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알베르 카뮈『이방인』中 미국판 서문.
- 김화영 옮김, 책세상

처음『시지프 신화』를 읽을 때 작가가 얘기하는 방식의 '부조리'가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작가의 습작에 가까운(또한『이방인』의 전신이기도 한)『행복한 죽음』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것이 바로『이방인』. 발췌한 서문에서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이 책을 나는 조금 읽다가 첫 장으로, 또 조금 읽다가 첫 장으로 되돌아가서 거듭 읽었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서 한 장 한 장 아껴서 읽고 또 읽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이방인』, 사랑하는 작가 카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손가락을 꼽아 보니)약 15개월 전의 일이다... 
서점에서『혼불』(최명희 / 한길사)이 사라진 후 재간을 기다리다 거의 포기할 무렵, 우연히 파주 헤이리 출판단지에서 한길사가 운영하는 북하우스에 아직 재고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얼른 북하우스에 전화했더니 출판사 보유분이 남아 있다고, 다만 상태는 안 좋다고 한다. 집에 가려고 비행기표를 끊어놓은 상황이라 가능한 상태가 좋은 걸로 추려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바로 입금, 이튿날 받았다.
책은, 평소 약간 결벽증적인 내 취향을 포기한다손 치더라도 좀 심각할 정도의 '중고' 상태로 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구입 전 출판사측에서 내게 그 부분에 대해 미리 언질을 하였으므로 달리 문제 될 건 없었다. 구체적인 상태는, 세 권 정도는 상태가 아주 좋고 두 권 정도는 좀 많이 안습. 나머지는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책은 물론 새 책이다. 밖으로 드러난 내지면의 색이 많이 바랜 걸 제외하면 파본이나 낙장도 아니고 모서리도 모두 무사하고 표지도 반짝반짝 하고. 절판된 책을 구했는데 이게 어딘가... (허허)
문제는, 불과 3주 후에 들려온『혼불』 재출간 소식이었다. 소식을 접한 건 LA에서였다. 그나마도 재출간 일자가 두 달 후다. 오랫동안 재간을 기다리다가 결국 할인 전혀 없이, 택배비까지 물고 직구입한 그『혼불』이 말이다. 어이가 없었던 건, 전화 통화할 때, "혹시 재출간 소식에 대해선 모르시나요?" 물었더니 아주 청순한 어조로 "네, 전혀-" 하던 출판사 직원이다. 재출간된다는 것을 알았어도 책은 샀을 텐데. 작가의 처음 원고가 훼손 없이 그대로 잘 나온다면 새로이 한 질을 더 구입하면 되니까. 어찌됐든 작가 생존 시에 출판되었던 책을 가진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소식이었다.  


2008/12. 어렵게 구한 혼불

책을 구하려고 발을 동동 구르던 기세는 어쩌고 책장에 책을 꽂은 게 언젠데 이제서야『혼불』을 읽고 있다. 내 품안에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그런데 이제 겨우 3권 째인데, 자꾸만 10권에 눈이 간다. 이런 소설이 미완성이라니... 벌써부터 이렇게 안타까우니 다 읽고 나면 어떨지, 큰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드라마 <멘탈리스트>의 스포는 없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관련한 스포가 있습니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미드로 과학수사물 〈CSI〉를 꼽는 것에 아마도 이견이 없을 듯 하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감각적인 영상과 더 이상 명징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를 차곡차곡 수집하는 과학수사팀의 활약은, 확실히 범인의 자백에 의존하던 기존의 수사물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또한 CSI는 TV 드라마가 기존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미드이기도 하다. 10여년 전 '라스베가스'를 시작으로 액션물에 가까운 '마이애미', 초기만 하더라도 컬트의 냄새가 물씬 풍겼던 '뉴욕'등 스핀오프 시리즈까지 시즌을 거듭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CSI 시리즈는 분명 매력있는 드라마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CSI팀이 현란한 영상으로 보여주는 과학수사가 익숙해진 요즘이라고 해서 셜록 홈즈 또는 포와로가 누군가를 지목하며 "범인은 바로…… 당신이오!" 할 때의 전율이 낡고 식상해진 것은 아니다.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여전히 존재한다.
오직 자신의 회색 뇌세포를 이용하여 사건 현장과 정황만을 가지고 사건 이면에 숨겨진 범죄의 트릭을 읽고, 범인의 실수나 오류를 놓치지 않고 그것을 단서 삼아 논리적인 추론을 펼치며 범인을 지목하는 방식. 이것이 고전적 추리 소설의 스타일이다. 고전적인 추리극의 묘미는 아무래도 작가가 정밀하게 짜놓은 퍼즐을 푸는 재미에 있다. 즉 독자는 작가를 대변하는 주인공 탐정이 마지막 순간에 범인을 지목하기 전에 먼저 범인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회색 뇌세포를 열심히 굴려야 한다.*

