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다 : 피츠제럴드 단편선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보영 옮김 / 이소노미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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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왜요? 제가 즐거워 보이지 않나요?"

"바로 1분 전에 당신이 창밖을 바라보는 걸 봤어요. 몸을 떨던데."

"그냥 저의 상상이었어요." 샐리 캐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 모든 걸 밖에서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 있나 봐요. 가끔씩 밖을 보는데 눈발이 날리는 걸 보면 마치 죽은 것들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p.132,「얼음궁전」


 


이하, 목차별 간단 리뷰



「무너져 내리다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를 발표한 후 작가로서 명성이 추락하고 몇 달 뒤 뉴욕포스트의 인터뷰로 세간의 조롱을 받았다(p.103, 최민석 『피츠제럴드』)는 일화는 거의 한 세기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마음이 불편했다. 피츠제럴드가 오늘만 사는 욜로족처럼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고는 하나 본인이 정직하게 번 돈을 본인이 쓰고 싶은 대로 썼는데 그게 조롱받고 욕 먹을 일인가 싶은 거다. 사회 현안에 입 꾹 닫고 본인 사생활만 챙겼다고 한들 실망하고 무시하면 말 일이지 '너는 왜'라고 비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결과와 책임은 온전히 본인 몫인데.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젊은 시절 방탕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렀다.

업계는 물론이고 피츠제럴드 까기에 빠질 수 없는 헤밍웨이도 여성스럽다고 비난했다는 「무너져 내리다'(The crack up)」의 경우 하루키처럼 나 역시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이 에세이를 둘러싼 후일담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17년 중 1년은 일부러 빈둥거리고 쉬면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일이라면 그저 내일의 멋진 기대감을 갖는 것뿐인 나날들이 이어졌지요. 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49세까지는 괜찮을 거야. 그건 확실해. 나처럼 사는 사람이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뭐."라고 말입니다.

ㅡ그런데 마흔아홉을 십 년 앞두고 갑자기 내가 이미 무너져 내렸음을 깨달았습니다.


-p.24


13년 뒤엔 뉴욕으로 돌아와 새로운 경험을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미래를 상상하던 1932년의 피츠제럴드는('나의 잃어버린 도시'-『재즈시대의 메아리』), 성공한 작가로 또다시 도약하고자 의지를 불태웠던 1935년의 피츠제럴드는, 1940년 LA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미완의 원고를 남기고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피츠제럴드는 마흔네 살이었다.


참고로 나는 '무너져 내리다(Crack up)'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느 작가의 오후』 수록 버전 '망가지다'도 읽었는데 판본이 다른가 싶을 정도로 두 책의 번역이 다르다. 

 



「머리와 어깨」 


타고난 천재성이 가리키는 인생의 항로에서 벗어나 사랑을 선택한 열여덟 천재가 뒤늦게 자신이 버리고 포기한 삶의 가치와 크기를 깨닫고 충격받는 장면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는 동안 두 갈래 길을 만나고, 고민하고, 그 중 하나의 길을 걷는다. 가다가 틀렸다고 생각되면 되돌아오면 되겠지 생각하지만 운명은 인간에게 기회비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원래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못 담그는 게 인생의 냉혹한 진리다. 


 


「얼음궁전」


소설을 읽다 문득, 피츠제럴드가 잘 제련된 문장을 쓴다고 생각했던 단편이다. 내용은 가치관과 환경이 다른 남녀가 그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사랑이야기인데 약혼자를 만나러 겨울에 들어선 북부 도시에 간 남부 태생인 샐리 캐롤이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이 생생하다. 눈 폭풍, 고드름을 매단 차가운 흉벽, 그리고 '얼음 궁전'. 샐리 캐롤이 약혼자를 놓치고 낙오된 채 미로처럼 엉킨 동굴 속에서 헤매는 장면은 18세기 고딕소설의 기시감을 불러오는데 피츠제럴드는 스릴러도 잘 쓰는구나 했다. 아울러 백 수십 편이 넘는 단편을 쓴 작가의 저력을 너무 얕봤다는 반성도 했고.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


