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간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정수윤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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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좋고. 안마. 여보세요.

손짓하는 억새풀. 저 뒤편에는 분명 무덤가가 있습니다.

길을 물으니, 여자는 벙어리였네, 메마른 들판.


나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이것저것 적혀 있다. 무슨 메모를 할 생각으로 적어둔 것일 텐데 나도 잘 모르겠다.


창밖에 검은 흙 사이로 바스락바스락 기어가는 못생긴 가을나비를 본다. 유별나게 튼튼해 죽지 않고 살았다. 결코 허무한 모습은 아니다. 라고 적혀 있다.


이걸 쓸 당시 나는 몹시 괴로웠다. 언제 쓴 것인지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선 밝히지 않겠다.


- p.183, 「아, 가을」


죽기 전에 온 힘을 다해 땀을 흘려보고 싶습니다.

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p.189, 「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어떤 작가는 읽는 순간 아, 이건 누구의 글이구나 알게 된다. 그러니까 지문처럼 식별되는 자신만의 문장과 문체를 쓰는 작가가 있다. 이를테면 다자이 오사무처럼.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삼도천을 건너는데 성공한 다자이 오사무는, 사실 예전에는 막연히 염세주의, 허무주의에 발목을 잡힌 인간이려니 했다. 그러나 이번에 오랜만에 그의 산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삶의 의미가 무거운 것과 삶의 의미를 못 느끼는 건 분명 의미가 다를텐데. 다자이 오사무가 죽음을 동경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별개로 삶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에게 삶은 너무 무거웠던 게 아닐까. 길가를 구르는 돌멩이와 나비에게 조차 삶의 편린을 보았던 그는 그저 가벼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정부와 함께 아타미로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그의 아내가 아이들 서넛을 데리고 아타미까지 쫓아와 한 여관에 투숙했다가 작심하고 아이들을 죽인 뒤 자살해버렸다. 한편, 남편과 정부도 그날 밤 다른 여관에서 동반자살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몰랐고 남편도 아내와 아이들이 아타미까지 와서 다른 여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펴과 아내는 각기 상대에게 한 사람은 사과의 유서를 한 사람은 원망의 유서를 남기고 죽음을 맞았다.


-p.273, 「온천마을 엘레지」


아내는 남편의 사과를 듣지 못했고, 남편은 아내의 원망을 듣지 못했다.

아내에겐 불행, 남편에겐 다행일까.

혹은 용서할 권리를 빼앗긴 아내야말로 남편의 유서를 읽지 않아 다행이었을까.


26인 작가의 산문 중 가장 재미있었던 사카구치 안고의 『온천마을 엘레지』. 

제목이 아재 감성이라고 스킵하면 후회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지루한 구석 없이 다 재미있다. 작가의 입담이 장난 아닌데 말발이 워낙 좋아 필담과 입담을 구분하는 게 의미 없는 작가로 국내는 황석영 정도가 떠오른다. 음. 두 사람에게 조금 못 미치지만 김영하 작가도 끼워주자. 


이 책에 실린 사카구치 안고의 산문은 「온천마을 엘레지」한 편이지만 분량만 보면 다른 작가들의 산문 두, 세 편과 맞먹는다. 근데 분량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읽게 된다는 거. 일본의 유명 온천이 자살자들로 몸살을 앓는다는 간단한 소재에서 출발한 글은 자살의 메카가 된 온천에 얽힌 사건 사고와 유래를 물 흐르듯 막힘 없이 풀어간다. 


이 책은 북마크를 해두고 싶은 괜찮은 산문이 많지만 사카구치 안고의 산문 한 편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데 드는 유무형의 비용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오카모토 가노코는 감탄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던 작가인데 「복숭아가 있는 풍경」에서 관능적인 문체로 사람을 홀리더니 「갈색의 구도」에선 어용 신문에 기고한 매문인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실망스럽다.