* 이와 관련, 크리스티 여사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출간 당시 작가가 공정하지 않았고 독자를 속였다고 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기존 추리소설의 공식을 깨뜨림으로써 작가가 반칙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이 소설은 결국 작가가 내용 속에 범인을 암시하는 단서를 충분히 제시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논란이 일단락 되었다. 

 

이렇듯 고전적 추리소설이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가장 큰 원동력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와 지적 대결을 벌이며 작가가 꼭꼭 숨겨둔 범인을 맞추는 대리만족을 주는 것에 있다. 덕분에 크리스티 여사나 도일 경은 여전히 출판되고 있는 인기작가이고 그들의 작품 역시 꾸준히 영화화 되어 개봉되고 있다. 그러나 출판시장과 달리 유행에 민감한 영상매체 쪽에선 아무래도 이러한 고전적인 방식이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탐정 콜롬보>, <블루문 특급>의 뒤를 이어 <몽크>가 명맥을 유지하며 선전을 하긴 했지만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회색 뇌세포에 의존하는 대신 아예 영매들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심령물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참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수사대의 아성에 도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올해 새롭게 시작한 <멘탈리스트>. <멘탈리스트>는 고전적인 방식이 지금도 여전히 통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실제로 현재 전미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멘탈리스트>는 코난 도일과 애가서 크리스티 키드인 내게 과거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 미드였다.

시작 전 오프닝으로 화면에 깔리는 'Mentalist - 날카로운 정신적 추측,제안을 하는 사람. 심리주의자, 독심술가. 사고와 행동의 조종에 통달한 사람'은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주인공 패트릭 제인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크리스티 여사의 '미스 마플'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멘탈리스트〉 시즌 1 에피소드 14편 'Scarlett fever'가 무척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평화로운 작은 소도시, 부유한 그녀들의 친목 모임, 수다쟁이 여성들, 즐거운 티타임 도중 갑자기 벌어진 살인 사건. 왠지 낯이 익지 않은가? 바로 전형적인 '미스 마플'의 무대이다. 어쩌면 오마주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미스 마플의 무대를 많이 닮은 이 에피소드에서 제인이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 역시 미스 마플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여성들에게 말을 시키는 것이 그것인데 말하기 좋아하는 여성들만큼 단서를 구하기 쉬운 대상도 없는 법. 참고로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을 읽는 중요한 단서 하나는, 바로 사건의 동기가 '치정' 아니면 '재산(=돈)'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유의하면 한결 유리한 지점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가 가능하다.

제인의 능력 혹은 장점은 관찰력과 분석력에 있다. 물론 이렇게만 보면 제인의 추리가 지극히 이성적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한때 유명한 영매사였던 이력이 있는 제인이니만큼 아무래도 빼어난 직관력을 빼놓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직관력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제인의 이런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특히 제인이 용의자를 심문하는 방식이 재미있는데 직접적인 심문을 통해 상대방의 즉각적인 반응을 읽음으로써 거짓말과 진실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특기이다. - 실제로 심리학회에서 연구되고 있는 기법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범인의 가장 큰 특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데 거짓말은 특성상 어느 지점에 이르면 이음새가 어긋나고 벌어지는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는 과정이 제인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매회 마주치는 장면이지만 제인이 용의자를 심문하는 장면은 심문자의 질문과 질문하는 방식이 왜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즉 <멘탈리스트>의 매력은 '무엇을'이 아니라 '왜'에 접근하는 제인을 보는 데 있다. 왜 거짓말을 하는가. 제인의 직관력은 그것에 집중한다.
그런 점에서 제인은 셜록 홈즈의 관찰력과 포와로의 심문 방식을 함께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얼핏 이웃집 아줌마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포와로는 사건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데 말을 시키다 보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고 그 순간 포와로의 회색 뇌세포가 '반짝' 빛을 내는 것이다.
<멘탈리스트>는 자극적인 영상도 없고 따라서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이 없어 얼핏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 회, 한 회 보다보면 어느새 제인의 매력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함께 등장하는 팀원들은 또 얼마나 정감 있고 매력이 넘치는지...

