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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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언어의 유목민인 다와다 요코의 문장을 읽는 경험이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것은 아마도 독자도 이미 다양한 언어의 경계를 부유하는 유목민이기 때문일 터. 결국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의 언어를 공감하는 시공간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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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없는 사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수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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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없는 사이'가 서양식 표현은 아닐 것 같다는 근본 없는 의심을 하며 표지를 확인하니 원제가 'LES INSEPARABELES'다. 프랑스어 직역은 '떨어질 수 없는(분리할 수 없는)'.


자전적 소설 『둘도 없는 사이』의 실비는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는 자자(엘리자베스) 라쿠엥의 또다른 자아다.


자의식 강한 9살 실비와 새학기 짝으로 등장한 앙드레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되면서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성장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단순히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고 억압적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토론을 했고, 항상 우리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곤 했다. 오늘은 아주 실제적인 일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 안에 있는 완고한 믿음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너져 내렸다. (pp.168-169)

그렇고 그런 흔한 여자아이들의 우정에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여자아이들의 우정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담하며 재기발랄한 여자아이들을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내용으로, 기성세대가 공고히 구축한 교육은 형식으로 억압하는 당시 풍토다. 한 예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것을 계급의 결과로 인식하는 선민의식이 20세기 초 프랑스 소도시의 풍경이라는 사실이 의외롭다. 프랑스는 시민혁명과 인권선언의 나라가 아닌가. 일종의 '프랑스 너마저도'하는 배신감이랄지.


삶의 내용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웠단들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그 자체로 미완이다. 그리고 죽은 이가 남긴 미완의 영역을 채우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아마도 뇌수막염으로 추측되는 앙드레의 죽음은 사건이라기엔 느닷없고 사고라기엔 지나치게 비극적인데, 선택을 할 수 없는 선택으로 내몰린 앙드레가 고열에 시달리는 몸으로 연인의 아버지를 찾아가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장면은 이것이 살아있는 앙드레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에서 몹시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잔상을 남긴다. 더 큰 불행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조차 자신의 신에게로 도망치는 비겁한 부모다.


갈라르 부인은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는 도구들이었을 뿐이야." 갈라르 씨가 부인에게 말했다. (p.189)

당사자의 의사를 배제하고 결혼- '짝짓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지드의 표현처럼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을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도식화시켜 집단에 강제 편입시킴으로써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확인받고자 하는 기성 질서의 권력은 또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누구도 자신의 도덕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것이 자식,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집단과 개인 간 헤게모니 쟁취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의 아포리즘 '목적지는 있지만 경로가 없다. 우리가 경로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를 빌리자면, 실비와 앙드레는 부모와 학교와 사회가 선의로 포장해 그들에게 내민 꾸러미가 정직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정의할 단어를 몰라 망설이고, 경로 이탈을 두려워한 아이들이 망설이는 사이 기성세대의 질서가 앙드레를 집어삼켰다고 할 수 있다. 실비 입장에선 둘도 없는 사이였던 앙드레를 빼앗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장소설이겠거니 하고 첫 장을 열었던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일종의 고발문학으로 다가왔다.


자자에게


오늘 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네가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일까? 이 이야기를 너에게 바치고 싶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여기서 네게 문학적 기교를 통해 말을 걸고 있는 거지. 게다가 이것은 너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일 뿐이야. 너는 앙드레가 아니었고, 나는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 실비가 아니었잖아.


시몬이 원고를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고 다듬었던 심정을 어쩐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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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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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한 서동욱 교수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말하자면 보관함과 장바구니 경계에 있던 책인데- 재미있을 것 같은데 추천한 사람이 이동진(책 취향이 나랑 안맞음),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아싸! 가져온 책이다. 그때 눈에 안 띄었으면 아마 주문했을 것 같지만. 

여튼 프롤로그를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했으니,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동진 평론가가 극찬한 프롤로그가 이 책의 여러 챕터 중 가장 별로였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저자의 직업적 정체성이 프롤로그에 그대로 담겼는데 철학자 특유의 관념론적 사고가 시인의 언어를 빌리니 문장은 예쁘고 심오한 뭔가도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뭐라는 거지' 싶은 거다. 아, 이번 독서는 난항이겠구나 예감한 순간이었다.