눈 딱 감고 복사꽃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게 잊혔다. 교태롭게 해쓱한 연분홍빛 선비가 기모노와 피부를 투과해 미각에 상쾌한 차가움을 전했다. 그 미각을 맛보는 혀가 신체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맛이 느껴졌다. 이 복숭아종이 흡사 사람 이름처럼 '덴주로'였다는 게 생각나 우스워졌다. 나는 아하하 소리를 내 웃었다.


-p. 240,「복숭아가 있는 풍경」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독일 베를린 유학 시기 불교 사원에서 만난 독일인 학생과 나눈 대화는(「갈색의 구도」) 일본 특유의 정서인 교조적인 상황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라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나 뜨악스럽다. 특히 현실에 혼란을 느껴 방황하는 와중에 붓다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 독일인 대학생이 작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장면은, 나아가 작가가 헤세의 '싯다르타'를 추천하는 장면에 이르면 뭐라 덧붙일 의욕조차 사라진다. 뭐. 본인이 그랬다는데 그랬겠지.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튼 나는 부끄러웠다.


오카모토 가노코의 「복숭아가 있는 풍경」과 가지이 모토지로의「벚나무 아래는」은 미문(美文)과 현학적인 글의 차이를 비교하기에 좋은 예다. 미문은 오감을 글자를 훑는 눈에 집중하게 하는 반면 현학적인 글은 문장이 눈을 통해 뇌로 전달되기도 전에 글자 위에서 눈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맥락인데 미문은 하나의 소재 혹은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면 현학문은 소재, 주제 같은 글감보다 단어 자체의 개념을 쫓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부사와 형용사가 지나치게 많아 맥락을 잃기 십상이다. 그러니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뭔 소리를 하는 거야'가 되는 거고.


벚나무 아래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 말은 믿어도 된다. 왜냐고? 그렇지 않고서야 벚꽃이 그렇게 아름답게 필 수 있을까. 나는 믿을 수 없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요 며칠 불안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겨우 알게 되었다. 벚나무 아래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 말은 믿어도 된다.


-p.294, 「벚나무 아래는」 


발췌는 산문의 첫 대목인데 읽으면서 와, 감각적! 했던 감탄은 다음 문단으로, 또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피로해진다. 불과 다섯 페이지 분량인데 첫 문단을 빼곤 뭘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아쉽다.


가자이 모토지로의 약력에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문체로 주목받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의 글을 보면 수긍이 가는 평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글이라는 건 문체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서. 

문학이 타인과 소통하는 매개는 글자인데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문장이라면 독자를 따돌리는 방백과 뭐가 다른가. 


『슬픈 인간』에 실린 작가들의 생몰은 대개 19세기 전후에 걸쳐 있다. 그러니까 근대사와 떼놓을 수 없는 연대인데 신기할 정도로 관련 내용을 주제나 소재로 다룬 산문이 없다. 소설도 아니고 산문인데도. 


그나마 고바야시 다키지의「감방수필」에서 동시대 세태를 엿볼수 있는데 다음은 읽으면서 좀...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던 대목.


옆방에는 조선인 동지가 있었다. 우린 가끔 서신을 통해서나, 운동이나 목욕을 다녀오는 길에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고향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도쿄에서 비합법운동을 하다 잡혀왔기에, 동지들도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에게 뭘 넣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미결수인데도 파란 옷을 입고 파란 이불에서 잤다. 내 경우는 가끔 가족들이 필요한 물건도 넣어주고 과일이나 과자도 살 수 있었지만, 이 조선인 동지는 한번도 밖에서 누가 뭘 넣어준 흔적이 없었고 물건을 사는 법도 없었다. 특히 여기서는 어디서 누가 무슨 물건을 받고 샀는지 훤히 알 수 있어서, 내 물건이 들어올 때마다 옆방 동지 생각에 맘이 쓰였다.

언젠가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간수의 눈을 피해 그의 독방 문을 두드리며,

"괜찮나? 아픈 데는 없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안에서,

"괜찮소."