- 덧1
<멘탈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심리수사물인 미드 <Lie to me>는 의외로 재미를 못 느끼다가 시즌1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뒤늦게 재미를 붙인 드라마. 시즌 초반, 캐리커쳐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거짓말의 유형'을 드라마에 도입한 것은 신선했으나, 이 기법을 소개하는 것에 내용을 지나치게 할애하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자체는 오히려 허술하게 느껴졌는데, 차츰 이 부분이 해소되면서 드라마에 집중은 물론 이야기의 재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것.

- 덧2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은, 물론 그 자체로도 뛰어난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 재미있지만 책 뒷장의 짤막한 몇 줄만으로 책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해문출판사의 마케팅 역시 인상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비뚤어진 아저씨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가고 있네.
아저씨는 비뚤어진 계단 옆에서 동전을 발견했네.
아저씨는 비뚤어진 쥐을 잡으려고 비뚤어진 고양이를 구해 왔네.
비뚤어진 작은 집에서 그들은 모두 함께 살았네"
<비뚤어진 집>, 해문출판사 

 

중학생일 때 용돈을 받으면 제일 먼저 서점으로 달려가서 구입, 열심히 모았던 해문출판사의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지금도 부모님집 서재에 꽂혀 있지만 뒤늦게 황금가지에서 그 동안의 오역을 바로 잡아 크리스티 여사의 전집을 새롭게 출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지름신이 슬금슬금 옆구리를 찌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10-03-17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본 미드랑 겹치네요. 얼마전에 멘탈리스트 시즌2 14까진가 봤구요, 라이투미 1시즌은 좀 더 전에. 뭐 상도 받고 대단하다고는 하는데, 재미는 있지만, 쏘쏘였던듯. 한시즌을 다 보도록 캐릭터에 정도 안 들고 말이죠.

요즘은 리스너 보고 있어요. 디게 뻔할 것 같은 소재고, 이제 3화까지 봤지만, 당장 4화부터 막장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근데 아직까지는 볼만한 그런 드라마에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구급요원이 주인공으로 나와요. 엄청난 글래머 미녀 형사가 맨날 삽질하는 걸로 나와서 그게 좀 별로인거 빼고는 그럭저럭 .. 그러고보니, 주인공이 좋아하는 의사도 엄청 글래머군요.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3-18 23:41   좋아요 0 | URL
캐릭터에 정이 안 가면 드라마를 끝까지 보기가 정말 힘이 들지요. 저도 그런 이유로 도중에 포기한 드라마가 많아요. 요즘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리스너는 처음 듣는데 함 찾아서 봐야겠어요. :)
 

상황극
'단막극'이나 '막간극' 처럼 연극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말. 말 그대로 어떤 상황- 특정한 공간과 시간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어 그 상황 자체를 그대로 찍어내듯 무대에 옮겨내는 극의 형태.


범죄없는 마을 삼매리에 어느 날 무덤이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실종되었던 사람이 찢겨진 시체로 발견된다. 범인은 식인멧돼지 '차우' (영화에선 유전변이에 의한 미확인외래종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차우를 잡기 위해 어설프게 팀이 꾸려지는데 희망근무지 2지망에 '아무 데나'라고 쓴 덕에 삼매리로 오게 된 김 순경(엄태웅), 제인구달을 꿈꾸는 연구원(정유미), 차우에게 손녀를 잃은 천 포수, 잘 나가는 유명 사냥꾼 백 포수, 그리고 신형사가 그들이다.

