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네 인생의 이야기」

이 소설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시간을 보는 관점, 시간을 통해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얘기한다.

 

1. 인과론적 해석 vs 목적론적 해석

하나의 결과물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심리학은 보통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해석과 아들러의 목적론적 해석인데, 인과론적 해석은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로 이어진다고 보고, 목적론적 해석은 현재의 목적이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관점이다.

  

2. 표의 문자 vs 표음 문자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관점을 바꾼다는 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데 소설이 설정한 '시간'의 패러다임을 이해하려면 먼저 언어학에 대해 약간의 기본 지식이 필요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류의 언어는 표의문자표음문자로 대변된다.

 

어느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7足(헵타포드) 생물 외계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즈가 호출된다. 루이즈는 거대한 거울로 묘사되는 체경을 통해 헵타포드와 대화를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헵타포드의 문자는 말하자면 표의문자에 가깝다. 인류가 현재 사용하는 문자체계는 알다시피 음성에 기반한 음성+기호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다.

표의문자는 표식, 그림과 같이 직관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자로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듯 하다.

흔히 드는 예가 교통표지판인데 붉은 원 안에 붉은 사선이 그어져 있는 표식을 봤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진입금지'라고 해석한다. 기호를 보는 순간 뇌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읽는 과정 없이 바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같은 기호를 글자(인류 언어)로 표현해보자. 짧게는 '진입금지'부터 길게는 '여기서부터는 차량통행을 금지합니다'까지 표현할 수 있다.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이 의사소통에 있다고 할 때 그냥 단순비교로도 인간의 표의문자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고 낭비로 보인다. 

  

3. 사피어-워프 이론 vs 페르마 이론

헵타포드와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를 구분했다면 다음 단계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개의 이론인 사피어-워프 이론과 페르마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사피어-워프 이론 - 인간은 사용하는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

페르마의 최적화 이론 -  빛이 표면에 도착하는 최단 거리

 

이 두 이론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처음과 끝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핵심이다.

 

4. 언어와 인지

마지막으로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류의 언어의 차이를 보자.

 

헵타포드의 언어 - 동시적 체계, 목적론적 해석

인류의 언어 - 선형적/순차적 체계, 인과론적 해석

 

언어학자인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게 되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 기존에 갖고 있던 인류의 시간 개념이 깨어지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는다(사피어-워프 이론). 즉 과거-현재-미래를 순차적으로 나열하여 해석하는 선형적 체계,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에 이른다는 인과론적 태도에서 벗어나 헵타포드의 동시적, 목적론적 사고 체계를 체득하게 되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지하게 되면서 루이즈에게 시제(時制)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루이즈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인류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시제(時制)의 틀 안에서 운용된다. 즉 '읽었다(과) - 읽는다(현) - 읽을 것이다(미)'로 이어지는데 이와 달리 헵타포드의 언어는 시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한 덩어리 즉 동시적(同時的)으로 기능한다. 즉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과정 전체가 하나의 결과=목적이기(페르마 이론) 때문에 헵타포드의 사고 체계에서 시간은 연쇄적,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의미도 없다. 이것을 페르마 원리에 빗대면, 빛이 대기를 통과해 표면에 닿는 최단 거리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굴절 등의 우연적인 요소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특정 목표지점에 도착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 목적인 최단 거리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소설에선 '목표는 이미 결정되었으며 남는 것은 최소와 최대라는 목적 뿐'이라고 표현한다(이 내용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등장하므로 페이지 표기는 생략합니다).

 

5. 결정론적 세계관

여기까지 전개하면 떠오르는 개념이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흔한 말로 '운명론적 태도'로 이미 결정지어진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태도인데, 여담이지만 이쯤 이르면 뉴턴의 역학이론에서 출발해 아인슈타인 - 하이젠베르크 - 슈뢰딩거를 거쳐 다시 뉴턴인가 싶은 약간의 논리적인 비약의 유혹도 살짝 생긴다. 

