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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 마음산책

 

10년 전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지나간다'고 <청춘의 문장들>을 읊조리던 작가가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떨어지는 꽃잎 앞에서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며 <청춘의 문장들 +>로 돌아왔다. 이번 책은 산문과 대담이 이어지는 구성이 눈에 띈다. 불혹이 지난 작가가 돌아보는 청춘은 어떤 울림을 줄런지 기대된다. 김연수는 이름만으로 구입하는 몇 안 되는 국내작가. 그의 신간은 언제나 반갑다. 그의 에세이는 더욱 반갑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 이소영 옮김, 돌베개

 
평화로운 방에서 방만한 자세로 펼치는 것이 미안한 책이 있다. 프리모 레비의 책이 그렇다.
어떤 종류의 타인의 고통은, 그 고통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일종의 원죄의식을 가지게 한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나아닌 타자의 고통을 나는 이해할 수 없음으로 해서 위로하는 한 마디조차 오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건 그런 것이다. 한없이 시선을 낮추고, 가슴을 비우고, 판단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고 다만 침묵으로 마주 봐야 한다.

그가 부디 평화로운 안식에 들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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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 / 유예진 옮김, 은행나무

 

잭 매니건의『고전의 유혹』중「마르셀 프루스트」편을 읽다가 박장대소했는데 바로 이 부분, (요약하면)'사람들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딱 한 부분만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셀이 마들렌을 차에 적셔 먹으며 과거의 순간을 떠올리는 장면이다.'때문이다. 예전에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도 삼순이의 입을 빌어 이 마들렌 얘기가 나왔는데 그때도 딱 이 장면이었다. 고백하건데 내가 이 드라마를 여태 기억하는 건 드라마 자체보다 '저 작가는 정말 저 지루한 소설을 다 읽었단 말인가?' 궁금해했던 기억 때문이다.
이제껏 소설을 읽던 도중에 포기한 작가가 딱 두 명 있는데 M.프루스트와 V.울프 여사다. 두 사람 소설의 공통점은 의식의 흐름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편『스완네 집 쪽으로』를 초반 50여 페이지 읽다 내팽개쳤을 때만 해도 나는 순진하게도 다시는 이 작가를, 이 소설을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지금은 뭐랄까. 프루스트는 어느 길을 가도 버티고 있는 거대한 문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문학'이라는 는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관문처럼 보인다. 실제로 책장에 프루스트의 소설은 없지만 프루스트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평전은 제법 꽂혀 있다.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를 이해하는 것부터, 가 나름대로 내 최선인 것. 그러니 프루스트의 미술평론이라는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저자 입문용이라는 이 위대한 생각시리즈는 모두 솔깃한 저자들로 목록이 구성되었다. 

 

 

 서머힐에서 진짜 세상을 배우다

 채은 / 해냄

 

신간코너에서 오랜만에 '서머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유학 시절, 얼굴과 이름만 알고 지내던 한 (여)선배는 기혼이었다. 어느 날 이 선배에게 호감이 확 상승하는 계기가 있었는데 선배의 결혼에 대한 일화를 듣고서였다. 그러니까 남편이 청혼할 때 서머힐을 다룬 책을 건네면서 아이를 이렇게 키우고 싶다고 했다는 거다. 실제로 선배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은 우리나라 교육풍토를 생각하면 꽤 파격적이다. 일화를 하나 들자면 이 부부는 아이가 공부는 물론이고 숙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매번 새학년이 되면 담임에게 이런 부분을 얘기하고 미리 이해를 구한다고 한다.
국내에도 어느새 대안학교가 제법 자리를 잡았다. 학교와 교육의 본질에 대해, 처음으로 돌아가서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학교폭력에 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학교가 아이의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할 때 부모는 학교에 자신의 아이를 맡겨서는 안 된다. 부모라면 아이를 지키는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결정할 때 아이만 생각해야 한다.

 

 

 유럽 책마을에서

 정진국 / 봄아필

 

'유럽'도 좋은데 '책마을'이라니. 이건 마치 일부러 콕 집은 것 같은 제목이지 않은가 말이지.
농담 삼아 하던 '이민이나 갈까'가 제법 진담이 섞이니 '이민 갈까'가 되었다. 이민 얘기를 할 때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건 이민의 대상국이 언제나 유럽, 그것도 북유럽이라는 것. 결국 내가 살고 싶은 땅의 이상적인 조건은 오염되지 않은 자연인가 보다. 돈 안 들이고, 기운 안 쓰고 유럽도 보고 책마을 구경도 하고. 여러모로 끌리는 기행에세이.