 

저자의 문법이 내 기호와 맞지 않다는 거지 내용은 흥미롭다. 책은 전반적으로 사물의 미시에 집중하는데 '반복'을 위시한 몇몇 챕터에서 마주치는 니체의 흔적이 반갑다.


한스도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쇼샤는 한스가 초등학교 시절 호감을 품었던 히페라는 소년과 닮았다. 한스는 동성인 히페를 연인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런데 히페에 대한 호감은 히페를 닮은 쇼샤에 대한 사랑이 탄생하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과거의 히페는 현재의 쇼샤에 대한 사랑 속에서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어떤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뜻이 아니다. 즉 히페는 히페로서 반복되지 않는다. 히페가 쇼샤로 변신하고서 반복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반복은 서로 다른, 즉 차이 나는 것들(히페와 쇼샤) 사이에서 생긴다. (p.38)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내용을 몇 꼽아보자면 인간이 실수를 반추하거나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이유는 자가치유 때문(pp.36-37), 교회에 사람이 없자 물고기들에게 가서 설교를 했던 성 안토니우스의 일화(p.90), '근대' 개념의 환기(p.154), '도시가 건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 도시를 소유한다'(p.276)는 원근법 해석, 수집에 열을 올렸던 발자크를 통해 과거의 사물에 관심을 쏟는 자는 수집가, 미래의 사물에 관심을 쏟는 자는 발명가로 정의하는 것(p.303) 등이다.

 

이중 '근대'에 덧붙이자면 '근대'는 그동안 단어 혹은 용어로 관성적으로 습득했던 내겐 신선한 학문적? 환기가 되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근대와 인간 주체의 탄생」은 해당 책에서 가장 진도가 안 나갔던 챕터인데 이유는 철학자와 일반인의 위치에서 오는 괴리 때문이다. 당연한가? 당연할지도. 

 

지식인의 현학적인 태도가 빛을 발하는 때는 대개 개념을 개념으로 설명할 때인데 이 챕터는 유독 이런 장면이 많다. 저자는 '근대'로 포문을 열고 '인간 주체'를 끌어오는데 문제는 '인간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과 '주체'를 잘게 부수는 서술이다. 앞서 이 책은 저자가 사물의 미시에 집중한다고 썼는데 '인간 주체'는 이 집중도가 지나쳐서 살짝 현기증이 일 정도. '인간 주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갔다가 라틴어로 갔다가 칸트와 하이데거를 거쳐 다시 근대로 돌아오는데(pp.156-157) 이 과정을 거치고서야 마침내 '인간중심주의'가 등장한다. 산넘고 물건너 황야를 가로질러 도착하고 보니 목적지가 옆집인 걸 발견한 기분.

 

문제는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이어지는 챕터는 '근대 이후 A.I.'인데, '인간-기계' 또는 '주체-기계'인 키메라는 인간의 가장 좋은 조언자가 될 수도 있고,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 주체가 인공물과 자연을 지배하는 시대, 바로 근대와 결별한 것일까?(p.167) 는 논리의 전개는 재미있다만 다소 비약적인 결론으로 느껴진다. 단적으로, 챗GPT의 활약에 나는 저자만큼 감탄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S와 아마 오래지 않아 로봇이 음식을 요리하는 세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나눴다. 쿡봇(cook-bot)이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해 정확한 계량을 거쳐 조리한 음식을 내놓는 거지. 당연히 음식은 맛있을 것이다. 근데 쿡봇이 맛을 알까? 