피츠제럴드가 생전에 쓴 단편이 160여 편에 이른다고 하니 섣부른 얘기일수도 있다만 내가 읽은 범위로 한정할 때 가장 유쾌하고 위트 넘치는 소설이었다. 성향이 정 반대인 버니스와 마저리는 사촌간인데 버니스가 한 달 일정으로 마저리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 머무는 동안 일어난 소동을 다룬다. 말하자면 마을의 인플루언서인 마저리는 작은 계기로 고루하고 지루한 버니스의 착장과 애티튜드에 참견하고 사촌의 충고를 받아들인 버니스는 파티의 월플라워에서 한순간에 인기인이 된다. 심지어 오랫동안 마저리에게 구애를 보내던 이웃 남자마저 버니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것처럼 보이는)데 이쯤되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것이다. 여자라면.


나로 말하면 '마저리 요나쁜뇬' 도끼눈을 뾰족하게 세우다 '그래 버니스! 그거지!' 깔깔 웃으며 버니스를 응원했다. 역시 '미덕의 불운'보다 '악덕의 번영'인가. 


나는 재미있거나 괴상한 소설을 읽으면 거의 대부분 M에게 공유하는데 이 단편도 마찬가지. 그리고 덧붙였다. "남자들은 이해 못하는 여자들만의 정치가 있어." 그런데 피츠제럴드가 여성 심리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 그냥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쓴다. '버니스 단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피츠제럴드의 소설 전반이 그렇다.


 


「겨울 꿈」 


미인을 보면서 스물네 시간 아름답다고 감탄하지 않는 것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매번 잘 쓰는구나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문득 '아, 잘 쓰네' 할 때가 있는데 '겨울 꿈'이 그랬다. 개츠비 군집 류인데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식 사랑 이야기'를 읽는 건 한겨울 정오에 아주 잠깐 눈부신 햇살이 지상을 비출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흔한 돌조각에 그 빛이 닿아 반짝 빛나는 순간을 목도하는 기분이 든다.


피츠제럴드가 써내려가는 소설 속 여성은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도록 섬세하고 예민하고 예쁘다. 뿐만아니라 당당하고 자립적이고 도전적이다. 다만 한 가지, 변덕스럽다. 그리고 이 변덕이 그녀들을 사랑하는 남자들을 절망에 빠트리고 이별로 이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남자에겐 재앙의 도래인 것이다.


M.프루스트는 인간에게 중요한 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라는 말을 했지만 적어도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남성에게 중요한 건 '대상'인 것 같다. 오직 데이지여야만 하고, 잔퀼이어야만 하고, 마샤여야만 하고, 주디 심스여야만 한다. 결국 개츠비 식 로맨스는 사랑의 대상이 원인이고 목적이고 결과여서 일어나는 비극의 전과정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시 찾은 바빌론」 


자전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찰리와 오노리어가 피츠제럴드와 딸 스코티인가 싶기도 하다. 비록 인물은 허구일지 모르겠으나 미국 호황기와 붕괴를 함께 했던 인간 군상이나 동시대 파리 스케치 등은 확실히 경험에서 빌어다 쓴 것으로 보인다. 

줄거리는 1920년 대 미국 호황기가 불려준 재산으로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아내를 잃고 알콜중독으로 쓰러졌던 찰리가 과거를 청산하고 처형 부부에게서 사랑하는 딸 오노리어의 양육권을 되찾고자 하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피츠제럴드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만끽할 수 있는 단편으로 꼽는다. 주 플롯만 보면 「바람 속의 가족」(『어느 작가의 오후』)과 일면 겹치는데, 과거의 과오를 딛고 손상된 현재를 회복하고자 하는 찰리와 그런 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과거 잔재들의 악의가 벌이는 줄다리기가 의외로 치열해서 그 과정의 긴장감이 상당하다. 단편임에도 읽는 도중에 엔딩을 확인했을 정도.




