꼭 다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앨리스와 빌리, 쇼스타코비치, 전혜린...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원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 p.140,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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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의 장난인가 싶게 지속적인 우연과 마주칠 때가 있다.
말하자면 올 4월, 바틀비(Bartleby)가 그랬다.

지난 달(3월)에 창비세계문학전집에서 우연히 바틀비를 만난 이후,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바틀비가 어쩜 그렇게도 자주 내 앞에 나타나는지, 정말이지 H.멜빌의 바틀비는 너무 자주 그리고 아무 데서나 나타났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들뢰즈의『비평과 진단』은 물론, 부산 어느 서점에서 산『모든 기다림의 순간...』에서도, 절판으로 못 구했다가 뒤늦게 구매한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도 불쑥 나타나더니, 전혀 상관없는 검색어를 치고 찾아 들어간 어느 개인 홈에서마저 바틀비다. 그러니 이쯤 되면 웃을 수밖에.

예시나 조짐이었던 걸까.
4월은, 잔인한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것과 연속으로 마주쳐야 하는 낯설고 불편한 경험 때문에 정신적으로 긴장상태인 날이 많아서 힘들었던 달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구체적으로, 이제까지와 달리 "I would prefer not to-"를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고, 싫은 사람은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불편한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으며, 불편한 일을 할 필요도 없으며, 불편한 사람과 마주 볼 일도 없이 살았으니 낯선 상황들이 당연히 힘들밖에.
그리고 새삼 생각한다. 바틀비. 좁은 공간에서 아무 것도 없는 회백색 벽만 바라보며 "I would prefer not to-"만 반복할 때 바틀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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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독서』는 일종의 베스트셀러 감상기인데 이 책을 읽기 전에 많이 망설였던 것은, 저자가 일본인인 이 책 목차의 거의 전부가 일본 작가가 쓴 일본내 베스트셀러로(1999-2001)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디선가 주워 읽은 이 책의 서평이 워낙 재미있었기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했다. 그러니까 구입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먼저 읽어 보는, 나름의 검증 시스템에 이 책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책을 읽은 소감은 "아, 정말 재미있다!"
책을 읽기 전에 망설였던 이유는 책을 읽고 나서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그 동안 내가 읽은 일본인 작가 중에 이 작가만큼 글을 재미있게, 맛깔나게 쓰는 작가는 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치사는 작가가 아니라 번역자에게 돌려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장마다 펼쳐지는 작가의 육성이 박장대소하게 재미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며칠 전 시부야역 근처에서 야식을 먹고 있을 때 생긴 일이다. 옆자리에 대학생이나 전문대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앉았다. "셰익스피어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군. 셰익스피어가 어쨌다고?
"……누구더라?"
셰익스피어가 누구더라! 라는 말만 들어도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질문을 받은 학생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글쎄. 들어본 이름인데.:"
"유명인이라는데, 영 이미지가 안 떠오른단 말이야."
"그러네.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 누구인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랴.
아마도 그들은 개봉 중인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포스터를 본 게 아닐까(설마 영화를 보고나서 나누는 얘기는 아니겠지). - p.32,『취미는 독서』

이쯤에서 확인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냉큼 M군에게 전화했다.
"셰익스피어(라고) 아나?"
"어."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모르는 M군도 아는 '셰익스피어'인 것이다. 과연 저자의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만 하다.
저자와 나의 생각이 일치할수록 독서가 신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이웃나라 일본도 미국도 베스트셀러 기준이 백만 부라는 사실이 흥미롭지만, 하여간 베스트셀러에 대한 저자의 정의가 명쾌하다. 이를테면 100만 부 팔리는 책은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사는 책이다.(p.84) 처럼.

『취미는 독서』를 읽게 된 계기도 그렇지만 내 경우 누군가 서평에서 책을 인용한 한 줄 혹은 한 문장에 혹해서 그 책을 읽게 되는 일이 빈번한데, 이틀 전에 주문해서 바로 어제 받은 다니엘 글라타우어의『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 소설의 특이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남녀가 주고 받은 이메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구매 버튼을 누르게 한 문제의 문장은 이것이다.


10분 뒤 Re:
레오, 그만 끝내죠. 당신이야말로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넘어갔어요. 그 질문을 다시 한번 하죠. 레오, 저를 만나고 싶어요? 그렇다면 만나세요! 아니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혹은 이 관계를 지속하기는 할 것인지, 당신 입장을 얘기해보세요.

20분 뒤 Aw:
어째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글로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건가요?

