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종료] 6기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마리우스 세라 지음 / 푸른숲

나 또한 그 틀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면서도 타인의 생로병사를 보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는 것처럼 언제나 불편하다. 그래서 내겐 영상을 포함 소설이든 에세이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무조건 피하고 안 보는 버릇이 있는데 아무래도 '강 건너 불구경'식이 될 수밖에 없는,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생리적인 거부감이 든다.
슬픔은 슬픔이고, 비극은 비극이다. 남의 고통을 함부로 얘기해서도 안 되며, 함부로 들여다봐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고통이 한낱 이야깃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평소 생각하는바, 사정이 이렇고 보니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를 받았을 때,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면역이 약한 나는 좀 과장하면 아찔했다. 그러나 과정은 이렇듯 좀 거칠었으나 중요한 결론은 읽기를 잘 했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서술자와 서술자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되새겼는데 유유의 아빠이면서 책의 서술자이기도 한 저자의 담담한 서술이 특히 인상적이다. '다를 뿐 틀리지 않다'는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들 중 하나인데, 인생을 설계하면서 꿈에서조차 계획에 넣지 않았을 '날벼락'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유유 가족의 낙관성이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확인하게 한다.
 


-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생후 5주인 자신의 아이에게서 선천성 뇌질환을 발견했을 때, "왜 하필 내 아이에게(우리에게)"는 숱한 상처와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 아이가 내 아이, 내가 이 아이의 부모"가 된다. 그리고 이즈음에 이르면 부모는 이미 강해져 있다.

 

 

경계는 우리의 의식과 생활, 우리가 누리는 물질세계, 정신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그것의 속성이 워낙 모호하고 희미하여 미처 못 느낄 뿐,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의 간섭을 받으면서 산다. 그러므로 경계의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흥미를 가지고 책을 펼친다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를 소설 『소현』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세자가 인질의 신분으로 보냈던 심양에서의 9년, 그 중에서도 마지막 2년에 집중한다. 또한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것도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다. 그리하여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독백은 이 소설을 역사의 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으로 읽히게 한다.
 

삶을 긍정하고 낙관하는 힘은 누구도, 무엇도 아닌 바로 '나(자신)'에게서 나온다. 가끔, 인간의 고민은 너무 많이 가진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을 채워야 할 밑 빠진 독이 아니라 비워야 할 화수분으로 응시한다면 삶이 한층 가볍고 유쾌해질 텐데... 

 

중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차이는 뚜렷하다. 중국문학은 확실히 대륙의 특징인 확장성이 느껴지고 일본문학은 섬 특유의 오밀조밀 섬세한 느낌이 든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어느 제왕(이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가 선잠에 들어 꾼 꿈이라면 『딩씨 마을의 꿈』은 깜깜한 새벽에 꾸는 악몽 같다고 할까.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아이가 들려주는 매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 마을의 비극이 몽환적이고 기괴한 한편 현실적으로 다가와 더욱 섬뜩하다.

 

- 신간평가단 도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전기도 안 들어오는 깊은 오지에 홀로 사시는 스님을 뵌 적이 있어요. 그때 스님께서 붓글씨로 담락(湛樂)이라고 쓰셨는데 평화롭고 담담하게 즐긴다는 이 뜻이 가슴에 와 닿았죠. 스님처럼 살 수는 없더라도 인생을 이런 마음으로 살면 좋겠구나 하는 작은 깨침을 얻은 자리였어요. 얼마 전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법륜 스님 법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스님께서 두려움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실체도 없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겁먹고 사는 거라고." - p.033,『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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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0-07-10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인삼 밭에 그 아낙네님. 마지막 글 잘 읽었습니다. 조곤조곤 야무지게 마지막 설명 써주신 거 보면서, 제가 신간 평가단 분들은 하여간 참 탁월하게 뽑았다는 자만심이 몰려옵니다. (응?) 고맙습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7-12 15:59   좋아요 0 | URL
늘 좋은 책을 보내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장마 전이라 그런지 습도도 높고 엄청 덥습니다. 올 여름도 시원하게 나시길 바랍니다~ ^^
 

나는 눈물이 많은데 정말로 잘 울고, 많이 운다. 
그런데 몇 년 전, 막상 안과에서 안구 건조증으로 눈물샘 검사를 했을 때 내 눈물샘은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랄 정도로 바짝 메말라 있었다. 눈물이 많으면 눈물샘이 건조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눈물과 눈물샘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신파’라고 해서 무조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것처럼.