* 이 책은 개정판인데 구간과 목록을 비교해 보면 내용이 추가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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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도정일 / 문학동네

 

 황현산, 김남주에 이어지는 산문을 읽는 즐거움. 전작들에 대한 만족이 다음 에세이로 이끈다. 그리하여 눈에 띈 신간. 인문학자이면서 문학비평가의 에세이라니 이보다 더 혹하게 하는 키워드가 있을까.

* '인문학의 위기'가 이젠 흔한 유행가 가사가 된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인문학이 주변에 미치는 스펙트럼은 여전히 넓고 그 영향력도 유효하다.

 

 

 나의 인생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 이기숙, 문학동네

 

 전쟁이 낳은 비극 중 하나는 그 후유증이 후대의 몫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있다. 이를테면 2차대전과 나치의 인종주의를 피해 국경으로 갔던 스테판 츠바이크와 발터 벤야민은 국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학계는 두 문인을 잃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러니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이력은 오히려 신선하다.
작가 약력을 보면 무사히 국경을 넘은 그는 오래토록 문단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과 후학을 남겼다고 한다. 작가들이 싫어하는 비평가는 역설적으로 독자에겐 단비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의 생애가 궁금하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레이먼드 챈들러 / 안현주, 북스피어

 

 이건 순전히 나한테 국한된 얘기지만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는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늘 헷갈리는 작가들이다. 미국에서 출생했다는 것 외에는 문학적으로 공통점이 전혀 없는 이들이 왜 헷갈리는지 정말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그렇다.

소설은 참 재미있지만 에세이는 별로인 작가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 또 소설도 에세이도 다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도 있다.

이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가가 스티븐 킹인데 그는 '글은 일단,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장담을 실천하는, 독자로서는 참 고마운 작가다.

스티븐 킹의 영향인지 추리(스릴러) 장르의 대가는 에세이도 재미있게 쓸 거라는 막연한, 근거 없는 기대감 같은 게 있다. 늘 자자한 명성을 듣지만 막상 챈들러의 소설은 아직 읽은 게 없다. 이번 신간은 그의 편지 68편을 엮은 것이라 엄밀하게는 에세이가 아니지만 그의 육성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지난달에 LOA의 챈들러 전집을 구입했는데 그의 픽션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자연인 챈들러를 먼저 접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이명원 / 새움

 

3월 신간은 아니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 리스트에 넣어본다.

반갑게도 고마운 지인이 개정판과 초판 두 권을 보내주었다.

내게 이명원으로 가는 키워드는 역시 김윤식이다.
존재 위치로 보면 다윗과 골리앗 쯤일(이 구도는 지금도 여전하다), 이명원이 김윤식의 표절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을 때 김윤식의 방관과 기성문단의 날선 반응은 수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갑갑하다. 강유원이 '너는 틀렸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을 때 유연하고 소탈한, 선배답고 스승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故이윤기의 이른 영면이 새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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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고골은 종교에 심취한 사람으로서 결혼하지 않았고 마흔세 살 무렵 미발표 원고를 소각한 뒤 의도적으로 아사했다. 그러나 란돌피가 그린 (카프카나 보르헤스가 창조해 냈을 법한) 고골은 고무풍선과 결혼한 사람이다. 그것은 멋지게 부풀릴 수 있는 인형으로서 남편의 기분에 따라 다른 형태와 크기를 취한다. 이런저런 형태의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고골은 그녀와의 성관계를 즐기며, 그녀에게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Caracas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 이유는 그 미치광이작가밖에 모른다.
몇 년간은 모든 일이 잘 진행되다가 고골이 매독에 걸리게 되는데, 그는 이에 대해 매우 부당하게도 카라카스를 비난한다. 말이 없는 아내에 대한 그의 양가적인 태도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도를 더해 간다. 그는 카라카스가 자위를 한다고, 심지어는 바람을 피운다고 비난하며, 그녀는 억울해하며 종교에 과도하게 의지하게 된다. 마침내 화가 치밀어 오른 고골이 카라카스에게(다분히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공기를 주입함으로써 그녀는 폭발하여 대기 중에 흩어지고 만다. 부인의 유해를 수습한 뒤 이 위대한 작가는 그것을 벽난로에서 태우는데, 그의 미발표 작품들도 그 유해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 난롯불에 고골은 카라카스의 아들인 고무인형도 던져 넣는다. 이 마지막 파국을 들려준 뒤 그 전기 작가는 고골이 아내를 구타했다는 비난에 대해 그를 변호하고는, 그의 고매한 천재성에 경의를 표한다
.