 

영화 <매트릭스>는 아키텍트가 인간의 행동양식을 관찰하고 분석해 '인간세상'을 복제하지만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해 완벽한 구현에 실패하고 여섯 번이나 시행착오를 겪는 내용이다. 네오와 오라클의 대화에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등장하는데 인식론의 영역을 정복한 기계가 과연 존재론의 영역도 정복할 수 있을지, 도래할 A.I.미래에 현시점에서 내가 가장 궁금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할란 엘리슨의 소설 『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em』은 과학자가 슈퍼컴에게 매일매일 'I AM'을 가르치는데 어느날 슈퍼컴이 'AM'을 깨우치고 인간세계를 정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기계라면 신인류로 인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해체는 사물의 전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 진통이라는 내용은 더이상 새롭지 않지만 철학적 논쟁의 양극단에 서있는 데리다의 영향력과 마주치는 순간은 여전히 놀랍다.

 

기차의 창문들 각각처럼 세계는 전체를 이루지 않는 파편들, 차이뿐이다. 전체성은 주인공이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옮겨갈 때 그 '횡단선'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횡단선을 따라 생기는 이 전체는 파편들을 통일하는 원리 같은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도, 법칙도 없으며 오로지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p.213)

 

1,2,3부는 다소 엎치락뒤치락 읽었다면 4부는 술술 넘어간다.

저자의 이력을 보고 철학자의 언어와 시인의 언어가 만난 결과물이 궁금했는데 대중의 언어가 아닌 것은 알겠다.

 

참. 오랜만에 강백호(슬램덩크)의 대사를 만나 반가웠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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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함께 읽기
강대진 지음 / 북길드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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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 쇼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책을 이미 갖고 있지만 국내 저자의 ‘신곡 강의‘라는 점과 도레와 블레이크의 그림과 같이 읽는 것이 매력적이라 오랜만에 펀딩에 참여했어요. 실물은 더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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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카프카 - 프란츠 카프카 타계 100주기 기념
김태환 외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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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6월 3일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카프카가 현대인의 의식 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풀이했다. 그 전형성이란 세 가지 느낌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첫째, 정체불명이라서 달래지도 못하는 불안과 모멸의 감지. 둘째, 밑도 끝도 없이 난해한 세상이 개인의 발목을 잡는다는 감각. 셋째, 오랜 관습과 신앙의 외피로부터 발가벗겨진 나머지 모든 접촉에 아파하는 신경 조직처럼 과도하게 예민한 감수성 등이다.


'카프카를 위하여' (p.21)


2024년 카프카 사후 100주기 기념으로 출간된 『카프카, 카프카』는 '카프카에스크kafkaesk'(카프카스럽다, 카프카적이다) 깃발 아래 모인 저자들의 소설, 수필, 비평으로 구성되었다. 책은 먼저 아포리즘으로 포문을 여는데 아포리즘 하나하나가 한숨 나오게 좋다. 카프카 잠언 모음은 솔 출판사의 전집에도 있고 단행본도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렇듯 한 세기가 지나도록 카프카 이후 세대에게 여전히 영향력 있고 영감의 원천이 되는 카프카를 나는 천재라고 부른다. 참고로 아포리즘 일부는 '응?' 싶은 저자의 해설도 있지만 이건 해석의 영역이므로 개인의 몫이겠다.


불안과 비정상이 가득한 카프카 소설의 진짜 공포는 정작 그러한 상태에 놓인 인물들은 독자만큼 불편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괴리에 있지 않을까. 마치 칸트가 인용했던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을 빌려 '당신이 따지고 싶은 것에 대해 따지고 싶은 만큼 따져보라. 그러나 복종하라'를 실천하는 모범시민이랄까. 하물며 그들은 제대로 따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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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칼럼은 시간을 들여 정독할만 하다. 개인마다 감상과 해석은 제각각이겠으나 내게 카프카에스크는 '불안, 소외, 출구없음'으로 정리된다. 불안, 소외는 산업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겪는 공동의 질환이고 이미 문사철이 충분히 다루어왔고 앞으로도 다룰 것이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 이야기하고 싶은 건 '출구없음'인데 1인극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무리 중 혼자 포획된 원숭이 피터가 대서양을 건너는 우리 안에서 바랐던 게 자유가 아니라 출구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p.136) 