「잃어버린 10년」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가 재미있어서 두 번 읽었다면 '잃어버린 10년'은 순식간에 지나간 풍경을 다시 확인하는 기분으로 두 번 읽었다. 거의 엽편에 가까운, 매우 짧은 길이의 단편인데 두 번 읽어도 지나간 풍경에 뭐가 있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저 극 중 화자의 대사로 '그렇구나' 미루어 짐작할 뿐. 어쩌면 단지 '풍경' 그게 전부였는지도 모르고.




:::


「구니스 단발로 자르다」「겨울 꿈」을 읽고 이 책을 주변에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책 후면- 이 책의 기획과 편집을 한 두 사람의 대화형 후기를 읽고 한차례 꺾이는데 특히 편집자 마담쿠는, 이 사람은 뭘까 싶었다. 그래도 피츠제럴드와 소설은 죄가 없으니까 추천함.


안 읽은 소설을 중심으로 피츠제럴드 도장깨기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밤은 부드러워라』 한 권을 남겨두고 있는데 피츠제럴드는 읽으면 읽을수록 독특한 작가, 문제적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장편을 비롯해 단편 몇 권을 읽을 때는 '개츠비 군집'에 치여 남주 직업과 여주 이름만 다른 일일드라마를 보는 기분에 회의도 들었는데 이는 피츠제럴드가 무려 160여 편의 단편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간과한 섣부른 생각이었고, 개츠비 군집을 헤치고 만나는 단편은 피츠제럴드가 다양한 얘기를 썼음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츠제럴드의 전형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다른 단편을 읽고 싶은 욕심이 든다

 

개인 취향으로 앞서 읽었던 『'어느 작가의 오후』보다 『무너져 내리다』의 목록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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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책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앤솔러지
기 드 모파상 외 지음, 최정수 외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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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관찰자와 몽상가라는 이중의 삶'(pp.422-433)에서 빌려왔다.


사랑의 책죽음의 책은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에서 '사랑', '죽음'를 주제로 선별한 앤솔로지인데 목차 중 몇 편을 찍먹해보자.



모파상 달빛

 

투명한 아침 안개 속에서 긴 계곡, , , 마을들이 보이자 나는 황홀한 마음에 손뼉을 치면서 그이에게 말했지. "여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나 좀 안아 줄래요?" 그러자 그이가 어깨를 조금 으쓱하더니,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를 띠며 나에게 대답하더구나. "경치가 마음에 드는 것이 포옹을 할 이유가 되오?"

 

-p.12, 달빛


첫 번째 목차인 모파상의 소설을 읽던 중 방심하고 있다가 웃음이 픽 샜던 장면이다. 나는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그중 /E, T/F는 근거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하자면 이 부부의 대화는 전형적인 FT의 대화다. 나중에 해당 장면을 M에게 들려주었다.

 

"모파상의 소설인데, 부부가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어. 그러다 전원 풍경을 보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풍경이 너무 예뻐요 나를 안아줄래요? 했더니 남편이 풍경이 예쁜 거랑 안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 했단 말이지 그러자 매정한 남편에게 상심한 아내에게 애인이 생겨! 너처럼 극극극F들은 명심해야 할 교훈이지 깔깔"

 

해당 장면 이후 불륜을 털어놓으며 괴로워하는 언니에게 동생이 '달빛 때문'이라고 위로한다. 놀라운 건 바로 이 지점인데 직전까지 짧은 콩트 같던 소설은 고작 '달빛' 한 단어로 서정 가득한 소설이 된다. 모파상의 '달빛'은 나쓰메 소세키의 달이 되었다가, 체호프의 달이 되었다가 끝내는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이 된다.

 

명성은 공짜가 아니구나 싶었던 모파상의 한 방이었다.

 

달빛과 /F의 대화 어쩌고 떠들다 보니 드뷔시의 파리(캐서린 카우츠키)에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던 커플이 떠오른다.

 

"말해봐요, 내 사랑. 저 달이 사랑의 꿈을 꾸게 하나요?"