눈물이 많은 나를 가장 많이 울린 영화는, 단연 <간첩 리철진>이다. 순진하고 착한 간첩 리철진이 너무나 불쌍해서 얼마나 심하게 울었던지, 어떻게 울었는고 하니 그야말로 대성통곡하듯 엉엉엉 목놓아 울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어떻게 된 것이 리철진을 연기했던 배우 유오성 씨만 보면 울고 있는 것이다.
유오성 씨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난 한 놈만 패!’ 할 때도 울었고, 모CF에서 남들이 모두 예, 할 때 혼자만 ‘아니오!’ 할 때도 울고, <별>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 때는 간첩 리철진이 생각나서 또다시 통곡하면서 울고... 하여튼 좀 과장해서 유오성 씨 그림자만 나와도 울었다.
그러니 아예, ‘손수건, 휴지 옆에 갖다 놓고 마음껏 우십시오.’라고 신파를 대놓고 부추기는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는 일부러라도 안 봤다.
- 예전 일이지만 오빠의 소개로 어느 유명 영화 동호회에 가입하려고 설문지를 작성할 때 일이다. 그 때 질문란에 ‘제일 좋아하는 국내 배우’란이 있었는데 내가 유오성이라고 정성스럽게 써넣자, 오빠가 장난하냐고 해서 내가 발끈한 적이 있었다. 당시 유오성 씨는 ‘난 한 놈만 패!’로 한창 떴을 때였다.

서론이 길어진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 ‘신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딸 부잣집 둘째로 태어난 엄마 덕분에 나는 이모들이 많은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이모들이 주루룩 여고생, 여대생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큰 언니들 같기도 했다.
어려서 외가에 가면 바로 그 이모들 방에 틀어박혀서 이모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때 읽었던 것들 중, 신달자 씨의『물 위를 걷는 여자』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국내 여류작가들의 소설에 등장하는 신파를 싫어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아마 바로 이『물 위를 걷는 여자』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우희와 난희라는, 환경은 극과 극을 달리지만 친한 친구인 두 여자가 나온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우희는 개인의 성공을 위해 완벽하게 멋있는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유학을 떠나고, 이 남자는 난희와 결혼한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몰랐던 그 시절에도 우희가 불행해지는 걸로 결말을 맺는 이 소설을 읽고 어린 마음에도 화나고 불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책 한 권이 청소년기에 미치는 영향이란 이렇게 대단하다.

이후로 국내 여류작가의 소설에 대한 불신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공지영 씨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나『착한 여자』에 등장하는 청승의 대표주자처럼 보이는 여자들의 얘기에 ‘한국형 페미니즘’이라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었다. 결국『인간에 대한 예의』가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이 작가의 소설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다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나와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행.시는 너무 괜찮았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책을 주문하고, 이틀 뒤에 받아들고 그리고 읽었다. 원래 눈물이 많으니 울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눈물 없이는 못 읽는다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거의 안 울었다. 그 흔한 내 눈물이 인색했던 것은 소설 외적인 것에 대한 반발심이라거나, 소설에 감정이입이 덜 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소심한 이유가 아니다. 사형수를 통해 ‘용서’를 얘기하고 있는 이 소설의 주제를, 몇 달 전 모 방송국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픽션이 아닌 논픽션으로 이미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평하지 못하게도, 허구인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내게서 신파를 끌어낼 힘을 잃었던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는, 실제로 사형을 선고받은 여러 명의 사형수들이 나왔다. 어떤 피해자의 가족은 죄를 짓고서라도 감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가해자 사형수를 죽여버리겠다고 절규했고, 또 어떤 피해자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혼자 남겨진 존재의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아프고 안타까웠던 얘기는 6년 째 복역중인 사형수와 그 사형수를 용서한 피해자의 아버지가 나왔을 때였다. 그는 목사님이었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가해자를 용서했다. 하지만 용서받은 사형수도, 용서한 아버지도 날마다 고통 받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 소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날이 시큰해졌던 부분이 바로 ‘용서’ 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크게 두 곳이다.

수녀님 내가 나쁜 짓 하려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시간이 더 가서 나라에서 그놈을 덜컥 죽여버리기 전에 만나고 싶다구요. 이 늙은이가 배운 것도 없구, 하는 게 하나 없는데…… 가서 내가, 이놈아 네가 죽인 그 여자 에미다! 하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놈을 용서해주고 싶어요……. - p.103

용서할 수 없었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용서하기…… 싫어! 그 인간보다 더 용서할 수 없었던 엄마를…… 그런데 오늘…… 용서, 해보려구 온 거야! - p.280

각각, 사형수인 윤수의 일당에게 딸을 잃은 할머니와 가장 필요할 때 정작 자신을 외면해 버린 엄마를 향한 여자주인공 유정의 대사인데 책을 읽다가 가슴이 찌르르 아프면서 내가 훌쩍였던 부분이다.

