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엘즈워스-존스 『뱅크시_ 벽 뒤의 남자』




"사람들은 종종 낙서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음, 틀림없이 예술이죠. 그 얼어 죽을 테이트에도 걸려 있잖아요?"


『뱅크시_ 벽 뒤의 남자』


뱅크시의 그래피티에서 느끼는 가장 큰 쾌감은 역시 패러디와 패러독스에 있다. 예전에 M과 '예술을 한다면 뭔가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선구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창작은 어려운 작업이고 선구적인 경향을 끌어내는 프론티어가 되는 건 순전히 '재능'의 영역이다. 세상엔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뱅크시는 명화에 변형을 주는 작업을 곧잘 했다. 이 책의 저자도 언급했지만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 인기가 좋은데 뱅크시의 작업에 국한하면 내 취향은 밀레보단 모네다. 콕 집어 수련 연못에 쇼핑 카트를 처박은 발상이 무척 재미있다. 뱅크시가 붙인 제목도 재미있는데 이를테면 밀레는 '직업소개(Agency job)', 모네는 '쇼 미 더 모네(show me the monet)' 하는 식이다.





(위)『벽 뒤의 남자』 ㅣ (아래)『Wall and Piece』


(아래) 'show me the monet' 왼쪽에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다. 제목 'Sunflowers'옆에 'Petrol station'을 덧붙였는데 뱅크시의 작업물은 보면 볼수록 선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말하지만 '선동'이 아니라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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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ksy 『Wall and Piece』  





표지와 목차






'쥐'가 뱅크시에게 의미가 있는 건지, 그래피티 작업자들에게 의미가 있는지 가끔 궁금하다.

어쨌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쥐가 아닐까 싶은 뱅크스의 쥐(들).

'The human race is the most stupid and unfair kind of race'에서 뱅크시가 인간을 보는 시각을 살짝 엿본 기분이 든다.


이하 책장을 훌훌 넘기다 손이 멈춘 몇 페이지.




Why would someone just paint pictures of revolutionary when you can actually behave like one instead?




I told her 'I'd had an epiphany that night and she told me to stop taking that drug 'cos it's bad for your heart'



뱅크시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웹서핑 중 sns에서 뱅크시의 글을 읽고서였다. 뱅크시의 육성이 궁금해서 원서를 주문하고 며칠을 기다려 마침내 읽은 'when i was eighteen'으로 시작하는 '그날밤의 일화'.




재미있는 우연인데 책을 읽기 며칠 전 S와 차로 이동 중에 이 페이지와 동일한 내용, 이른바 'Brandalism'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고 잠시 정차했을 때의 일이다. 정면 옥외 광고판이 번쩍이는 걸 보다가 갑자기 불만이 터져나왔다. 나는 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데 왜 도로 한복판에서 일방적으로 저 기업의 광고를 봐야 하는 거냐고!





뱅크시가 주목하는 사회담론을 쫓아가다보면 책의 제목인 'Wall'이 중의적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wall'은 뱅크시가 작업을 하는 담벼락일 수도 있고, 팔레스타인을 위협하는 장벽일 수도 있고, 편견과 불평등을 용인하는 인식의 부조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겐 뱅크시의 작업의 시작과 끝이 결국 작가주의처럼 느껴진다. 뱅크시는 저항하는 자일까 자유주의자일까.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처음엔 궁금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려면 어떤가 싶다. 분명한 건 뱅크시의 관심이 늘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거다. 

뱅크시의 그래피티는 변방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주류에 안착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변방에 있다. 변방에서 변방을 얘기하고, 변방에서 주류를 얘기한다. 


“The Bad artists imitate, The Great artists steal

- Picaso


예전에 봤을 땐 별 감흥 없었는데 이제 보니 피카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구나 싶다.



그리고 외전_ 코로나 시대의 뱅크시 (출처.banksy.co.uk)




디테일이 위트가 넘치고 재미있는 작업물이다.

뱅크시가 하면 놀이도 작품이 되는 부러운 재능의 세계.