"글쎄요. 달을 보니 아침에 먹은 멜론이 떠오르네요."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원제는 'The Sensible Thing'이다.

 

이 단편은 위대한 개츠비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데 발표 연대를 확인하니 역시  현명한 선택위대한 개츠비보다 1년 앞선다. 1년 동안 피츠제럴드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첫사랑에게 외면당하고 절치부심 성공의 레일 위에 올라 첫사랑 앞에 금의환향한 것까지는 두 소설이 동일한 흐름이지만 첫사랑과 재회 후 조지와 제이는 다른 선택을 한다.

 

단순 정리하자면 제이 개츠비는 문학적인 선택을 했고, 조지 오켈리는 장르적인 선택을 한다. 다만 현명한 선택은 원문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단 번역으로 읽은 소설은 오픈엔딩인데 관점을 살짝 비틀어보자면 현명한 선택에서 열어두었던 엔딩을 위대한 개츠비에서 닫은 것 같은 혐의가 있다. 그러니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예정이라면 가급적이면 두 소설을 차례로 연속해서 읽기를 권함.

 

조지와 제이 중 누구의 선택이 더 옳았는가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때의 선택이 그들을 어떤 결말로 데리고 가든 이미 그들의 삶에 깃든 우울은 그들과 평생 함께 할 텐데.



땡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건널목을 지나면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기차는 드넓은 교외의 풍경을 뚫고 석양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쩌면 그녀도 석양을 바라보며 잠깐 걸음을 멈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옛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이 찾아올 것이고, 그는 그녀와 함께 잠 속으로 빠져들며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의 해 질 녘 어둠은 영원히 태양을 가릴 것이고, 나무를 가릴 것이고, 꽃과 그의 젊은 날의 웃음을 가릴 것이다.

 

p.208, 현명한 선택


철로가 꺾이면서 기차는 이제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태양은 점점 낮게 가라앉으며 그녀가 숨 쉬었던,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 위에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듯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라도 잡으려는 듯, 그녀가 있어 아름다웠던 그 도시의 한 조각이라도 간직해 두려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제 눈물로 흐려진 그의 두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도시는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싱그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p.215-216,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민음사


현명한 선택위대한 개츠비의 산모였구나 했던 장면이다. 연인으로부터 내몰리듯이 올라탄 열차의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조지에게서 석양이 퍼지는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던 쓸쓸하고 우울한 개츠비의 영혼을 엿본 것 같은, 서러운 비애가 느껴졌던 장면.

 

'위대한 개츠비'는 출간 당시에는 인기가 없어 초판은 오랫동안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차 대전 중 군인들에게 보급되고 소설을 읽은 군인들이 제대하면서 뒤늦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금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한 연애담을 읽고 제대한 군인들은 좀더 이성적이고 현명한, 자본주의적인 연애를 했을까.




오 헨리 목장의 보피프 부인 

 

'사랑이야기'라고 하면 으레 장르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단편은 오 헨리, 피츠제럴드, H.G.웰스, 알퐁스 도데, 윌리엄 포크너, 그레이엄 그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중에서 다시 장르적 공식에 좀더 충실한 단편을 꼽자면 오 헨리 목장의 보피프 부인,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이고. (모두 개인 기준)

 

오 헨리의 소설은 오 헨리에게 익숙한 혹은 길들여진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커플의 예쁜 이야기.

목장의 보피프 부인은 전형적인 로맨스소설이다. 단적으로, 할리퀸소설 한 편 읽은 기분.

 


운명의 길을 따라간 지네 한 마리가 상황을 밝혀 주었다.

 

p.183, 목장의 보피프 부인

 

앞뒤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오 헨리가 쓸만한 문장이다.

 



그리고 레이 브래드버리

 

4월의 마녀는 브래드버리의 연작소설 시월의 저택바람 속의 마녀와 동일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직후엔 혹시 세시와 톰의 프리퀄 혹은 시퀄인가 했는데 그냥 같은 소설이다.