어렸을 때 누군가가 내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아. 이 상투성이란...) 라고 물으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을 읽은 대다수는 보통 라스콜리니코프가 광장 한 복판에서 바닥에 입을 맞추고 ‘나는 살인자입니다’라고 외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고 하는데(이 부분은『우.행.시』에도 나온다) 나는 그가 전당포 노파를 살인하기로 계획을 세울 때 ‘모두가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았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뒤에 다시 깨닫게 되는 ‘세상에 죽어도 마땅한 자는 없다’라던 부분에 이르면 죄지은 자라고 해서 과연 누가 그를 단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형폐지론자다.
가해자를 사형 집행하는 이유가,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피해자를 대신한 사회의 복수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공공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사형이 아니라 무기형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건 '그'를 우리 사회에서 쫓아내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죽여서 안 보든, 격리시켜 안 보든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어차피 죽잖아. 그래봤자 살려놓아봤자, 기껏 오십 년도 안 돼서 다 죽잖아…… 오빠는 사는 게 그렇게 좋아? 그래서 살려주는 게 그렇게 배 아파? - p.234

그러나 누군가가 내게 ‘네가 피해자여도 그렇게 말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오면 나 역시 ‘그래’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었던 부분도 ‘용서’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기 희생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다 읽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차라리 늙은 수녀님이랑 사이코패스 사형수의 얘기였다면 작가가 주장하는(사형폐지) 주제가 설득력을 더 가졌을 텐데” 라고 투덜거리자 친구, “그럼 재미가 없잖아” 라고 했다.

(중략) 고모 내가 젤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그건 진부한 거야…… 그 자식이 조금 더 진부하지 않게 여잘 버렸다면, 진부하지 않은 의도로 나랑 결혼하려고 했다면 내가 그래도 눈 딱 감고 봐주려고 했는데…… 정말이라구. 난 그 자식이 진부하게 구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 그게 다야! 고모는 내 말을 믿어야 돼. 이 이야긴 첨 하는 거니까. 엄마도 오빠들도 식구들…… 이 이야긴 아무도 몰라. 그 사람들은 그저 내 변덕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도 그게 편해. 그래야 조금이라도 서로 덜 마주 보잖아. - p. 26 

진부함과 신파는, 아마 사촌쯤 되지 않을까?

정리하면, 

여기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유년 시절을 지나온, 아직 앳되고 예쁘장한 청년이 있다. 청년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형수다. 이 청년을 용서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형을 집행해야 할까?

청년은 죄를 짓지 않았다. 누명을 썼다. 도대체 이 청년의 뭘 용서한다는 걸까.
'사형 제도'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던 작가에게 왜 '윤수'여야 했는가, 묻지 않을 수가 싶다. 소설의 주인공이 '미모의 여교수와 억울한 청년 사형수'가 아니라 '칠순의 늙은 수녀님과 중년의 간악한 살인마'였다면 작가가 주제를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주제가 부각되는 사회소설이 아니라  슬픈 연애 소설을 한 편 읽은 것 같은 찌꺼기가 남는다. 작가의 어설픈 부르조아 근성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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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호퍼의 그림들은 황량함을 묘사하지만, 그림 자체가 황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B.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또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텅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 고뇌하고 힘들어하며 헛된 시도를 반복한다. 그 상처 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며 무언가 의미 없는 보상을 원한다. 치유되지 못한 외로움을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채......


1. A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구체적으로 작가가 보고 있는 호퍼의 그림을) 모르는 독자가 문제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도대체 그 그림이 황량한지 황당한지 알게 뭔가.
B 역시 혼자 심각하고 혼자 비장한, 혼자만의 잔치인 자기 고백이라 3자가 딱히 끼어들 틈이 없다.

2. A는 알랭 드 보통의『동물원에 가기』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문단이고,
B는 배우 최민수 아저씨가 바이크 불법 개조 사건 직후 모 언론사에 보낸 전문中 시작 부분이다.

3. 보통은 20여 개의 언어로 출판 세계 각국에서 수십만 부씩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최민수 아저씨는 앙드레 김 못지않은 화려한 어록으로 세간에 웃음을 주고 있는 이 시대의 터프가이다.