잡다한 취향이지만 그 안에서도 좀 더 끌리는 취향은 있다. 이를테면 나는 상황극 혹은 부조리극을 좋아하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고 본 영화《차우》는 그런 내 취향에 잘 부합되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국가대표》를 포함 올해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재미있었다. - 《국가대표》가 재미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재미있게 봤다는 의미.
입소문으로 뒤늦게 흥행의 대열에 올라서는 영화가 많은 요즘, 이 영화가 입소문조차 타지 못하고 소리 소문없이 극장에서 사라진 것은 제작사나 배우 입장에선 불운인 듯.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홍보의 초점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다. TV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본《차우》는 식인 멧돼지와 사투를 벌이는 공포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인 멧돼지의 공포'가 주제인 줄로만 알고 본《차우》는 시작하고 10분이 지날 무렵 내가 잘못 짚었구나 했다. 식인 멧돼지는 물론 '아주 가끔' 무섭지만 원래 제작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래픽 기술의 한계였는지 영화는 무서운 멧돼지와 인간의 대립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대신 식인 멧돼지의 위협이라는 상황에 놓인 여러 인물들의 액션, 리액션이 내용의 전반을 지탱한다. 전반적으로 상황극을 취하고 블랙코미디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장진 감독의《박수칠 때 떠나라》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영화 시작 부분 - 비탈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장면과, 크레딧이 올라간 뒤 남아 있는 마지막 장면은 억지 웃음을 유발하려는 듯 유치하고 억지스럽지만 전반적으로 박장대소가 터져나오는 코믹한 장면이 많다.
영화는, 식인 멧돼지의 출현이 무분별한 산림훼손에 의한 환경파괴가 원인이라고 진단하지만 다행히 이러한 메시지는 전달하는 정도에 그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눈앞의 이익에 더 급급하는 마을 주민들, 공권력의 안이한 대처도 '이 사람들이 이래요' 정도로 가볍게 훑고 지나갈 뿐 코미디 액션 스릴러라는 제 갈 길을 열심히 간다.《차우》가 다루는 것은 멧돼지와 인간, 공권력과 시민, 자연과 개발 간의 갈등유발이 아니라 멧돼지를 잡으려는 소시민들의 한바탕 해프닝이기 때문. 한 마디로《차우》는 이야기를 복잡하게 꼬지 않고, 종합선물세트의 미련 때문에 궤도에서 이탈하지도 않으며, 장르적 기본에 충실한 영화다. 그러니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인 어설픈 그래픽은 관대하게 봐줘도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배우들이 다 괜찮으니까.
사실 이 영화를 가장 잘,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포스터다.

「모두가 즐겨라. 5인조 추격대와 식인 멧돼지의 한.판.승.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 스포일러 있습니다

재난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재난영화 중 괜찮았던 영화를 떠올려 보니 역시 손에 꼽히는 것이 없다.
《2012》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내 기억에 재난영화 전문 감독으로 각인되어 있다. 실제로 눈이 지구를 뒤덮는《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는 물론이고 꼭 이러한 이상 기후가 아니어도 외계인(《인디펜던스데이》), 정체모를 괴물(《고질라》)이 등장하여 도시를 습격하는 다른 영화들도 시퀀스의 구성이 이상재난 영화에 가깝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총 15편의 영화 중 안 본 건 다섯 편이고 92년 이후 개봉작 12편 중 안 본 것은 두 편이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블록버스터급인데 이 감독의 영화는 보기 전이 본 후보다 더 재미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까 예고편은 재미있지만 막상 본편은 재미가 없다는 얘기인데, 대표적인 영화가《유니버셜 솔져》.
근육질 사나이들인 장 끌로드 반담과 돌프 룬드그렌이 월남전에서의 기억(악연)을 봉인하고 안드로이드로 재탄생되어 대립하는 내용인데 지나치게 거창했던 설정이 시작 전부터 과부화를 일으켰는지 영화 내내 지루하더니 결국 남는 거라고는 근육질 마초 액션질 뿐이었다.
《2012》로 돌아와서, 전작 재난영화《투모로우》보다는 내용이나 CG에서 한결 진보한 느낌이다.《투모로우》마지막 장면에서 "저 아빠는 그 생고생을 하면서 대체 저길 왜 간 거야?" 보면서 좀 황당했는데《2012》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흐름(한가지 주제)인 '노아의 방주'라는 목표물을 충실하게 겨냥한다. 영화에서 가장 볼 만 했던 건 역시 지진이 덮친 도시 위로 비행하는 장면.
아마도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공식인 듯 이 영화 역시 재난과 맞서는 아버지(가장)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가족으로부터 밀려난 무능한 가장은 국가에 밀어닥친 재난 앞에서 갑자기 가족의 수호신으로 일대 신분 변신을 이루게 되니, 신분 변신한 남자에게 아이들의 영웅으로 거듭나고 아내의 사랑을 되찾는 것은 당연한 덤이다. 끝으로,《인디펜던스 데이》에 이어지는 미국 대통령의 영웅주의적 가족주의적 결단에 카메라를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자화자찬식 미담은 보는 내내 감동보다 민망함이 더 크다.