조선인답게 또록또록한 발음으로 대답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 옆방 동지가 이불을 꺼내며 무슨 말인가를 했다. 문득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니, 이불만 시켜주지 말고, 인간도 햇볕을 쬐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가. ㅡ나는 엉겁결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아까 한 말을 듣고 곧바로 조직적으로 뒤를 이어준 것이다!

"뭐야, 아까 18번방이 하는 소릴 들은 거냐? 니들한텐 진짜 질렸다."

보라! 나는 생각했다 ㅡ동지란 이런 것이다!

나는 발로 바닥을 쿵쿵 구르며 응원했다.


-pp.159-161, 「감방수필」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다. 다키지의 옆방 조선인은 어떻게 됏을까. 바깥에선 그가 투옥된 걸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조선인의 이후 행로를 짚어보려니 여러모로 심란하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게공선』의 작가인데 그의 생몰연대가 1903-1933 이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자로 노동자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작품을 쓰고 노동 투쟁에 앞섰으나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던 중 서른 살에 사망했다.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전후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산문에 근대사를 다룬 내용이 없어 묘하다 했는데 책은 마지막에 가서야 근대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하라 다마키의 산문 두 개를 내놓는다.


나는 그때 살아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암흑이 머리 위로 쏟아져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그때 나는 나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머리 위로 부서진 파편들이 떨어졌다. 하지만 훨씬 더 엄청난 것에 두드려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어마어마한 속도가 내 안을 훑었다. 그때부터 나는 '갑자기'라는 말이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으로 내팽개쳐진 인간이었다. ……그날 밤 일을 떠올려본다. 히로시마의 거리는 밤에도 내내 불타고 있었다. 나는 강가 자갈밭에 모로 누워 사람들 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어떻게 될까. 다들 판단이 서지 않는 가운데 이상한 고요함이 있었다. 아마도 지구는 파멸할 것이고 인류에게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데서 오는, 이상한 고요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둑한 가운데 부상자와 피난민이 한가득 웅크리고 있었다. 내 바로 옆에 웅크린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육안으론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것 같았다.

"아저씨 옆에 꼭 붙어 있어. 아저씨 옆에 있으면 괜찮아."

남자는 같이 있는 아이를 안심시키며 반복해서 말했다.

"길 잃은 아이인데 어제부터 제 곁에 붙어서 걷고 있습니다."

나는 남자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내팽개쳐졌다는 격앙된 감정 속에 길 잃은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도 남자도 그리고 나도 모두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속에 내팽개쳐 있었다. 그러니 그 순간 세계가 소멸한다 해도 내게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는 소멸하지 않았다. 날이 밝았지만, 나는 다시 참극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후로 길 잃은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남자가 정말로 아이를 보호하고 구해주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남자와 헤어져 외톨이가 됐을까.


-pp.310-311, 『불의 아이』


늘 궁금했다. 일본 국민은 왜 일본 정부를 향해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앉는가. 뿐더러 당시의 위정자들은 세습을 거쳐 21세기 일본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다. 전후(戰後) 독일과 다른 노선을 선택한 일본의 행보는 종종 청산되지 않은 전범국의 무덤을 보는 기분이 든다. 독일 대학생에게 헤세의 소설을 추천하고 학생의 미래를 걱정하는 오카모토 가노코의 산문이 일종의 모욕에 가까운 희비극을 느끼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독은 대기 중에 녹아버린 듯하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속눈썹에 눈물이 고여 있던 너……. 손에 박힌 가시를 바늘 끝으로 빼주시던 어머니……. 사소한, 너무도 사소한 사건이, 아무도 없는 지금에서야 내 안으로 둥실 떠오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이가 아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죽은 네가 나타났다.

"어디가 아파?"