4. 보통(Botton)은 내게 명백한 최고의 수면제다.『행복의 건축』은 신작 출판기념으로 그의 책 세 권을 덤으로 주는 행사 때 고민에 고민 끝에(나는 이미『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질린 경험이 있다) 예약하고 받은 책이다. 지금도 건축 공부를 해볼까 고민할 만큼 건축에 관심이 많은 내게 건축 에세이는 뿌리치기엔 너무나 유혹적이었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행복의 건축』을 읽다가 불과 서너 페이지쯤 넘겼을 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낮잠을 자는 사태가 벌어졌다.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는'(작가 소개) 30대 후반의 이 아저씨는 어찌하여 매번 나를 이렇게 잠을 재우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저녁에 보통의 네 권의 책 중 가장 얇은, 그 제목도 참 가벼운『동물원에 가기』를 집어 들었던 것은 책의 무게보다 내 이해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라고 반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두께는 얇지만 그 내용은 어찌 그렇게 천근만근인지. 겨우 첫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사정없이 감겨드는 눈을 부릅뜨고  읽고, 소리내어도 읽어 봤지만 결국 "그래요, 제가 졌어요." 항복의 흰 깃발을 들었다.

5. 보통의 문장과 최민수의 문장은 도대체 뭐가 다른가. 내 보기엔 현학적인 우물의 깊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제대로「같기도」인데. 그런데도 한 사람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세간의 웃음 거리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불공평하다.
소쉬르는 언어를 (1)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그 사회에서 공인된 상태로의 언어인 랑그(langue)와 (2)현실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개인의 구체적인 언어를 의미하는 파롤(parole)로 이원화했다. 간단히 말하면 언어를 머릿속에 있는 개념과, 소리가 되어 입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로 구분한 것인데 위의 두 경우를 보면 어떤 언어를 쓰는가가 아니라 언어를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한 것 같으니 그런 구분이야 아무렴 어떤가 싶다. 

예전에 우리들 사이에 유행했던 우스개 소리에 이런 게 있었다. 공부 잘 하는 놈이 당구장에서 놀고 있으면 "공부도 잘하는 놈이 노는 것도 잘 논다"하고, 공부 못 하는 놈이 당구장에서 놀고 있으면 "공부도 못하는 놈이 놀기만 한다"는 것이다. 아아, 현실은 이렇게 비정한 것이다. 

6. 언제던가 보통의 저서가 스테디셀러로 진입했다는 자료를 봤다. (물론 자료에서 '오쿠다 히데오'를 발견했을 때보다는 덜 경악했지만)
도대체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고 산만한 보통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원래 맨 얼굴에 자신 없는 사람의 화장이 두꺼워지기 마련이지, 였다. 내가 읽은 보통은 그랬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이해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덧붙이고 덧붙이고... 지나치게 말이 많다. 그나마도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현학적이고 중언부언이다. 원래 지식이란 누구나 알기 쉽고 간단한 것이어야 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태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꿈 해석'이 궁금하면 직접 프로이트를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예를 보자.
저자 A는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고 연구한 사람이다. A는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이론에 관한 책을 썼다. 독자B는 A의 저서를 읽는다. 그럼 B는 프로이트를 읽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B는 A의 프로이트를 읽은 것이다. B가 누군가에게 프로이트 얘기를 한다면 그건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트의 사촌쯤 되는 인물일 터다.
'철학의 문학적 대중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오히려 철학이라는 강박을 거세하고 소설로만 읽는다면 충분히 소설적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보통의 소설을 읽고 철학은 이런 거야, 라고 말 할 사람도 없겠지만 연애 심리를 철학적 관점(혹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풀어놓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보통의『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보다 E.프롬의『사랑의 기술』을 읽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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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세 번째 부산행이다. 이번은 3, 4일 정도로 체류 기간이 짧지만, 기간에 상관없이 일단 집을 비운다는 점에서 여행은 그 자체로 여러모로 피곤하고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까 여행 내내 '내가 가스를 잠갔던가?', '거실에 커튼을 쳤던가?' 등등 귀찮은 고민들과 씨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마주치는 일도 종종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마음산책 블로그를 보는 순간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아..."
우리 집에는 마음산책 책이 과장 없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책도 있고, 책을 찍어 줄 카메라도 있지만, 정작 내가 거기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궁즉통(窮則通). 혹시나 하고 개인홈을 뒤졌더니, 조금 있다! ^^




-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를 모으기 시작한 건 올 초 들어서다.
요네하라 마리는 책 내용에 앞서 작가의 이력이 독특하고, 무엇보다 두 마리의 반려묘가 관심을 끈다. 고양이는, 무조건 일단 클릭하고 보는 대상.  