 

궁금한 건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과연 낙관적, 긍정적인 태도로 볼 것인가인데, 일단 소설은 '인과적 해석'에서 '목적론적 해석'으로의 시간 패러다임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일생을 시작(탄생)과 끝(죽음)으로 연결된 하나의 사건으로 동시적으로 관조하는 루이즈의 변화는 비극이 예정된 미래를 성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기실 이러한 관점이 긴 생애 동안 마주치게 될 비극을 받아들이는 데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면 갈등도 고민도 없다.

 

6. '세월의 책'

소설은 미래를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식인 인과론적 태도와 목적론적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의 책'을 등장시킨다. 한 여자의 생애가 기록된 '세월의 책'이 있다. 여자는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 그녀가 하게 될 일을 미리 읽어본다. 그리고 그 날이 왔을 때, 그녀는 책에 적힌 대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자유의지'이다.

이 딜레마가 재미있는 건 행동을 해도, 안 해도 이미 그녀의 자유의지는 박탈당했다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가 기본 상수로 이미 지정되었기 때문에 이후 그녀의 행동은 그 상수에 따른 결과일 뿐이고, 때문에 자유의지는 박탈되었다는 해석이 재미있다.

결론은, '자유의지'가 존재하려면 '세월의 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면 '세월의 책'을 읽지 않던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건 그 순간이 왔을 때 어떤 행동을 해도 or 안 해도 이미 자유의지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즈는 말하자면 세월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이 50년인 걸 알며 그 책의 결말이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당연하다). 루이즈는 남편과 이혼할 것이고 이후에 딸이 산악 등반 중 추락으로 사망할 것을 안다. 하지만 루이즈는 이미 자신이 봤던 그 미래의 길을 간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고 동시적, 목적론적 세계관을 터득한 루이즈에게 시간은 이제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미래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인데 루이즈에겐 그 미래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이미 일어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듯 이미 알고 있는 미래도 의미가 달라진다. 미래를 아는 루이즈에겐 이혼도 딸을 잃는 것도 자신의 전 생애가 씌어진 50년 인생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루이즈에게 의미를 갖는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7. 미래가 갖는 의미 

숙명은 뒤에서 다가오고, 운명은 앞에서 다가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숙명은 피할 수 없지만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점에선 굉장히 결정론적인 이야기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지만 바꿀 수 없고, 그리하여 정해진 미래로 간다는 것이니까.

여기서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

a. 미래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인가, 아직 내가 모르는 시간인가.

b.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다면 그것은 미래인가 아닌가.

c. b가 미래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兩義的)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인류와 헵타포드들의 조상들이 처음으로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는 양 종족 모두 동일한 물질 세계를 지각했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궁극적인 세계관의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에 비해, 헵타포드들은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지각한다. 헵타포드들은 모든 사건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pp.188-189)

 

놀라운 점은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과 언어학의 개념을 황새 다리 쫓는 뱁새 심정으로 쫓아가던 와중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 정확하게는 조금 앞 부분의 '그릇을 사는 장면'을 읽으면서부터 고개를 갸웃(진짜 갸웃- 했다)하다 다시 지나간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겨가며 내용 전개 상의 시점을 재확인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어? 뭔가 좀 이상한데... 오독했나... 근데 아닌 것 같아... 어, 진짠가? 아닌가? 이런 과정을 거치고 세 번째 읽었을 때 작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순차적 시점으로 책 속 사건의 흐름을 의심 없이 쫓아갔던 것이다.

 

사족이지만 재미있는 점은, 스스로 좀 놀라운 깨달음이기도 한데, 나는 무의식 중에 루이즈에게 일어난 비극이 과거이길 바랐다는 점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다시 앞 부분을 뒤적거린 데는 그러한 바람이 컸다. 나는 이미 일어난 비극은 덜 슬프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을 사고로 잃은 개인사가 이미 발생한 과거이면 루이즈의 개인적 고통이 덜어지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앞서 액자식으로 등장했던 루이즈의 개인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라는 엔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울러 이 저항심이 정확한 시제를 확인하고자 책을 여러 번 읽게 했던 동기이기도 하다.