너는 손끝으로 내 이를 빙그르 문질렀다. 그 손가락의 감촉에 눈을 떴을 때,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p.331. 『염원의 나라』


이곳은 내가 자주 다니는 철도 건널목인데 차단기가 내려오면 여기서 한동안 기다리곤 한다. 전차는 니시오기쿠보 방면에서 오거나 기치조지역에서 온다. 전차가 다가오면 철로가 상하로 확실히 흔들리며 움직인다. 전차는 쌩하니 전속력으로 이곳을 지나쳐 간다. 나는 그 속도에 어쩐지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든다. 전속력으로나의 인생을 스쳐가는 사람을 나는 부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욱 초연한 눈빛으로 이 선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 세상에 부대끼며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쳐도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 넘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언제나 이 선로 부근을 서성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잠겨 건널목에 우뚝 서 있는 나, ……나의 그림자도 어느새 이 선로 주변을 서성이는 것은 아닐까. 


-pp.332-333, 『염원의 나라』


『염원의 나라』는 「1951년 무사시노시」라는 부제로 시작한다.

1905년에 출생한 하라 다마키는 1951년 기치조지역의 철로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작가의 이런 이력을 알고 읽어서일까. 『염원의 나라』는 작가의 유언처럼 느껴진다.


목록에 제목이 안 보여서 표제 『슬픈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 궁금했는데 아마 하라 다마키의 『불의 아이』에 등장하는 친구의 묘사에서 따온 듯 싶다.


"그러니까 이런 일도 있었어. 내가 아이 때 장난을 쳐서 아버지가 벌로 두 손을 줄로 묶고 벽장 속에 가둬버렸지. 잠시 후 내가 벽장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는데 묶였던 끈이 풀렸으니 다시 묶어달라고 운 거였네. 세상에 이렇게 슬픈 아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내가 그 시절 막연히 그 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건, 그 친구 안에 존재하는 남달리 슬픈 인간의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p.322, 『불의 아이』


작가 26인의 산문으로 꽉 채워진 『슬픈 인간』은 읽고 나서 한껏 포만감이 들었던 한 권이었다.

일본문학으로 국한하자면 20세기 초반, 구체적으로 1950년 이전 출생 작가들의 글이 여전히 취향임을 확인했고.


그중 특히 좋았던 산문은 의식흐름을 따라 들고 나는 서정적인 문장이 돋보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의 스미다 강」, 재미있는 글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카구치 안고 「온천의 엘레지」, 그리고 여러가지로 인상적인 다카무라 고타로 「촉각의 세계」. 특히 「촉각의 세계」는 제목부터도 그러하지만 조각가가 글을 쓰면 이런 촉각적인 문장이 나오는구나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묵직한 문장의 울림이 깊고 무거웠던 하라 다마키의 산문은 가끔 기억날 것 같다.


주례사 비평이 미덕인 듯 상식인 듯 보편화된 업계의 전통에 비추어 책 표지를 장식하는 유명 작가들의 추천사에 눈길을 주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는데 『슬픈 인간』은 허은실 시인이 남긴 추천사도 버릴 데가 없다.


어떤 밤엔, 저물녘 새의 예감으로 떨리는 글이었다. 

어떤 날엔 속눈썹에 묻은 눈물 같은 글이었다. 책을 덮고 먼데를 자주 바라보았다. 어떤 글은 위태로운 아름다움으로 아슬아슬해서, 저자의 생애를 앞질러 들추어보고는 아득해졌다(하략…) 

- 허은실 시인

『슬픈 인간』을 읽노라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국내 문인 51인의 산문을 엮은 방민호 교수의 『모던 수필』이 떠오른다. 향연에서 출간된 이 책은 『모단 에쎄이』로 제목을 바꾸어 다른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 시대 배경의 영향이겠지만 오래 전에 읽었던 『모던 수필』과 이번에 읽은 『슬픈 인간』은 여러모로 복합적인 감상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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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 막심 빌러의 짧은 이야기
막심 빌러 지음, 허수경 옮김 / 학고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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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열매 맺지 못하고 끝나는 스물일곱 편의 사랑이야기

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읽는 이를 경탄하게 하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순간들

 

작가는 인터뷰에서, '나는 다만 들려주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한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으며 또한 얼마나 복합적인가 하는 것을' 이라고 했는데, 책을 완독하고나니 인터뷰 내용 중에 공감이 가는 건 '얼마나 복합적인가' 이 한 대목이다. 소통 부재로 실패한 연애담은 아름답기는커녕 전혀 쿨하지 않을 뿐더러 더러는 막장이고 더러는 찌질하다.