 

시월의 저택리뷰에 세시와 톰의 엔딩을 보겠다는 오기로 예쁜 사오정 같은 이 소설을 완독했다고 썼는데 세시와 톰의 에피소드는 똑 떼어 '사랑의 책' 목차에 넣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는 '사랑이야기'. 다시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들... 바람이 풀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초원 어딘가에서 예쁘게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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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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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1악장처럼 '운명이 문을 두드리듯' 옛 동료의 방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 아침의 방문객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별 일 없이 그냥저냥 평탄하게 흘러갔을 젊은 군장교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회삿돈을 횡령한 옛 동료 장교를 돕기 위해 도박판에 꼈다가 순식간에 감당 못할 액수의 빚을 진 빌헬름 카스다 소위(빌리)가 막다른 순간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다루는 이 소설은 줄거리만 보면 장르 언어로 '피폐물'인데, 선의에서 비롯된 작은 일탈이 어느 시점부터 운명의 발길질이 되어 빌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난장판을 불러온다.

 

<한밤의 도박>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악의적인 그들은 모두 빌리의 악운에 일정량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며 하물며 빌리의 비극에 방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을 덮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도 이 대목이었다. 빌리의 악운에 첫 단추를 끼운 보그너도, 악운에 결정적 쇄기를 박은 슈나벨 영사조차도 빌리의 비극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붕괴되었는데도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니 이래서 지옥은 층층이 몇 겹인 듯. 빌리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선택의 순간 지난 과거와 현재의 과오에 책임을 수용하는 빌리는 소설이 진행되는 그 어느 순간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놀랍지만 대부분의 선의와 악의는 이란성 쌍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는 의미.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악의로 느껴질만한 상처를 남겼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날, 빌리는 바로 이 '예의'에 무심했고 그날의 무신경 혹은 무책임은 어김없이 현재의 빌리에게 영수증을 내민다. 그러나 이 모든 지표에도 나는 진심으로 이 젊은 청년에게 청년이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과정이 어떻든 동료의 곤란한 사정을 딱하게 여겨 돕기를 자청하고 동료의 곤궁한 현실에 연민을 느낄 줄 아는 빌리는 본성이 갖고 있는 선량한 조각이 더 컸던 청년이기 때문이다.

 


긴 장마에 카카오99% 반 조각을 먹은 기분을 남기는 <한밤의 도박>151페이지 분량의 중편이지만 자극적인 소재에 비하면 감정적 파고의 낙차가 완만한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 방심했을 때 짧고 강하게 폭죽을 터트리는데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는 불꽃의 여운이 꽤 강렬하다. 그 불꽃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백하다.

 

<한밤의 도박>은 도박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어긋난 사랑이 젊은 장교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이야기다. 우연이 우연으로 이어지고 중첩된 우연이 필연이 되어 빌리의 나락에 디딤돌을 놓은 것인데, 그래서 제목 <한밤의 도박>에서 '도박'은 이중적인 의미로 보인다. 빌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년 전 그날 밤 자신도 모르게 한 번의 도박이 더 있었던 것이다. 결국 빌리에겐 두 번의 밤, 두 번의 도박이 있었고 잊혀졌던 그날 밤 도박의 빚이 뒤늦게 도래한 것이다.

 

역자후기의 개념을 빌리자면, 직전까지 에로스(삶의 본능)을 불태웠던 빌리가 결국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을 담담하고도 의연하게 받아들인 것도 결국 사랑 때문이다. 그게 본인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그렇다. 결국 사랑이 문제다.

 

빌리의 선택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만족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는 지금보다는 훨씬 도덕적이고 선량했던 시절이니까.

 

장서가에게 소설을 읽는 의미를 던져주는 작가를 만나는 건 몇 끼 굶어도 즐거운 행운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도 그런 작가다. 내겐 최고의 도파민이 게임도, 영화도, 서브컬처도 아닌 순문학인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빌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다. 훌륭하군! 그렇다. 어쨌거나 보그너 문제는 책임지고 수습하고 싶었다. 빌리는 보그너가 아직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기를 바랐다. 보그너에겐 기적이 일어났으니까! 보그너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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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

그때도 노래가 불릴까?