- 나를 요네하라 마리에게로 이끈 이는 더 설명이 필요 없는 고종석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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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점에서 독서는 라이벌이 함께 뛰는 마라톤과 비슷하다. 작가가 너무 앞서 뛰면 뒤따라가는 독자가 지치고, 작가가 독자의 뒤에서 뛰면 앞에서 뛰는 독자가 흥미를 잃어 버린다. 그러니 가장 재미있는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비슷하게 뛰는 것인데 독자층에 또렷한 경계를 긋는 전문서적이 아닌 소설(문학)은 더욱 그러하다.
정치, 경제, 종교는 싸움과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인 화제다. 이 세 가지 화제를 문학에 적용시킨다면 그중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는 단연 종교일텐데 그 이유는 작가의 종교가 대개 화자를 구도자의 위치에 서게 하기 때문.
그러니 종교적인 피드백을 가지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의 소설은 아무래도 작가가 심어 놓은 상징과 은유를 올바르게 읽어내는 것에 한계가 있는데 이는 읽는 사람의 편견 때문일 수도 있고, 작가의 고집(=보수적 편향성) 때문일 수도 있다.
이승우의 소설은 개신교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 그의 소설 주제를 지배하는 것은 종교적 원죄 의식과 구도(求道)이다. 그렇다고 그의 많은 단편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니 미리 그의 소설 읽기에 금을 그을 필요는 없겠다.
이승우의 소설은 주제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어느날 일상성이 깨어지고 비일상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카프카式 부조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게서 비극적 전형성을 집요하게 캐내는 종교적 원죄 의식이다.
그의 소설은 거의 이 두 가지 틀을 벗어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인물과 사건은 대체로 다음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정서적으로 어딘가 한군데 부서지고 부족한 Loser가 등장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은 사람들, 그 이야기를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 카프카式  서사구조. 갑작스러운 소환과 그것에 따른 비극적인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개인의 소외 혹은 격리

단편집『심인광고』중 특히 좋았던 단편은 동명의「심인광고」「오토바이」「터널」이었다.
단편집『검은 나무』의 수록작 중「선고」와「사령」은 카프카 정서가 강한 단편. 특히 카프카 인용으로 시작하는 첫번째 수록 단편「사령」은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카프카의『성』과 유사하다. 
「동굴」에 등장하는 화자의 독백(p.224, 아래 인용)은 일본 영화『기묘한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였던 '묶여있는 개'와 유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의 차이는 윤리가 아니라 삶의 문제가 되면 한층 난해해진다.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아무래도 나를 처음 작가에게로 이끈「오래된 일기」다.(『오래된 일기』수록)  

-책에 밑줄긋기

(…)나의 추리는 거기까지 이르렀다. 추리의 과정에서 나 자신 다소 흥분하고 조급해하였던 사실을 눈치채고 나는 좀 머쓱해졌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일에 흥분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 p.108,「일식에 대하여」

나는 유리창을 통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집에 감금되어 있는 신분이 낮은 남자의 신세를 떠올렸다. 남자의 신분은 화려한 집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 신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크고 화려한 저택에서 턱없이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리까지가 그러하다. 그 크고 화려한 집에서 그는 제왕처럼 지낸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집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하긴 그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는 그 집을 나가는 순간 이 집의 온갖 특혜를 등지고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비참한 신세로 돌아가야 한다. 자, 그러면 이 호화스러운 집에 갇혀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 신분 낮은 남자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 p.224,「동굴」
* 이상『검은 나무』수록

 

저놈이 나를 버렸다, 저 나쁜 놈이…… 하고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쁜 놈이란 건 맞지만, 내가 어머니를 버렸다는 건 맞지 않다. 모든 나쁜 놈들이 어머니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다고 나쁜 놈이 아닌 것도 물론 아니다. '나쁜 놈'이라는 건 한 인물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 평가이다. 평가는 여러 가지 사실, 또는 특정한 사실에 기초해서, 심지어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도 내려진다. 어쨌든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그의'평가이다. 그러니까 '나쁜 놈'은 그렇게 불린 사람보다 그렇게 부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쁜 것이 아니라(나쁠 수도 있지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누군가를 버렸다고 말하는 건 사뭇 다르다. 우리는 버렸다는 행위가 있을 때에만 버렸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소한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어머니의 그런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중략) - pp.179-180,「오토바이」
*『심인광고』수록

- 이승우 소설집
그 사이 신간『한낮의 시선』이 나왔다. 오랜만의 장편소설인데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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