 

화남금녀라고, 여자의 언어를 이해 못 하는 남자와 남자의 언어를 이해 못 하는 여자가 만나면 두 사람 사이에 생길 일은 뻔하다. 언성을 높여가며 제 말만 하다 결국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고 돌아서는 거지. 이 소설엔 이런 화남금녀가 가득하다. 그러니 당연한 얘기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물리적 화학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장면 중 특별히 아름답다거나 인상적이라고 느껴지는 장면은 없다. 아이러니한 건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스물일곱 편의 단편은 적게는 4페이지, 많게는 18페이지, 평균 10여페이지인데 단편인 걸 감안해도 분량이 매우 적다 싶은 이 소설집을 읽은 전반적인 감상은 '플롯은 넘치는데 서사가 없다'. 비유하자면 경찰서 사건 조회 기록을 읽은 기분인데, 딱히 줄거리로 요약할 만한 서사가 없다 보니 소설이, 혹은 작중 인물이,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가 뭔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쯤되니 독자가 이해하라고 쓴 소설이 아닌가 의심도 들지만. 어쨌든 이것도 일종의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집필 의도라면 매우 성공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는, 그게 입으로 하는 거든 몸으로 하는 거든, 내내 일방적이어서 남자와 여자 누구의 입장에 감정이입해봐도 도무지 상황과 내용을 알아먹을 수가 없다. 마치 평행선으로 달리는 두 기차 사이를 커다란 방벽이 가로 막고 있는 기분인데 이러니 그 연애가 잘 될 리가 있나. 다른 대륙의 언어를 쓰면서도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충만한 사랑에 빠지는 연인은 오히려 기적 같다. cf. 영화 <러브 액츄얼리>

 

스물일곱 개의 단편은 맥락이 상통하다 보니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정점에 둔 다양한 변주처럼 읽힌다. 따지고 보면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사연은 대개 거기서 거기이기 마련이라 내 사연만 특별하고, 내 사연만 기구한 것 같지만 이도 저도 결국은 그냥 '사랑 타령'인 거다. 

 

사랑하려고 일곱 번이나 시도했다는 건, 결국 그 사랑이 별 거 아니었다는 걸까.

혹은, 일곱 번을 시도해도 포기가 안 될 만큼 그 사랑이 대단하다는 의미일까.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그렇지 뭐, 그게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 그게 중요하지는 않아."

"나, 다시는 프라하로 오지 않을 거야."

"이해해."

그녀는 울기 시작하더니 몸을 돌리고는 갔다. 그는 문에 서서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발코니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쇼피노바를 따라 내려갔고 세 걸음쯤 걷고 난 뒤 서서 울고는 다시 걷다가 다시 울면서 갔다. 

 

-pp.28-29,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이 선집에서 한 편을 꼽으라면 마지막 목차「Ziggy Stardust」. 18페이지 분량인 이 단편은 그나마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이자 연인이다. 데이트 중에 우연히 옛 연인으로 추정되는 지인을 만난 여자는 한 달 뒤 약속한 시간에 남자가 있는 도시로 오지 않는다. 늦어질 것 같다는 통화가 마지막이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나 캄캄한 밤이 되도록 여자는 나타나지 않고 소식도 없다. 남자는 이 일방적인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나는 이른 저녁까지 그녀를 기다리다가 프리드리히하인 시민공원으로 갔다. 풀밭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내 또래 남자 몇이서 축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해 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따스한 저녁이었다. 바닥은 차갑지도 축축하지도 않았다. 어둠도 천천히 내려왔다. 어느새 나는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주위는 컴컴했고 공원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천천히 집으로 갔다. 그곳에도 에드나는 없었다. 