그때도 노래는 불릴 것이다.

어두운 시대에 대한 노래가

 

브레히트, 시에 대한 글들


 

브레히트의 배경을 알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진다.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그리 서정적인가.

 

브레히트는 시론에서 서정시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다.



얼마 전 시인 킨예가 이러한 시기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써도 되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써도 된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썼는지 물어보았지요. 그는 못 했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드는 것을 내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따금 몇 줄을 끄적거리면서도 나는 이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를 모든 사람을 위해, 즉 비 오는 날 비를 피할 잠자리를 찾아다녀도 집도 절도 없어 빗방울이 그의 옷깃과 목 사이로 그대로 떨어지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체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나는 그만 움츠러들었어요.”

예술이 오늘의 상황만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언제나 빗방울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가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짐짓 이렇게 떠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만약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다면 그런 시가 쓰일 수 있겠지요.”

 

-pp.14-15

 

 

*킨예_ 브레히트를 지칭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도 같은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칠장이_ 화가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 지칭



히틀러의 나치를 피해 브레히트는 가족을 데리고 독일을 떠나 유럽과 미국을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친구와 동지를 잃은 브레히트는 평생을 살아남은 자신을 의식하며 살았으며 <살아 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자조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자신이 시를 쓰는 동력은 분노라던 브레히트의 강변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실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브레히트로 하여금 서정시를 쓰게 했을까.

고작 빗방울로도 이토록 마음을 수런거리게 하는 브레히트의 분노라니...

 

다시,

실존주의 작가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그리 서정적일까.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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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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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판 제목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개정 복간되면서 <원도>로 바뀌었다.

초반 몇 페이지를 읽다가 생각했다. 초판 제목이 더 잘 어울리는데.

이 생각은 책을 읽는 도중에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도 여전히 변함없다.

편집장의 결정이 아쉽고 선선히 동의한 작가의 결정도 아쉽다.


고집이 세고 예민한 아이였던 원도는 아버지의 사망 후 줄곧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상실과 결핍은 원도를 이루는 근원이다. 상실은 갖고 있던 걸 빼앗긴(잃어버린) 것이고, 결핍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원도는 상실의 공포와 결핍의 외로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죽지 않고 사는가.


원도의 상실과 결핍은 원도와 함께 성장한다.


(작가가 의도한 구도이겠지만) 원도에게 상실의 주체는 남성, 결핍의 주체는 여성이 역할을 양분하고 있다.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 장민석, 야똘은 원도에게 책임과 선택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성이고 어머니, 유경이, 그녀, 아내는 원도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는가 질문하게 하는 이성이다.

이들 중 원도에게 최초로 상실과 결핍을 심은 두 사람은 어린 원도의 눈 앞에서 죽어간 죽은 아버지와 보육원 봉사 때문에 어린 원도를 방치한 어머니다. 그리하여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원도의 질문은 존재의 근원으로 뻗어간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나는 왜 살아있나.

나는 왜 죽지 않고 사는가.


대단원의 끝자락에 작가가 불쑥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p.239)

개인 감상이지만,

원도의 결말에 같이 책임져달라는 회피로 보여 작가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던 한 줄이었다.


-


형식은 카프카, 내용은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리게 하는 <원도>는 가능한 한 호흡에 읽는 게 좋다. 아마도 사십 후반에서 오십 초반 쯤일 원도는 중증의 간경화를 앓고 있는데 경찰과 빚쟁이에게 쫓기는 병든 원도의 몸은 의식과 무의식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과정이 연속 불연속의 연장이라 꽤 집중을 요한다. 실제로 소설 초반부를 읽을 때 가장 지배적인 감상은 '끝말잇기를 읽는 것 같다'였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져라'(p.58)는 소설 전체에 걸쳐 강박적으로 등장한다. 산 아버지, 장민석, 야똘의 입을 통해 원도에게 박혀드는 이 말의 원조는 산 아버지이지만 매번 원도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인물은 장민석이다. 소설에서 원도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인물도 장민석이다.