 

 

8. 컨택트(원제: Arrival) by 드니 빌뵈브

 

 

국내에 들어오면서 현지 제목 'Arrival'이 'Contact'가 되었다. 영화의 주제와 크게 동떨어진 제목은 아니다. 제목을 고른 센스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굳이?' 하는 의문은 남는다.

 

책과 달리, 당연한가?, 상대적으로 영화는 헐리우드 상업영화의 키워드를 곳곳에 배치한 점이 많이 아쉽다. 이들 키워드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소영웅주의'인데 이를 위해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언어가 안 통하는 외계인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중국과 그에 동조하는 몇몇 국가들, 우주전쟁 카운트 직전 헵타포드의 언어를 완전히 깨우치면서 미래를 미리 본 루이즈가 직통전화로 중국의 수장을 설득하고 우주전쟁을 막는 것,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 목적은 3천 년 뒤 루이즈로 인한 도움을 받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 것 등등... 상업영화 마인드에 충실한 사족은 개연성을 떠나 그냥 좀 많이 오글거렸다.

 

SF소설을 영화화할 때 역시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텍스트로는 부족한 상상의 빈 부분을 영상으로 확인한다는 것일 텐데, 이 작품의 경우는 이를 테면 헵타포드A와 헵타포드B로 정의되는 헵타포드들의 언어 - 글자가 그에 해당한다. 그것이 원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하나의 원이 분화? 변이? 등등의 형태로 '± 나선' 구성인가 막연히 상상만 했던 것을 작가와 관련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영상으로 구현한 장면을 확인하는 건 책에서 얻을 수 없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아래 이미지 참고)

 

 

루이즈가 들고 있는 판넬의 이미지가 헵타포드의 언어다. 

 

대개 원작을 시나리오화 할 때 원작자의 자문을 받기 마련이고 <컨택트> 역시 작가가 자문을 하였으니만큼 작가의 의도가 왜곡될 리도 만무하다. 책이 은유와 암시를 반전의 묘미로 활용했다면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착각할만한) 효과로 루이즈가 미래를 보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건 루이즈의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앞서 얘기한 '소영웅주의'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부분이다. 미래를 본 루이즈가 중국의 수장을 설득해 우주전쟁을 막는다니... 아, 이건 몇 번을 떠올려도 오글거린다.

 

쉽지 않은 내용이다. 머리는 이해하는데 적응이 안 될달까. 지구는 둥글다고 했을 때 16세기 이탈리아인들의 인지부조화가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시간을 시제(時制)와 무관하게 총합의 결과물로만 인지하는 이러한 태도가 정말 낙관적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알아도 그닥 쓸 데는 없지만 그래도 궁금한 의문.

- 봉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 루이즈와 대화를 나누는 헵타포드 둘의 이름이 원작과 다르다. 왜?

- 원작이 있을 경우, 원작 - 영화 순으로 감상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봤다면 어떤 감상을 느꼈을까.

 

 

* 영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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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보관함에 담은 6-7월 신간.

요즘 책을 구매하는 패턴은 M&M's 지퍼백에서 손에 걸리는대로 골라 먹는 식의, '보관함 picker'에 빙의 중. 한마디로 구매 우선 순위가 없다. 출판사 이벤트에 휩쓸릴 때도 있고, 아무 전조 없이 한참 뒷페이지 보관함의 책을 장바구니에 옮길 때도 있고.

 

 

워크룸프레스의 사뮈엘 베케트 선집으로 '장편'과 '단편집'.

가지고 있는 책과 목록이 겹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워크룸프레스가 이 시리즈에 비소설 산문도 포함했는지 궁금하다. 산문이 나오면 바로 구매각.

'선집', '전집' 등의 타이틀이 붙으면 반드시 꼭 사야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

이래저래 전작주의자는 피곤.

 

 

 

보르헤스의 신간『꿈 이야기』『상상동물 이야기』

남미 환상문학 작가를 향한 내 선호는 보르헤스 >>> 마르께스.

이쯤이면 보르헤스 전집이 한번 나와줘도 좋을 텐데, 늘 목마르게 기다리는 소식.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사 트릴로지 중 3부『딕타토르』

신간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일순 흠칫.