-p.262, 「Ziggy Stardust」


사랑이 스러지는 순간은 한낮의 빛이 차츰 온도를 잃고 그 자리를 저녁의 어둠이 메꾸듯이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그렇게 온다. 인용한 장면은 읽을 때 기시감이 일었는데 기시감의 출처는 은희경 『태연한 인생』. 어떤 이에게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뜨거운 한낮을 견뎌낸 저녁노을을 닮았다. 외롭고 씁쓸하고 아름답다.

 

예전에 J가 그런 얘기를 했다. 대화 주제가 아마 권태였던 것 같은데, 최초의 연애감정이 지속되려면 계속해서 상대의 다른 매력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처음엔 그냥마냥 좋아서 좋아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는 손이 예쁘고, 발이 예쁘고, 웃는 소리가 예쁘고, 성질내는 것도 예쁘고... 그렇게 계속계속 예쁜 게 보여야 된다는 거다. 그러면 최초의 연애감정이 지속된다나. 

 

한쪽의 일방적인 변심으로 야기된 이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로 남는다. 누군가에게, 하물며 한때 좋아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기꺼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랑이 일생인 것 같고, 목숨인 것 같고, 그래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그리고 상처에 새 살이 오르듯 느리게 느리게 어느 순간 회복된다. 오죽하면 관용적으로 쓰지 않는가. 연애는 사건이라고. 실패한 연애는 그냥 교통사고 같은 거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피하지 못한 그런.


 

역자 후기에 공감가는 대목이 있어 옮긴다.


1960년 대에 태어난, 도시에서 삶을 살고 있는, 유목민도 정착민도 아닌 많은 이들의 불우한 사랑이야기. 작가는 자신을 발설하면서 발설 뒤에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는 생각. 한 작가의 세계는 그 작가 자신이 아니라 그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고전적인 아포리가 명명백백해지는 순간을 나는 다시 막심빌러의 책 번역을 마치며 경험했다. p.267

 

내용 중 '책 번역을 마치며'를 '마지막 장을 덮으며'로 고치면 내 감상과 일치한다.

 

 

 

'아포리'가 '아포리즘'의 오타인가 싶어 찾아보니 '논리적 궁지(난점)'라는 의미의 불어라고 한다.

++ 소설을 완독했던 동력은 두 가지다. 역자가 故허수경 시인이라는 점, 소설 첫 페이지에 인용된 파스테르나크.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칠월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보리수나무에 꽃이 피니 말이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책에 부치는 편지」

 

 

그리고 파스테르나크 인용을 보는 순간 떠올랐던 브레히트.  

 

생각나는 건 단지, 내가 언젠가 그 얼굴에 키스를 했다는 것.

그 키스도 구름이 떠있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 브레히트 '마리아 A.의 회상'

 

취향 어디 안 간다고 이런 아포리즘 같은 문장에 한결같이 치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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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조국 이후의 한국 정치
고종석.지승호 지음 / 싱긋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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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인지부조화에 빠지면 답이 없다. 이에 비하면 광신도는 귀여운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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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이스탄불
부르한 쇤메즈 지음, 고현석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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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우리가 고통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p.389

'부르한 쇤메즈'

책을 읽는 동안 종종,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서 한 번 더. 버릇처럼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억한다.


이 소설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듣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내용과 형식 면에서 '소설'이라는 전통적인 정의에 걸맞는 소설을 읽은 지가 얼마인지 꼽아보게 하는 『이스탄불 이스탄불』. 읽는 내내 이토록 스토리텔링이 강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감동했다.


책 소개에 '21세기 고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소설을 완독하고 나니 이 표현이 얼마나 적확한가 새삼 공감한다. 장담컨데 이 소설은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회자되는 고전이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소설이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다. 영상이나 이미지와 달리 텍스트가 구현하는 온갖 표현과 장면에는 비위가 무척 강한 편인데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 왜 세 손가락인가 하면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이 소설이 유일하진 않을 것이므로. 