팬데믹으로 락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황을 견뎠다. 혹은 즐기거나.

뱅크시는 아마도 '즐긴' 쪽인 것 같다. 뱅크시에 의하면 부인이 질색했다고...

부인의 질색에 공감한다. 나라면 저 욕실에 절대로 안 들어갈거다.





여담_

1. 엊그제 페이퍼에 뱅크시를 언급한 김에 내처 뱅크시 하나 더! 까지는 좋았는데 페이퍼 하나를 썼을 뿐인데 즈질체력이 바닥났다.  

2. 사실 '뱅크시'는 예전에 작성한 글인데 이미지와 내용을 정리해서 새로 쓰려니 바늘이 소가 됐다.

3. 그나저나 T1은 어쩌고 있는지. 슈뢰딩거 고양이 같은 녀석들! 고백하건대 이 페이퍼의 목적은 월즈 진출이 걸린 플레이오프2R를 관전할 용기가 없어 도피성 회피성이다.

4. 이대로 가을인가? 당황하기엔 벌써 9월 중순도 끝무렵이다. 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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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단토의 예술 철학에서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왜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예술에서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통찰의 끝에 단토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 테제는 단토의 저서들에서 여러 번 논의된 바 있지만 그만큼 자주 왜곡되고 오인되어 왔다. 이 책은 그가 거듭 주장한 탈역사와 예술의 종말 개념을 재확인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더 나아가 워홀 말고도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그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책 후면 표지 발췌






개인적인 생각으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을 고함'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비견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선언'이라는 의미로는. 물론 단토가 선언한 '종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술과 함께 그 안에 요요히 퇴적되어 온 역사도 봐야 한다. 선언이라 함은, 그것이 지닌 무게란 무릇 그런 것이다.

예술문외한인 일반인으로서 한마디 첨언하자면 단토의 선언은 뱅크시의 퍼포먼스로 1막 1장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뱅크시의 근황이다.

최근 뱅크시가 영국 런던 왕립 법원에 남긴 벽화는 '피켓을 든 비무장 시위자를 법봉으로 때리는 판사'다. 현지 언론은 최근 영국 정부가 친팔레스타인 단체 '팔레스타인 행동'을 금지 단체로 지정한 것과 관련있을 거라고 해석한다는데... 

지난 6일 런던 도심에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고 약 900명이 체포됐는데 이에 시위 주최 측은 '법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이면 저항은 꺾이지 않고 강해진다'고 했다고 하니 사법부의 권위? 신뢰? 정의? 그게 뭐든 사법부의 뭔가가 땅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건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인 듯.




출처_ banksy.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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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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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언어의 유목민인 다와다 요코의 문장을 읽는 경험이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것은 아마도 독자도 이미 다양한 언어의 경계를 부유하는 유목민이기 때문일 터. 결국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의 언어를 공감하는 시공간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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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없는 사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수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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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없는 사이'가 서양식 표현은 아닐 것 같다는 근본 없는 의심을 하며 표지를 확인하니 원제가 'LES INSEPARABELES'다. 프랑스어 직역은 '떨어질 수 없는(분리할 수 없는)'.


자전적 소설 『둘도 없는 사이』의 실비는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는 자자(엘리자베스) 라쿠엥의 또다른 자아다.


자의식 강한 9살 실비와 새학기 짝으로 등장한 앙드레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되면서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성장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단순히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고 억압적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토론을 했고, 항상 우리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곤 했다. 오늘은 아주 실제적인 일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 안에 있는 완고한 믿음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너져 내렸다. (pp.168-169)

그렇고 그런 흔한 여자아이들의 우정에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여자아이들의 우정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담하며 재기발랄한 여자아이들을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내용으로, 기성세대가 공고히 구축한 교육은 형식으로 억압하는 당시 풍토다. 한 예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것을 계급의 결과로 인식하는 선민의식이 20세기 초 프랑스 소도시의 풍경이라는 사실이 의외롭다. 프랑스는 시민혁명과 인권선언의 나라가 아닌가. 일종의 '프랑스 너마저도'하는 배신감이랄지.