나 좀 모자란가봐- 했던 것이, 트릴로지이니 당연히 3부작인데 1, 2부를 구입하고선 관심을 끊었다는 거다. 우연히 발견 못했더라면 책장에 책 두 권 꽂아두고 내내 "로마사 트릴로지가 조기 있넹" 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년 1월에 시즌2 방영 예정인 동명 미드의 원작『익스팬스 1,2』

로커스상 수상, 휴고상 최종 노미네이트작. 덕분에 오랜만에 미드를 둘러봤다.

한드에 관심을 끊으니 미드, 일드, 중드 모두 시들. 이럼 안 되는데...ㅠㅠ

 

데이비드 웨버의 아너 해링턴 시리즈 중 장편소설『여왕 폐하의 해군』이 행책 작가선집으로 출간됐다. 근데 전작『바실리 스테이션』은 폴라북스, 후작은 행책이다...;  다행히 행책의 배려인지 표지의 위화감은 거의 안 느껴진다. 역자는 모두 김상훈. 행책 작가선집은 자칫 절판 지뢰를 밟을 위험이 크므로 이 책은 무조건 구매 우선 순위.

 

제임스 P.호간의『별의 계승자』가 아작에서 복간됐다. 나는 오멜라스 시리즈로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이 절판 뒤 중고가가 꽤 높았던 모양이다. 상품페이지 평에 온통 중고가와 복간 얘기인 걸 보면서 가진 자의 여유랄까 '오, 그랬군' 신기했다. 여튼, 복간됐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관심이 있거나 구매하려고 찾아 헤맨 사람은 얼른 얼른 사는 게 좋다. 어차피 이 장르 수요는 거기서 거기라 국내 SF출간작은 절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The Sea of Fertility' 4부작 영문소설. 모두 국내 미번역.

이하 시리즈 순 짧은 소개. (출처. 알라딘)

 

SPRING SNOW

Kiyoaki Matsugae's passionate and ill-fated love for the betrothed daughter of a Tokyo aristocrat brings him into disfavor at the Imperial Court

 

RUNAWAY HORSE

In Japan during the 1930s, a young man and his father discover they have conflicting views on patriotism

 
THE TEMPLE OF DAWN

A Japanese lawyer on pilgrimage to Bangkok and India in the early 1940's meets a beautiful young Thai princess and degenerates from spiritual seeker to sexual voyeur

 
THE DECAY OF THE ANGEL

During the last years of his life, Honda adopts an orphaned boy and teaches him about Japanese society and tradition

 

짧은 소개만 보면 제일 끌리는 건 3부 'THE TEMPLE OF DAWN'.

'from spritual seeker to sexual voyeur' 라니...... 우왕♥

이 연작은 검색해보니 1910-1960 까지 50년에 걸친 연인의 환생을 다루는 듯하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할복자살을 했다.

미시마는 다자이 오사무를 대놓고 싫어했는데 아마 아쿠타가와상을 두고 심사위원인 스승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다자이가 반목했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암만 그래도 죽은 사람을 두고 '생긴 거 운운'은 너무 찌질했지만, 본인이 아니니 그 속을 어찌 알리오.

현지인이 아니니 전후 일본의 분위기는 모르지만 가와바타, 미시마, 다자이 모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걸 보면 문학을 하려면 역시 남다른 감성을 지녀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다자이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고, 미시마가 노벨상을 받았더라면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아마 두 사람 모두 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튼 소설만 써도 아까운 삶인데 왜 엄한 데 영혼을 빼앗겼는지 참 알다가보 모를 양반 중 한 명. 이 양반의 생을 엿보면 작가로서 자부심이나 명예욕이나 욕심이 남못지 않았던 게 읽혀서 더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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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리우의 불안한 치안'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봤는데 조금 보다가 화면을 껐다. 내 비위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다. 내 비위야 그렇다 치고 다음은 영상으로 인해 깨달은 몇 가지 사실들.