《아바타(AVATAR)》

- 사진은 최초의 유성영화《재즈 싱어》

연말 극장가의 가장 큰 화제는 역시《아바타》인 듯 하다. 마침 집 근처 CGV에 아이맥스 상영관이 있어 별 고민 없이 예매하고 본 이 영화는 결론부터 말하면 10점 만점에 10점.
《아바타》의 주제와 관련해서《늑대와 춤을》《미션》등이 거론되는데《아바타》가 차용한 '식민지 정복의 역사' 클리셰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 클리셰는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에도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므로 새로울 것 없는 내용에 연연하다(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나쁜 것도 아니다) 이 영화가 완성해 낸 형식과 스타일을 놓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진부하다는 의미는 뒤집으면 보편적이라는 의미도 된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진부함이 아니라 진부한 이야기를 어떻게 재활용하는가에 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로맨스는, 줄거리로 정리하면 뚜렷하게 변별이 가능한 이야기는 불과 서넛이라고 하지 않는가. 결국 오래된 클리셰의 변주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아바타》의 가장 큰 미덕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바로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고 싶은 가장 큰 이유다.
역사적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은 늘 혁명을 가지고 왔는데 영상 쪽으로 시선을 좁혀 영화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 보면,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활동사진의 시대를 연 것이 1895년이고 이후 무성영화 시대를 거쳐 1927년 마침내 유성영화 시대가 열린다.
- 최초의 유성 영화는《재즈 싱어》인데, 대학 신입생 때 축제 기간 중 단과대에서 열렸던 '퀴즈대회'에 나갔다가 이 문제를 틀리는 바람에 상을 놓친 아픈 기억이 있어 제대로 확실하게 기억하는 영화 중 하나다.
이후 영상산업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다가 컴퓨터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CG라는 기술적 진보를 적극 흡수하는데 그 결과물이 이번《아바타》가 선보인 3D 입체 영상이다. 물론 이런 시도가 예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3D 영화가 황금기를 맞았던 것은 반 세기도 더 전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한계에 부딪쳐 불과 2,3년만에 2D로 되돌아간 당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번《아바타》의 등장은 무엇보다 기술적인 면에서 예전의 한계를 비약적으로 극복한 듯 보인다. 게다가《아바타》의 영상 혁명이 가지고 올 유무형 변화에 기대를 품게 한다. 이제 영화는 《아바타》 이전과 이후의 영화로 나뉠 것이라는 찬사는 결코 과하지 않다. 여러모로 매혹적인 영화다.

전날 밤을 새고 조조로 본 이 영화는 2시간 4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졸면 어떡하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불이 켜질 때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못 떼게 했다. 제이크 설리(남자 주인공)가 주인공답지 않게 깨방정에 지나치게 수다스럽다는 걸 제외하면 영화적으로 거의 불만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 일부 진부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내용 면에선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식민지 정복사'보다,《원령공주: 모노노케 히메》등에서 보여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가 추구하는 공통 주제인 '자연과 환경' 문제가 더 강렬하게 와 닿았다. 구체적으로 나를 사로잡은 이야기는 원주민을 약탈하려는 제국주의보다 판도라 행성속 인간과 자연의 함수관계였다. 때문에 영화의 말미 대규모 전투 씬을 볼 때도 쓰러지는 나비족보다 쓰러진 나비족 위로 무너지는 판도라의 모습에 감정이 더 이입되고 몰입되었던 것 같다.

지브리 얘기가 나온 김에,《아바타》를 얘기할 때 재패니메이션 얘기가 곧잘 등장하는데, 특히 판도라 행성의 공중에 떠 있는 산을 두고《천공의 성 라퓨타》가 심심찮게 언급되는데 사실 '라퓨타'가 제일 처음 등장한 것은 조나단 스위프트의《걸리버 여행기》(1726년作)에서다. 뿐만 아니라 책에 삽입된 삽화 '하늘을 나는 성의 나라 라퓨타'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개념은 미야자키의《천공의 성 라퓨타》, 캐머런의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즉 『걸리버 여행기』를 먼저 읽은 사람에게 미야자키의 '라퓨타'는 진부한 것이 되지만,《천공의 성 라퓨타》가 처음인 사람은 '라퓨타'가 참신한 이미지가 된다. 