삶의 내용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웠단들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그 자체로 미완이다. 그리고 죽은 이가 남긴 미완의 영역을 채우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아마도 뇌수막염으로 추측되는 앙드레의 죽음은 사건이라기엔 느닷없고 사고라기엔 지나치게 비극적인데, 선택을 할 수 없는 선택으로 내몰린 앙드레가 고열에 시달리는 몸으로 연인의 아버지를 찾아가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장면은 이것이 살아있는 앙드레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에서 몹시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잔상을 남긴다. 더 큰 불행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조차 자신의 신에게로 도망치는 비겁한 부모다.


갈라르 부인은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는 도구들이었을 뿐이야." 갈라르 씨가 부인에게 말했다. (p.189)

당사자의 의사를 배제하고 결혼- '짝짓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지드의 표현처럼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을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도식화시켜 집단에 강제 편입시킴으로써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확인받고자 하는 기성 질서의 권력은 또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누구도 자신의 도덕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것이 자식,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집단과 개인 간 헤게모니 쟁취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의 아포리즘 '목적지는 있지만 경로가 없다. 우리가 경로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를 빌리자면, 실비와 앙드레는 부모와 학교와 사회가 선의로 포장해 그들에게 내민 꾸러미가 정직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정의할 단어를 몰라 망설이고, 경로 이탈을 두려워한 아이들이 망설이는 사이 기성세대의 질서가 앙드레를 집어삼켰다고 할 수 있다. 실비 입장에선 둘도 없는 사이였던 앙드레를 빼앗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장소설이겠거니 하고 첫 장을 열었던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일종의 고발문학으로 다가왔다.


자자에게


오늘 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네가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일까? 이 이야기를 너에게 바치고 싶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여기서 네게 문학적 기교를 통해 말을 걸고 있는 거지. 게다가 이것은 너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일 뿐이야. 너는 앙드레가 아니었고, 나는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 실비가 아니었잖아.


시몬이 원고를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고 다듬었던 심정을 어쩐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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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철학은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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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한 서동욱 교수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말하자면 보관함과 장바구니 경계에 있던 책인데- 재미있을 것 같은데 추천한 사람이 이동진(책 취향이 나랑 안맞음),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아싸! 가져온 책이다. 그때 눈에 안 띄었으면 아마 주문했을 것 같지만. 

여튼 프롤로그를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했으니,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동진 평론가가 극찬한 프롤로그가 이 책의 여러 챕터 중 가장 별로였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저자의 직업적 정체성이 프롤로그에 그대로 담겼는데 철학자 특유의 관념론적 사고가 시인의 언어를 빌리니 문장은 예쁘고 심오한 뭔가도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뭐라는 거지' 싶은 거다. 아, 이번 독서는 난항이겠구나 예감한 순간이었다.

 

저자의 문법이 내 기호와 맞지 않다는 거지 내용은 흥미롭다. 책은 전반적으로 사물의 미시에 집중하는데 '반복'을 위시한 몇몇 챕터에서 마주치는 니체의 흔적이 반갑다.


한스도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쇼샤는 한스가 초등학교 시절 호감을 품었던 히페라는 소년과 닮았다. 한스는 동성인 히페를 연인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런데 히페에 대한 호감은 히페를 닮은 쇼샤에 대한 사랑이 탄생하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과거의 히페는 현재의 쇼샤에 대한 사랑 속에서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어떤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뜻이 아니다. 즉 히페는 히페로서 반복되지 않는다. 히페가 쇼샤로 변신하고서 반복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반복은 서로 다른, 즉 차이 나는 것들(히페와 쇼샤) 사이에서 생긴다. (p.38)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내용을 몇 꼽아보자면 인간이 실수를 반추하거나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이유는 자가치유 때문(pp.36-37), 교회에 사람이 없자 물고기들에게 가서 설교를 했던 성 안토니우스의 일화(p.90), '근대' 개념의 환기(p.154), '도시가 건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 도시를 소유한다'(p.276)는 원근법 해석, 수집에 열을 올렸던 발자크를 통해 과거의 사물에 관심을 쏟는 자는 수집가, 미래의 사물에 관심을 쏟는 자는 발명가로 정의하는 것(p.303) 등이다.