모든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고통에 내성이 없도록 태어났다. 고문은 그 고통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위정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이다. 아마 고문을 금하는 국제 조약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유명무실한 약속이다.


작가의 이력과 소설 속 배경으로 추측컨대 시기는 아마 2010년 대, 구체적으로 에르도안 집권 중반기 쯤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와 동시대 인물로 보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고통스럽고 가슴 아팠던 이유 중에는 바로 이런 배경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위 정치범으로 지하감옥에 갇힌 화자 네 명의 입을 통해 진행된다. 이들은 고문으로 극한에 몰린 육체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돌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심문 중에 자신의 동료들 혹은 사랑하는 이들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하여 상상의 얘기만 나눈다.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고전적인 소설 형식을 빌어왔다는 건 이런 전개 방식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상상 속 이야기를 나누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꼽는데 쇤메즈는 화자들의 입을 통해 보카치오를 대놓고 그것도 여러번 언급함으로써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소설적 형식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사실 나는 보카치오보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아마 이런 형식의 소설의 계보를 그린다면 '보카치오 - 초서 - 쇤메즈'이지 않을까. 사적 감상으로 내가 그리는 계보는 그러하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쇤메즈의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보카치오의 외형적 형식과 초서의 내형적 서술 구조가 문학적으로 진일보한 소설이라고 느꼈고 소설로도, 문학으로도 거의 완벽한 인상을 받았다. 스토리텔링, 서사 구조와 내러티브, 플롯 등 소설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독자의 오감을 충족시킨다. 이제 3월이지만 아마 올해 내가 읽은 그리고 이후 읽을 소설 중 최고의 소설일 것이 틀림없다.


목차는 첫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열흘로 나누어져 있고 씨줄과 날줄을 엮듯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와 화자들의 사연이 플롯을 이루며 정교하게 서술된다. 작가의 대단한 점은,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도 화자들의 현실 이야기도 모두 하나같이 문학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난지도에서 핀 이름없는 들꽃의 감동과 여운이 이렇지 않을까.


나의 애정은 데미르타이에서 의사로 다시 데미르타이로 넘나들었는데 결국 일격을 당한 건 이발사 카모에게서였다.

다음은 소설을 읽다가 전율했던 장면.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던 심문자는 손에 쥔 진압봉을 마치 장난감인 양 빙글빙글 돌리다가 위로 치켜들었다. 심문자는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심문자가 치켜든 손을 한 번에 잡아챘다. 진압봉은 공중에 떴다. 심문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p.120


'나의 오늘이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라는 신파같은 아포리즘이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터키 현대사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의 주인공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펜의 힘'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쇤메즈는 한 권의 소설로 지구 다른 나라에서 터키와 무관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던 타국인인으로 하여금 터키의 현대사를 공부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정자들을 향한 저항과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했다.


소설은 작가 후기도, 역자 후기도 없이 바로 끝난다. 내겐 그것이 '이스탄불'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졌다.


故신영복 선생이던가, 어느 정치인이던가.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소하고 몇 년 후 우연히 길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당사자와 마주쳤는데 상대가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 비스무리하게 하고 지나치더라는 거다. 길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멱살을 쥐고 내게 왜 그랬냐고 악을 쓸 거라고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냥 허무하고 기운이 빠지더라고.


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그건 마치 죄는 미워하고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일종의 면죄부처럼 느껴진다. 성선설, 성악설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악은 그냥 악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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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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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There is only good vodka and very good vodka. there is no such thing as bad vodka.”
(번역) ˝보드카 좋은 거, 아주 좋은 걸로 주시오.- 나쁜 보드카야말로 최악이지.˝

이쯤되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지.
완독하긴 했지만 읽는내내 읽는 게 의미가 있을까 씨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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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9-11-1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나쁜 번역이네요.

안녕하세요? 최근에 <최후의 증인> dvd를 사서 다른 알라디너들은 어떻게 보셨나 살피다 여까지 오게 됐어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