 

올해가 올림픽이 열리는 해라는 것,

올림픽 개최 도시가 브라질 리우라는 것,

리우 올림픽 개막식이 이번주 토요일이라는 것,

 

이 세 가지를 오늘 새벽에야 알았다. 그나마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것도 아니다. 불과 5분 여 본 것만으로도 끈적이는 타르가 정신에 들러붙은 것처럼 찜찜하고 불쾌하고 역겨운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고서 알았다. 한마디로 나는 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다.

 

월드컵에 이어 올림픽까지. 왜 갑자기 브라질일까.

 

브라질은 내겐 개인적으로 두 가지 사건으로 기억되는 나라인데 첫 번째는 초5 때 단짝이 가족 이민을 간 나라로, 두 번째는 존 업다이크의 소설로 깊은 인상이 남은 나라다.

대개 이민이라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북미이거나 혹은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이었기 때문에 '아마존' 밖에 안 떠오르는 브라질로 간다니 어린 마음에도 우리는 친구를 걱정했다. 구체적으로 뭘 걱정하는지도 모르면서 걱정했는데 초딩의 단순한 논리로 부유한 친구네가 왜 '하필' 브라질로 이민을 가는지 좀처럼 이해를 못했다. 브라질은 그만큼 내겐 오지였고, 지구 촌구석이었다. 나중에 머리가 조금 더 굵어진 후엔 내가 어지간히도 북미 중심의 사고를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여튼 당시에는 그랬다.

 

그리고 존 업다이크의 소설『브라질』... 이 소설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인식의 저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내 이십대의 시작은 이 소설이 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이 하는 생각은 '이 소설을 읽다니 지지리 운도 없지'. 

카프카의 문학론은 언제나 공감하고, 추천 백만개를 날리고 싶고, 자주 인용하지만 그것도 객관화가 가능할 때 얘기이지 도끼와 망치가 두드리는 게 내 머리통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내 감성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보드랍고 연하고 깨어지기 쉬운 멘탈을 방패로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네 책장에 꽂혀 있던 낡은 책을 우연히 꺼냈다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는 한동안 후유증을 겪었다.

 

업다이크의 대표작이 '토끼 시리즈'라고들 하지만 내겐 업다이크 하면 단연 '브라질'이고 이후 내 머릿속에서 업다이크의 인상은 이 소설과 함께 박제되었다.

절판된 장편소설『브라질』은 인종, 계층, 계급, 성(性), 종교... 유사 이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이 등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인공인 연인들의 배경부터가 그렇다.

 

(아마 외교관인가 정치가였던 걸로 기억하는)고위급 공무원의 딸이자 백인인 이사벨과 빈민가 하층민이자 부랑아인 흑인 트리스탕은 사랑에 빠진 연인이지만 그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은 너무나 많다. 결국 겪을 수 있는 모든 시련을 겪은 끝에 마지막으로 이사벨은 주술의 힘을 빌어 자신과 트리스탕의 피부색을 바꾼다. 그리하여 백인의 피부색을 갖게 된 트리스탕은 그가 모체의 자궁에 배태되는 순간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그 모든 편견과 차별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주류사회에 편입된다.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아마 이 소설은 그렇고 그런 로맨스 판타지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기어코 엔딩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트리스탕은 피부색을 바꾸고 이사벨의 배경을 획득함으로써 자신에게 쏟아지던 모든 차별과 편견의 속박에서 벗어나지만 단 하나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본질은 벗어던지지 못한다. 피부가 하얗게 변하고 돈과 권력을 쥐어도 그의 본질은 하층민 부랑아 흑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며 형상은 말그대로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껍데기와 본질이 일치하지 않으니 트리스탕은 물리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정신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처럼 어딘가 불안하다. 그리고 트리스탕이 주류의 삶에 완전히 익숙해졌을 때 소설은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처음 이사벨을 만났던 해변으로 간 트리스탕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은 흑인 부랑아의 칼에 찔려 죽어간다. 

이사벨은 모든 남자의 아이를 가졌지만 단 한 사람, 사랑하는 트리스탕의 아이는 가질 수 없었다. 이는 끝내 합일을 이룰 수 없는 이사벨과 트리스탕의 본질을 매우 강박적으로 보여준 일종의 우화이기도 하다.