 

이중 '근대'에 덧붙이자면 '근대'는 그동안 단어 혹은 용어로 관성적으로 습득했던 내겐 신선한 학문적? 환기가 되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근대와 인간 주체의 탄생」은 해당 책에서 가장 진도가 안 나갔던 챕터인데 이유는 철학자와 일반인의 위치에서 오는 괴리 때문이다. 당연한가? 당연할지도. 

 

지식인의 현학적인 태도가 빛을 발하는 때는 대개 개념을 개념으로 설명할 때인데 이 챕터는 유독 이런 장면이 많다. 저자는 '근대'로 포문을 열고 '인간 주체'를 끌어오는데 문제는 '인간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과 '주체'를 잘게 부수는 서술이다. 앞서 이 책은 저자가 사물의 미시에 집중한다고 썼는데 '인간 주체'는 이 집중도가 지나쳐서 살짝 현기증이 일 정도. '인간 주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갔다가 라틴어로 갔다가 칸트와 하이데거를 거쳐 다시 근대로 돌아오는데(pp.156-157) 이 과정을 거치고서야 마침내 '인간중심주의'가 등장한다. 산넘고 물건너 황야를 가로질러 도착하고 보니 목적지가 옆집인 걸 발견한 기분.

 

문제는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이어지는 챕터는 '근대 이후 A.I.'인데, '인간-기계' 또는 '주체-기계'인 키메라는 인간의 가장 좋은 조언자가 될 수도 있고,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 주체가 인공물과 자연을 지배하는 시대, 바로 근대와 결별한 것일까?(p.167) 는 논리의 전개는 재미있다만 다소 비약적인 결론으로 느껴진다. 단적으로, 챗GPT의 활약에 나는 저자만큼 감탄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S와 아마 오래지 않아 로봇이 음식을 요리하는 세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나눴다. 쿡봇(cook-bot)이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해 정확한 계량을 거쳐 조리한 음식을 내놓는 거지. 당연히 음식은 맛있을 것이다. 근데 쿡봇이 맛을 알까? 

 

영화 <매트릭스>는 아키텍트가 인간의 행동양식을 관찰하고 분석해 '인간세상'을 복제하지만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해 완벽한 구현에 실패하고 여섯 번이나 시행착오를 겪는 내용이다. 네오와 오라클의 대화에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등장하는데 인식론의 영역을 정복한 기계가 과연 존재론의 영역도 정복할 수 있을지, 도래할 A.I.미래에 현시점에서 내가 가장 궁금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할란 엘리슨의 소설 『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em』은 과학자가 슈퍼컴에게 매일매일 'I AM'을 가르치는데 어느날 슈퍼컴이 'AM'을 깨우치고 인간세계를 정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기계라면 신인류로 인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해체는 사물의 전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 진통이라는 내용은 더이상 새롭지 않지만 철학적 논쟁의 양극단에 서있는 데리다의 영향력과 마주치는 순간은 여전히 놀랍다.

 

기차의 창문들 각각처럼 세계는 전체를 이루지 않는 파편들, 차이뿐이다. 전체성은 주인공이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옮겨갈 때 그 '횡단선'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횡단선을 따라 생기는 이 전체는 파편들을 통일하는 원리 같은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도, 법칙도 없으며 오로지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p.213)

 

1,2,3부는 다소 엎치락뒤치락 읽었다면 4부는 술술 넘어간다.

저자의 이력을 보고 철학자의 언어와 시인의 언어가 만난 결과물이 궁금했는데 대중의 언어가 아닌 것은 알겠다.

 

참. 오랜만에 강백호(슬램덩크)의 대사를 만나 반가웠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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