사실 진부함이란 별 거 아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 진부한 것이고, 처음이면 참신한 것이 된다. 진부함이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뽑아내는 시각의 전환이 될지, 의미없이 지루한 재탕이 될지는 그것을 아우르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그것의 개념을 마음껏 즐기는 것도 문화를 즐기는 한 방법이겠다.

《모범시민》 스포일러 있습니다
스릴러, 특히 심리 스릴러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인데 막상 이 장르에 우왕 굿! 서슴없이 손가락을 치켜 들만큼 뛰어나게 재미있었던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로 얼마 안 된다. 양적으로 가장 많이 제작되었을 이 장르는 오히려 옛날 영화 중에 수작이 더 많다.
《모범시민》역시 무척 기대했으나 기대한 만큼 실망이 큰 영화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달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느끼는 재미와 몰입의 낙차가 매우 크다. 중반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중반, 구체적으로 굴다리 밑에서 '옛 친구'의 블라블라 하는 장면에서부터 산으로 가는 느낌이더니 이후 바람 빠진 풍선이 공중을 나는 것처럼 영화가 종잡을 수 없어진다. 영화가 끝난 후 남는 의문 '왜?'는 보통 두 종류다. 여운 아니면 찜찜함. 전자는 영화 속 여백에서 오는 감동의 연장이고, 후자는 이야기의 개연성에 대한 의문이다.
'클라이드는 복수를 하려고 한다'. 영화 전체를 통해 이해(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이것 하나.

《펠헴1,2,3》
《모범시민》이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한 영화라면《펠헴1,2,3》은 기대하지 않고 봤다가 건진 대박.
이번에 사촌동생이 왔을 때 이 영화가 보고 싶다고 하여 뒤늦게 프로젝트로 봤는데 좋아하는 감독,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인데 개봉한 것도 몰랐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
악당으로 등장하는 라이더(존 트라볼타)의 대사량이 굉장히 많은데 라이더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가 않다 보니 인물에의 몰입도가 좀 떨어지지만 가버(덴젤 워싱턴)의 역할이 그 부분을 충분히 만회한다. 썩 재미있는 영화.

《전우치》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웹상에 올라오는 반응들이 시원찮아서 조금 걱정이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혹시 안티 알바였던가 싶게 지나친 혹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재미있다. 내용은 어디에선가 본 듯 낯이 익지만 내용이 쉬우면 그만큼 화면에 몰입하기가 쉬우니 일장일단이 있다 싶다.
 
《전우치》의 가장 큰 미덕은 타이틀롤을 맡은 강동원. '강동원의, 강동원을 위한' 이라던 감독의 말에 어긋남이 없다. 우월한 유전자에 연기마저 뛰어나 주시니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만화책에서 쏙 집어 올린 듯 더없이 입체적이고 유기적인 전우치라는 인물을,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걸친 듯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이 배우, 원래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었나 놀랍다.
반면 임수정은 뭔가 어색하다. 연기를 못 하는 것도 아닌데 배우에게 시선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배우의 장면이 길어지면 지루해진다는 것인데 한 마디로 미스캐스팅이라는 느낌. 연기도 잘 하고, 대사 발성이나 인물에서 뽑아내는 분위기 등이 강동원의 전우치랑 더없이 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임수정이라는 배우 자체가 이 영화와 맞지 않는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은 배우 강동원과 영화적 상상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이야기와 역동적인 화면. 참, 이 영화는 조연들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이미 충분히 검증받은 김윤석은 물론이고,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신선 3인방. 이들 캐릭터는 기존의 웬만한 코믹한 인물들을 넘어 선다. 이 외에도 초랭이 유해진, 특별출연인가 했더니 비중 있는 조연이었던 염정아, 그리고 정말 특별출연이었던 백윤식까지 누구 한 사람 빼놓지 않고 그 역할이 분명하고 배우들도 제 몫을 200% 해낸다.

보는 내내 DVD가 출시되면 사야지했는데 영화의 3/4인가에서 마음이 슬쩍 바뀌었다. 이야기가 떨어졌는지 한참 속도를 낼 시점에 슬그머니 힘이 빠지는 지점이 있는데 아쉽다. M군은 영화가 《아라한 장풍 대작전》과 겹친다고 했는데 나는 주성치와 서유기가 연상됐다. 주성치의 서유기가 아니라 '주성치'와 '서유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