 

『브라질』의 엔딩은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책장을 덮을 당시엔 작가 때문에 불쾌했고, 시간이 좀 지나서는 이사벨 때문에 슬펐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트리스탕을 위한 해피엔딩이라고 수긍하게 되었다.

트리스탕을 찌른 건 과거의 자신이며, 찔린 건 거짓 껍데기였으며, 거짓 껍데기를 벗어던지며 트리스탕은 본질을 되찾는다. 결국 트리스탕은 스스로 자신의 껍데기를 찌르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쉽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작가와 화해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업다이크가 브라질리언이라 철썩같이 믿었다. 그만큼 소설 속 브라질은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존 업다이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잠깐이지만 인지부조화를 겪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94년에 출간되자마자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얘기가 하나도 안 이상한 이 소설은 브라질을 정의하는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금기와 본능과 광기가 전복되고 해체되고 조롱당한 후의 카니발의 새벽을 훔쳐본 기분이 드는 이 소설은, 다시 생각해도 스무살 새내기가 읽기엔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BLACK is a shade of brown. So is white, if you look. On Copacabana, the most democratic, crowded, and dangerous of Rio de Janeiro's beaches, all colors merge in one joyous, sun-stunned flesh-color, coating the sand with a second, living skin.

 

- i. The Beach, 『Brazil』

 

발췌는 소설『브라질』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첫 문단.

 

 

그리고 별 거 아닌 얘기_.

 

i. 한때 절판된 이 소설이 다시 읽고 싶어 아마존닷컴 장바구니에 담아놓고선 까맣게 잊었는데 새벽에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아마존닷컴에 접속했다. 그리고 연관 카테고리 '이 책 구매자가 구매한 다른 책'에 한강의『Vegetarian』이 있어 리뷰를 잠깐 읽던 중에 나도 모르게 하하- 웃었다. 이유는 카테고리만큼이나 두 소설에 대한 리뷰어들의 호불호가 비슷해서인데 두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같고 싫어하는 이유도 같으니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ii. 문동은 나머지 토끼들을 언제 출간해줄건지...?

 

iii. 토끼도 있고 역자 김진준도 있는데 혹 문동이 복간을 해주려나 기대하면 무리수인가.

 

iv.  테리 길리엄의 <여인의 음모>는 원제가 <브라질>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소설과의 연관성을 찾으며 봤던 이 영화는 다 보고 나면 두 번 분노한다. 국내판 제목에 한 번, 테리 길리엄의 제목에 또 한 번.

 

v. 올초에 나온 츠바이크의 신간이 마침『미래의 나라, 브라질』이다. 신간 소식을 보고도 조금 시들했는데 역시 읽어봐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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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거의 대부분 서재의 리클라이너 소파에서 읽는다. 책 읽는 시간은 깨어있는 동안 무시로.

대중교통 이용 중에는 책을 거의 못 읽는데 이유는 버스는 멀미가 나서, 지하철은 집중이 흐트러져서.

그렇지만 읽든 안 읽든 외출할 때 책을 늘 챙기는데, 일정 중에 시간의 공백이 생겼을 때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실물이 가진 물성을 격하게 아끼는고로 아직까지는 종이책만 읽는다. 책 한 권을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질감, 페이지를 넘길 때 손끝에 닿는 감각, 장정 등의 만듦새를 사랑한다.

앤 페디먼 식으로 말하면 책에 대한 내 애정은 궁정식 연애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내킬 때 수시로 책장에서 책을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는 습관 탓에 아직까지는 전자책의 장점에 매력을 못 느낀다.

(자칭)원형보존강박증이 있어 책에 직접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을 때 플래그 포스트잇을 이용하고, 발췌는 메모지나 개인 SNS를 적극 활용.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침대 머리맡은 아니고 책상에 최근 배송 받은 아리시마 다케오 소설 두 권, 뮐러 희곡선/산문선/해제집이 있다.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현재 4천 권이 넘어섰는데 일단 내 손으로 책장에 꽂은 책은 모두 소장하고 아직까지 책을 판매한 적은 없다. 그래도 심정적 저지선인 5천 권은 안 넘겨야지 한다.