-p.78, 제1부「단편소설」중 '8. 토마소 란돌피' 

 

 블룸은 단편소설의 두 전통을 체호프 파와 보르헤스 파로 나누는데 두 계파를 읽는 방식을 체호프에게선 진실을, 보르헤스 또는 카프카에게선 전도된 진실을 찾는 것으로 정의한다.

 블룸의 이런 기준을 적용한다면 발췌한 란돌피의「고골의 아내」는 고무풍선 아내라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보나 실존인물 고골을 등장시켜 실제 같은 허구를 들려주는 이야기 방식으로 보나 보르헤스 파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지만, 고골 탓인지 고골의 정신을 잇는 나보코프 탓인지 여하간 블룸은 란돌피를 체호프 파로 분류하고 싶은 듯하다. 

 

 비평의 역할은 다양하겠으나 아무래도 대상 작품을 읽기 전이라면 독자와 작가를 이어주는 관문의 역할을, 이미 읽은 후라면 개인적독서가 사회적독서로 확장되는 기회가 된다. 그런 점에서 란돌피의「고골의 아내」는 모순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발췌문이 이렇게 재미있을 때는 대개 언급된 작가와 작품을 찾아보고 원문이 읽고 싶어지는데 '토마소 란돌리' 혹은 '고골의 아내'는 블룸의 비평을 읽은 것으로 충분한 포만감을 느꼈기 때문. 오히려 란돌피 보다 고골에게 더 흥미가 가는데, 언젠가 읽었던 단편소설집으로 막연히 고딕소설 작가려니 했던 고골을 좀 더 폭넓게 읽었어야 하지 않았나 계기가 됐다.

 

『독서 기술』에 등장하는 작가 중 란돌피 외에 언급하고 싶은 또다른 작가는 바로 체호프다. 블룸이 읽은 체호프의 단편「키스」가 어찌나 매혹적인지 '당장 읽어봐야겠다!'는 충동이 갈증처럼 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고개가 갸우뚱-. 집에 체호프 단편이 있는 것 같은데. 분명히 읽었던 것 같은데-. 책장을 훑었더니 역시나 민음사판『체호프 단편선』이 있다.

책장에서 책을 확인하고 나니 우습게도 이 책을 읽은 기억이 '확실하게' 난다. 아울러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읽었던 감상도 희미하게 떠오르고. 직전까지 내가 체호프를 읽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누군가 그토록 깊게 매료되었던 작가가 내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위화감 때문이었나 싶다.

 

 사실 체호프의 소설이나 희곡을 읽는 기분을 정의하면 더도 덜도 아닌 딱 '완두콩 한 알을 숨긴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일어난' 느낌이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을유문화사 판『체호프 희곡선』을 읽을 때였다.

목록은 대표작인「갈매기」「바냐삼촌」「세 자매」「벚나무 동산」네 편인데 하도 지루하고 재미도 없고 집중도 안 돼서 첫 번째 목록「갈매기」만 읽고 반납해버릴테다! 결심 아닌 결심을 곱씹고 또 곱씹었더랬다. 그리하여「갈매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간신히 넘기고 미련없이 도서관에 반납했으나 며칠 뒤 책을 다시 대출했다.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바로 '고전의 힘'.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완결성을 갖춘 이야기에 담긴 작가의 내공은 이렇듯 은근하고 묵직하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가 무섭게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자의 희곡 전집을 주문한 걸 보면 아무래도 체호프라는 매트리스에는 콩 한 알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도 남을 어떤 특별함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듯 내게 늘 콩 한 알의 불편함을 안겨 주는 체호프인데, 블룸이 읽은 체호프는 어쩜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있는가. 혹시 그가 읽은「키스」는 다른가. 이쯤되니 이 단편을 무조건 읽어봐야겠다는 오기가 드는데 불행히도 민음사 판에는 체호프의 초기작인「키스」가 없다. 검색을 해보니 이 단편이 수록된 번역본이 있긴 하나 단편 하나 때문에 책을 사는 것이 망설여진다. 
연유는 모르지만, 작가가 아닌 작품 별로 저작권이 등록되기라도 했는지, 국내에 번역된 체호프 단편소설은 출판사마다 목록이 살짝 엇갈리는데 즉 체호프의 전집을 읽으려면 다른 출판사의 체호프를 각각 모아야 된다는 얘기. 여튼, 그런 이유로 가능한 겹치는 목록을 피해 이미 다른 출판사의 체호프를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단편 하나 때문에 또 한 권의 체호프를 목록에 보태야하나 아무래도 망설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민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집에 있는 창비 세계문학단편선 중 러시아 편『무도회가 끝난 뒤』에 마침 문제의 단편이 수록되었던 것. 제목은 '키스'가 아닌「입맞춤」인데 사소한 호기심을 풀고자 검색해보니 러시아어 원제는 국내의 '입맞춤'이 아니라 블룸의 '키스'가 맞다. (둘의 차이가 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다만.)
그리고 마침내 체호프의「입맞춤(혹은 키스)」를 읽고 난 감상은 역시나 그의 다른 단편을 읽었던 예전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나를 사로잡은 건 체호프의 단편에 매혹된 블룸인지도 모르겠다. 방점을 '체호프'가 아니라 '해럴드 블룸'에 찍어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블룸을 매혹시킨 체호프를 발췌하면 이러하다.
 