왜 하필 장민석일까.


소설에서 장민석은 원도에게 상실과 결핍을 모두 자극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원도에게 지향점이기도 한 장민석에 대한 원도의 감정은 애증에 가깝다. 이상형인 상대가 무형이었던 상실과 결핍을 매번 실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두 사람의 결말이 비극인 건 운명이다.


소설은 건너뛰지만 아마도 장민석을 해친 인물은 원도일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정황 요소는 '야구 배트'. 사고가 벌어진 그 순간 장민석은 원도에게 장민석이면서 산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이면서 그녀였을 것이다. 상상하기로, 아마도 그 순간의 원도는 아주 잠깐이지만 자신의 내면 깊숙이 뿌리를 내린 상실과 결핍을 부수는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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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도 작가 후기에도 등장하지 않는 화자의 이름 '원도'가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여러 검색 결과 중에 한유의 원도(原道)가 눈에 띈다. 이어령비어령이라고 그렇게 보니 그럴싸하다. 각설하고.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원도>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읽힌다. 하나는 종교적 방식, 다른 하나는 신화적 방식인데 종교적인 관점의 원도는 원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나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된 카인을 연상케하고(이때 장민석은 아벨이다),신화적 관점의 원도는 출생의 비밀과 직면하자 '태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절규하며 스스로 두 눈을 찌르지만 결국 삶을 선택했던 오이디푸스를 연상케한다.


사실 나는 카인과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끼는 쪽인데 그들의 비극이 신에게 떠밀려 선택과 책임을 강요받은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도도 그들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 원도의 인생을 시궁창에 밀어넣은 상실과 결핍은 애초에 원도의 부모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정작 원도는 한번도 동의한 적 없는 자유, 선택, 책임이라는 명분에 내몰려 원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치된다. 하물며 원도의 상실과 결핍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 원도가 최초로 던진 질문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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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좀 의외로웠던 일... 사실 완독 직후에 나는 원도에게 일말의 동정도 연민도 느끼지 않았는데 리뷰를 쓰면서 원도를 향한 감정이 조금 바뀌었다. 누군가(아마도 신이겠지) 미리 값을 설정해둔 시스템에 던져져 좌우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앞으로 앞으로, 그 끝이 절벽인지도 모르고 성실하게 걸어갔구나 싶은 것이다.


아직 언어를 배우기 전 예민하고 사나운 원도의 기질에 소설 속 자아임에도 질리는 기분이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원도가 떼를 쓰고 울고 고집을 부리는 매순간이 나를 버리지 마라, 나를 봐달라 호소하는 간절함이었겠구다 싶다.


어떤 인간에겐 삶과 죽음의 중간 과정이 그 자체로 불가항력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시기, 다른 상황, 다른 나일 때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그때는 원도를 좀 더 넓게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여담_

책을 읽는 도중에 불현듯 뜬금포 'M은 이 소설을 절대로 안 읽겠구나' 했다. M은 원래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책의 형태를 한 것이면 그게 뭐든 안 읽지만 새삼스레 100% 확신을 했다. 아울러 순문학은 읽는 독자가 대단하고, 장르문학은 쓰는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담2_

공부 못한다고 아이를 벌 세우지 마라.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암기력이 떨어지는 아이도 있는 거다. 그림 못 그리고, 노래 못 한다고 아이를 벌 세우지는 않지 않는가. 도대체가 국영수는 뭐가 다른가. 이해가 안 되고, 암기가 안 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뭔가가 나를 뚫고 지나갔어.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 지나가버렸는데 여기 구멍이 있어.여기로 자꾸 아픈 바람이 불어와.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내 몸에 이게,이게 대체 뭐야 엄마.원도가 운다.무서워서 운다.

(p.67)

자살은 죽음의 형식일 뿐 내용이 아니다.내용에 대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p.78)

원도가 운다.

목 놓아 운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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