배열 원칙은 대분류는 해외와 국내, 소분류는 전집 - 작가 - 출판사 순으로 책장이 따로 있다..., 따로 있었지만 최근 들어 점점 책장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정리해야되는데 엄두가 안 나서 내버려두는 중.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해문에서 나오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용돈을 받을 때마다 서점으로 뛰어가서 한 권씩 사모았던 탓에 특히 애착이 가는 시리즈. 어린 내게 살인 사건의 동기는 돈 아니면 치정이라는 절대명제를 가르쳐 준 고마운 책, 고마운 작가.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겐지이야기' 만화 원서. 나름 희귀본.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헤르만 헤세. 데미안이 왜 전쟁에 참전했는지 꼭 묻고 싶다. 나만의 문학 속 3대 미스테리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10년이 넘도록 '읽어야지'에 머물고 있다. 책은 골동품 수준(이미지 클릭).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아모스 오즈의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1권 20여 페이지를 읽다가 반납.

이유는, 이 책은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영어사전, 가톨릭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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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친과 각자 볼일을 보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 일이 조금 더 일찍 끝나 도서관에 들렀다. 그리고 신착도서 칸에서 발견한 황현산과 배수아의 에세이. 반납기일을 넘겨 대출정지 기간이라 대출은 못하고 일단 동친과 만나 나머지 볼일을 보고 점심도 먹고 동친은 집,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그리고 일몰 직전까지 읽은 두 권.

황현산의 책은 시비평에세이, 배수아의 책은 여행에세이.

 

 

 

먼저, 황현산의『우물에서 하늘보기』

첫번째 목차가 청마 이육사의 '광야'인데, 사실 나는 광야 첫 구절이 해석의 논란에 있는 걸 이 책에서 알았다. 학교에선 배운 기억이 없는데;;;;;

논란이 된 구절은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이중에서도 들렸으랴를 '들렸을리가 없다'는 부정형으로 해석할 것인가, '들렸다'는 감탄형으로 해석할 것인가 주장이 나뉜 것이다.

부연하면, 

 

'들렸을리 없다'(부정형)이면 앞 소절 닭우는 소리는 의미 그대로 '꼬끼오'인 거고,

'들렸다'(감탄형)이면 닭우는 소리는 개벽, 새로운 도래 등의 은유인 거고.

 

라는 것이다.

감탄형으로 해석해야 한다가 뒤에 나온 주장(70년 대 중반)인데, 양쪽 모두 상대를 완전히 설득시킬 의견을 내지 못해 지금까지 결론을 못 내렸다고 한다.

사실 작가는 원고지에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끝낸 것이고 또 그게 맞는데, 이렇게 후대에서 해석의 문제가 불거지는 광경을 볼 때마다 작가 스스로 '해제론'을 만들어 어딘가에 보물찾기로 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작품이 오역되면 제일 억울한 건 작가 본인이니까.

읽으면서 가슴 아팠던 목차는「박정만의 투쟁」편.

 

박정만은 1981년 5월 어느 날 그가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던 출판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의 잠적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했지만 무책임한 사람이기도 해서, 우리들의 관심은 또 한 차례의 잠적을 성사시켰을 어느 여성의 정체에 대해 더 많이 쏠렸다. 그러나 여자는 없었다. 그가 자신의 대학 동창이기도 한 어느 소설가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로 검은 차를 몰고 온 사나이들에게 끌려갔다는 것도, 이제는 문학인들의 집이 된 남산의 어느 시설에서 내리 사흘 동안 "청동상"처럼 온몸에 퍼렇게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려진 일이었다. -p. 178

 

박정만은 결국 고문의 후유증을 못 이기고 7년 후 사망한다. 공식사인은 간경화.

내겐 생소한, 이름을 처음 듣는 시인 박정만은 죽음을 앞두고 보름동안 300여 편에 가까운 시작(詩作)을 했다. 유작시를 비롯, 시전집이 있다.

저자는 대안은 역사를 전제로 하는데 역사는 어떤 문제도 해결한 적이 없다.(p.192)라고 말한다.