체호프의 초기작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키스The Kiss」로서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쓴 작품이다. 리야보비치는 포병 여단에서 "가장 소심하고 재미없고 내성적인 장교"로서, 어느 날 저녁 은퇴한 장군의 시골 저택에서 열린 사교 모임에 동료 장교들과 함께 참석한다.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루해진 리야보비치는 어느 어두운 방에 들어서고 모험을 경험하게 된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한 여인이 그에게 키스를 한 뒤 물러선다. 그는 서둘러 빠져나오고, 그 후 그 우연한 만남에 사로잡힌다. 그 만남은 처음에는 환희를 안겨 주었지만 곧 고통으로 바뀐다. 이 가련한 남자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신원을 전혀 알 수 없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전혀 없는 여인과.
그의 포병대가 그 장군의 저택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리야보비치는 공중 목욕탕 근처의 작은 다리를 걷다가 빨래걸이에 걸려 있는 젖은 시트에 손을 뻗어 만진다. 차갑고 거친 감각이 그에게 엄습해 오고, 그는 강물을 내려다 보는데 거기에는 붉은 달이 비추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리야보비치는 인생이란 앞뒤가 맞지 않는 농담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다른 모든 장교들은 장군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리야보비치는 홀로 잠자리에 든다.
키스 장면 이외에는 차갑고 축축한 시트를 만지는ㅡ말하자면, 키스와 반대되는ㅡ장면이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 장면은 리야보비치를 파괴하지만, 키스도 마찬가지다. 희망과 기쁨은 아무리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절망보다는 강하며, 궁극적으로는 더욱 치명적이다. 나는「키스」를 읽으며 내가 예전에 체호프에 대해 쓴 글에서 지적한 점을 되뇌인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절망케 하리라." 이것이 체호프의 복음이다. 다만 이 우울한 천재는 유쾌하게 살 것을 고집했다. 리야보비치는 자신의 운명이 정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지 앟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일은 이 이야기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 p.42, 제1부「단편소설」중 '2. 안톤 체호프'  

 

* 발췌를 옮기면서 묘사-서술 부분이 블룸의 것과 내가 읽은 것이 미묘하게 다른 것을 발견했다. 단적으로 블룸이 읽은 '공중 목욕탕 근처의 작은 다리 위 빨래걸이에 걸린 시트'가 내가 읽은 창비 판은 '장군 댁 수영장과 다리 난간에 걸쳐진 시트'로 등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체호프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어야 된다는 점. 감성을 열고 읽을 때에 비로소 체호프의 문장 행간에 배어 있는 작품의 쓸쓸함, 개인의 외로움, 삶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읽을 때보다 두 번 읽을 때, 두 번 읽을 때보다 세 번 읽을 때... 매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낯선 감정에 눈을 뜨게 된다.