2분 뒤 Re:
나의 메일 파트너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어요. 구제불능 레오, 어쩌면 제가 가슴 큰 금발 여자일 수도 있잖아요!!!

30초 뒤 Aw:
그렇다고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20초 뒤 Re:
뚫어지게 보시구랴.  - p.117-118,『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이 외에도 오랜만에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었는데 2권과 3권이 그것이다. '독서일기' 시리즈 중 품절-절판으로 구입을 못했던 이 두 권이, 글쎄 그 사이 다시 출간되고 있는 게 아닌가. 얼른 주문, 소파 바로 옆 손을 뻗으면 가장 잘 닿는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후루룩 맛있게 읽은 그의 독서일기는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 다만 3권은 시기가 그래서였겠지만 『내게 거짓말을 해 봐』에 관한 작가의 해제(라고 해야 할지)가 (좀) 지나치다 싶게 등장한다.
그 중 재미있어서 색인을 해두었던 문장을 옮긴다.

(전략)남성 에로시티즘의 분리적 성격과 여성 에로티시즘의 통합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를 들면 이렇다. 남자는 여자가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녀의 직업이 화장실 청소부라 할지라도 상관치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아무리 동하게(?) 생겼다 할지라도 그의 직업이 그렇다면 동침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을 앞에 놓고 남자는 여자의 사회적 지위·계층·신망·명성에 신경 쓰지 않지만, 여자는 그 반대. 남자는 여자의 얼굴, 궁극적으로는 성기만을 향해 돌진하지만('돼지 얼굴 보고 잡아 먹나?'), 여자에게 에로티시즘은 최종적인 고려사항에 불과하다.
남자는 자신의 성행위를 순간적인 도취로 여기지만 여자는 성적도취와 연애를 혼동한다. 남자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만 여자에게는 분리되지 않는다. 하므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나가고자 하며, 남자는 그녀를 밀실에 감추어 두고자 한다.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나가 확인하고 싶어하며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사적인 영역 가운데 보존하려 든다.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시간적/공간적 지속을 원하며 미래를 건설하려고 들지만, 남자는 오히려 현실과 미래를 망각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은 사용한다.(중략)
  - p.122,『장정일의 독서일기 2』

'예쁘기만 하면 되는' 남자의 에로티시즘을 이보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하지만 그의 독서세계는 참 대단하다. 자신의 생각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그것과 부합되는 가장 적확한 단어를 골라내어 말과 글로 완성한다는 건 참으로 부러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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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반납기한을 훌쩍 넘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들.
- 여행길에 한 권을 챙겼으나 내려갈 때와 올라올 때 책갈피가 같은 곳에 끼워진 책.
이는 모두 이번 부산행에 대해 내가 애초에 얼마나 낙관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증거.
상경 다음 날(토요일), 잠시 고민했다.
하루라도 빨리 반납하자. 아니다, 기왕에 늦은 거 그냥 다 읽고 반납하자.
그리하여? 책들은 여전히 방과 서재, 거실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다.

2. 책은, 과연 내게 어떤 의미인가 새삼 생각한다. 눈이 핑핑 돌아가게 정신 없는 와중에도 B의 도움으로 온,오프 서점에서 품절-절판에 들어간 책을 구하는데 성공, 거기에 B가 안겨준 두 권까지 가방에 넣어 낑낑 대며 올라 왔다. 그러고도 모자라 상경 이틀째인 일요일에 지시장과 알라딘에서 정신 없이 책을 주문하고 있다. 이쯤되면 책은 도대체 내게 무엇인가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왼쪽) B에게 받은 두 권.『현대미학강의』(진중권),『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곽아람)
(오른쪽) 품절-절판된 책들.『무어의 마지막 한숨1,2』(살만 루시디),『마일즈의 전쟁』(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신들의 사회』(로저 젤라즈니)
품절 혹은 절판된 책들을 구할 때 내가 마지막으로 구원 요청을 하는 이가 B다. 이번 역시 B의 도움을 받았다.  







곽아람이 먼저였는지, 요네하라 마리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께 내게로 왔다는 거다.
처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노먼 록웰의 '눈에 멍이 든 소녀'(사진). 이 그림은 저자에 의해 '빨강머리 앤'으로 되살아난다. 보너스라고 해야할까, 더욱 좋았던 건 이 책에 최근 읽은 소설 중 내가 가장 열광했던 '필경사 바틀비'도 등장한다는 사실.
추천사에도 있지만『모든 기다림의 순간…』에는 세 가지가 있다. '글, 그림, 글을 읽고 그림을 본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와 소통하는 것이 즐거운 이 책을, 참 아끼면서 읽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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