씁쓸하지만 옳은 얘기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종종 하시던 얘기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때그시절엔 술집에서 술 마시다 끌려가고, 집에서 TV보다가 끌려가고, 길가다가 끌려가고 그랬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사촌이 카투사 복무 중에 의문사한 일이 있어(가족이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영안실이었다), 아버지에겐 시대의 일부가 개인사가 된 그때그시절 얘기. 그래도 뭐. 선거가 있을 때마다 6시 땡- 하면 제일 먼저 투표소로 가서 우리가남이가당에 투표하신다.

제목은 잊어버렸고, 어렸을 때 TV에서 본 한국영화인데(흑백 분위기였던 걸로 보아 아주 옛날 영화였던 것 같다), 잘 나가는 교수(?)가 어찌저찌 알게 된 사람- 실은 남파간첩과 술을 마시는데 남파간첩이 "우리 건배합시다"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면서 건배하는 순간 두 사람 뒤로 커튼이 걷히면서 김일성 '존영'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교수는 남파간첩의 덫에 걸린 것이다. 앞뒤 얘기는 기억 안 나고 유독 이 부분만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건 어린 마음에도 '누명 쓰는 거 참 쉽구나' 공포를 느꼈기 때문.

쓰면서 되새겨보니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이 한국영화는 아마 반공정신 고취를 목적으로 한 선전영화였던가 싶다.

지난 3월에 통칭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었다.

총선이 일주일여 남았다. 당연히 선거판에 나올 수 있는 온갖 세태가 벌어지고 있다.

히틀러의 유명한 선전관 괴벨스의 명언 몇 가지를 옮겨본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사람들은 선동되어있다.

99가지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대중은 정말 개돼지일까. 먹을거리, 유흥거리만 주면 만족하는 가축일까.

가끔 동친과 하는 얘기인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패착은 친일청산을 못했다는 거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과 부조리와 비극은 친일청산 실패에서 시작한다.

 

 

 

다음, 배수아의『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비유를 들자면 첫타석 삼진, 둘째타석 삼진인데 셋째타석에서 홈런을 치는 작가가 있다. 작가(or 작품)에 대한 호불호 얘기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로 지금 딱 떠오르는 작가가 정혜윤인데 계속 별로다- 하다가『마술 라디오』에서 홈런을 친 경우로 이후 정혜윤의 신간이 나오면 눈여겨 보게 되었다. 나한테는 그렇다는 얘기. 반면 배수아는 계속해서 타석 삼진. 파울볼도 없고 사구도 없다.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잠자는 남자가 실존인물이긴 할까, 라는 거. 잠자는 남자와 나누는 대화도 마찬가지. 남자도 대화도 지나치게 소설적이라 이런 의문이 남는 것이다. 도중에 책 날개 안쪽의 프로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도, 집에 돌아와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확신을 못하고 있다. 이건 분명 문제가 있는 거다. 뭐가? 작가의 글쓰기가. 혹은 글쓰는 스타일이. 혹은 글쓰는 방향성이.

블로그식 글쓰기던가? 아마 그런 표현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인고 하니 개인 SNS에 쓰는,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만의' 글을 의미한다. '스타일리쉬'하다는 건 다른 의미로 개성적이라는 얘기인데, 작가의 글쓰기가 지나치게 '스타일리쉬'하면 독자를 일방적인 청자로 만든다. 작가에겐 발산이고 힐링일지 모르나 독자에겐 타인의 꿈 얘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배수아에 대한 나의 호불호는, 그리하여 여전히 유효하며 현재진행형이다. 그녀의 글은 소설, 수필, 번역- 장르 가리지 않고 여전히 불편하다. 하물며 그녀는 번역조차도 그녀의 언어로 채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에 그녀가 번역한 책이 꽤 있는 걸 보면(확인하고 심쿵;;;) 그녀의 글에 느끼는 불편함은 내 불호일 뿐, 대중은 그녀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다렸던 혹은 끌렸던 책의 역자가 배수아라 구매를 포기한 경험이 다수 있는 탓에 페소아의 책이 다른 역자의, 그것도 중역이 아닌 완역이 나온 것에 새삼 '다행이다'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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