블룸의 비평 혹은 독서후기는 단순히 독서의 부산물이라고만 보기에는 지나치게 재미있고 그 자체로 독립된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책 혹은 작가를 향한 흥이라든지 진지함이라든지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 그에 더불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나도 같이 저자의 그런 감정에 전염되곤 한다. 그러므로 블룸은 작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두 번째 저자이며 나아가 자신의 독자를 만드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그 증거로 나는 이 한 권을 읽는 동안 체호프와 디킨스를 새로 구매했고,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을 계획을 세웠으며, 책장에서 밀턴의『실낙원』을 확인하며 새삼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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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케인의『거장처럼 써라』에 대한 이동진 기자의 추천사를 옮기면,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실용적 조언과 영문학사 거장들에 대한 흥미로운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는 영양가 높은 책' 이라고 한다.
『거장처럼 써라』 의 집필 의도는 한마디로 '거장의 글쓰기로부터 작법을 배운다'라는 건데, 사실 글(시, 소설, 논문 등 텍스트로 된 것이라면 뭐든) 쓰는 방법에 관한 책만큼 쓸모없는 책도 없다. 좋은 작가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3多, 즉,  다독/ 다상량/ 다작 이상 없기 때문. 한마디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글 잘 쓰는 방법' 혹은 '작가가 되는 방법'을 읽는 건 '돈 잘 버는 방법', '결혼 잘 하는 방법'을 읽는 것 만큼이나 쓸 데 없는 낭비다.
어쨌든 늘 미묘하게 취향이 빗나간다 싶던 이동진 기자의 추천사 '영양가 높은'에 혹해서 읽은 『거장처럼 써라』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유익했다. 여기서 유익하다는 건, 작가의 작법 스타일을 안다는 건 다시 말하면 작가의 소설을 이해한다는 의미도 되는데 이 책이 이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기 때문. 예를 들면 멜빌의 시적인 문장이 두운을 맞추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던가 멜빌이 자신의 작품에서 기교와 상징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대한 친철한 해석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독서도 결국 유흥이라고 볼 때, 재미와 유익 중 선택을 해야한다면 당연히 재미다. 그런 점에서 다행하게도 이 책은 일단, 무엇보다, 재미있다.
이 책에는 발자크를 시작으로 21인의 작가가 등장하는데 이 중 내가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작가는 네 명이고, 그 중 한 명이 크누트 함순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나기 전까지 이름도 낯설었던 함순이 내게 예상 못 한 큰 재미를 준다.
작가도 모르고 작품도 모르는데 이 챕터는 뛰어 넘을까- 약간 심드렁한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는데 직후에 그만 육성으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결국 책을 읽다 말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아낙: 크누트 함순이라는 노르웨이 작가는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를 지지했대
친구: 왜?
아낙: 영국이 싫어서!

 

아낙: 독일군이 조국을 점령했을 때도 함순은 히틀러를 지지했대. 왜인지 물어봐줘
친구: 왜?
아낙: 영국이 싫어서!

그러니까 작가로 비교적 빨리 성공해 앞날이 창창했던 함순의 미래에 암운을 가지고 온 건 2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시기에 함순은 독일의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심지어 그 히틀러가 조국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도 함순은 히틀러를 지지한다. 왜? 영국이 너무나 싫었으니까. 친독주의자가 아니었던 함순은 그저 영국이 너무 싫었던 반영주의자였기 때문에 히틀러와 히틀러의 독일군을 지지한다. 노벨상을 수상했던 이 작가가 내게 그토록 낯설었던 건 아무래도 저런 배경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나마 전후 나치 지지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하니,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함순으로선 불행 중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함순의 재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격언이 떠오른다. 글 잘 쓰는 양반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하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만 어쩌겠는가. 작가도 인간인 것을.

 

한편 이 책은 다음의 발췌문처럼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부분도 있다.

 

애초에 카프카가『변신』을 쓴 의도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개중에는 카프카의 의도를 눈치챈 이들도 있다. 『포트노이 씨의 불만』(1960)의 저자이자 퓰리처 상 수상작가인 필립 로스도『변신』을 배꼽 빠지게 웃으며 읽었다고 한다. "나는 …… 책상머리에 앉아서 떠벌리는 프란츠 카프카라는 코미디언과 그가 쓴『변신』이라는 제목의 웃기는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낄낄거렸던 대목에서는 카프카 자신도 글을 쓰다가 혼자 미소를 지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배꼽을 잡았다. 왜 아니겠는가. 이토록 지독하게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징그럽지만 정말 웃긴 소설이다." - pp.166-167 『거장처럼 써라』

 

이 문단을 읽고 내가 받은 충격은 중 1때 『변신』을 처음 읽고 받은 충격과 거의 맞먹는다.
아니, 그 암울하고 음울하고 음습하고 피폐하고 읽는 내내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기분과 씨름하게 만드는 카프카의 소설이 배꼽 빠지게 우습다고? 게다가 작가 역시 웃음을 주기 위한 의도로 썼다고?

카프카는 소설로 내게 충격을 주더니 이렇게 또 한 번 내 뒤통수를 친다. '문학이란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어야 한다'던 카프카의 말은 착실하게 자기실천적 금언이었던 셈.
어쨌든『변신』이 그런 의도로 쓰여졌다는 걸 알고 나니 카프카의 벽이 한층 낮아진 것을 느낀다. 어두운 공간을 메웠던 불길한 상상의 이미지들이 불을 켜는 순간 밝은 빛속으로 일제히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아마 이후로는 (나로선 여전히 괴상하게 보이는) 그의 유머를 즐기는 데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다 편하게 마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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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6-1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패스했던 책인데 담습니다.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실용적 조언,이라는 말을 내세운 책이 하도 많지만
이 책은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카프카는 그랬군요, 역시. 문학이란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