기억해야할 것은 어딘가로 나가는 출구는 동시에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이다. 결국 피터는 인간을 학습하는 것에 성공하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가는 출구를 연다. 카프카는 굳이 출구와 자유를 설명하지 않고도 인간화된 피터를 통해 두 의미의 차이를 백마디 말이나 장면보다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기호의 소설은 요즘 시국에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이 이룬 사회에서 인간의 악의가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실체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생각해봤는데 대부분 '이기심(이기주의)'으로 귀결되었다. 본인 탓일지도 모르는 한 인간의 사망 소식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가 시종일관 어찌나 차갑던지 '굳이 저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불쑥 치솟는 반발심의 경로를 더듬어보니 '굳이 저렇게까지'의 종착지에 도사린 것 역시 화자의 '이기심'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기분이 상했다는 자기본위가 타인을 불안으로 결국 사망으로 떠밀고도 인간이라면 느껴야 할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짐승도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 소설의 화자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인 것이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이 열리지 않는 입구를 앞에 두고 벽 바깥에서 영원히 떠도는 육체라면 이기호의 단편 《심사》는 이기주의라는 벽 안에 갇힌 인간의 마음이다.


수록작 모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재료가 신선하고 좋으면 맛있는 요리가 나오듯 카프카는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시간이다. 

다만 새 챕터를 읽을 때마다 책 후면을 뒤적여 저자와 약력을 확인했다. 좋은 재료라도 요리사의 칼질에 따라 삼키지 못할 쓰레기가 되기도 하니까. 이렇듯 감시와 처벌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행한다. 이 행위를 하며 카프카에스크를 자처하는 글들을 읽었다. 이것이야말로 또다른 의미의 카프카에스크(Kafcaesk/Kafcaesque)이겠거니, 카프카와 제법 어울리는 현실적인 역설에 혼자 웃었다.


카프카의 절친 막스 브로흐가 카프카의 유고를 비롯한 원고, 메모, 한 줄 쪽지까지 어떻게 습득하고 보관했으며 히틀러 시대를 거쳐 무사히 출간했는지 M에게 얘기해줬더니 M이 "유대인 친구를 만나야겠군" 했다. Oh...!





S가 치과진료를 받는 동안 이 책을 읽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정차했을 때 S에게 아포리즘에 등장한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한참 떠들었다.

시작은 "S야, 불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엔딩이 뭐였지?" 물으면서였다. 독수리에게 간을 빼앗기고 그 다음이 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는 거다. 영원히 반복해서 간을 빼앗기고... 그걸로 끝이던가? 최근 문득 느낀 건데 소설을 제외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의 엔딩이 종종 기억이 안 난다. 혹시 나처럼 엔딩이 궁금한 분이 있을까 하여...

3000년 후 헤라클레스가 나타나 독수리를 활로 쏘아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는 드디어 바위와 독수리로부터 해방된다.


프로메테우스 엔딩으로 시작해서 카프카의 프로메테우스를 거쳐 리들리 스콧의 영화 '프로메테우스'로 넘어갔다.

영생불사하고 싶은 돈 많은 인간의 미친 욕심과 인류의 기원의 미스테리를 풀고 싶은 과학자의 미친 신념을 태운 프로메테우스호가 인류의 기원을 만나러 우주로 날아간다. 


"생각해봐. 개미가 인간을 숭배한다고 해서 인간이 개미를 존중하진 않잖아? 인류의 기원(인간의 창조주, 외계인, 엔지니어 뭐든) 도 마찬가지였던 거지. 그래서 인간이 개미를 아무 생각 아무 느낌 아무 감정 없이 손끝 발끝으로 눌러죽이고 개미굴에 불을 지르듯 인류의 기원도 인간을 마구마구 몰살해. 인간은 무슨 자만심으로 신이 인간을 기꺼이 반길 거라고 의심 없이 믿었을까. 웃기지? 재밌지?"


영화를 안 본 S가 웃기고 재미있다고 했다.



맞다. 우리는 지금 카프카의 초기 독자들이 함께 발견한, 카프카 소설의 어떤 본질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나는 카프카의 마스터 플롯master plot이 욥기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보는 사람들의 그룹에 기꺼이 속하려 한다. 막스 브로트, 게르슘 솔렘, 마르틴 부버 등이 카프카를 그렇게 읽었다. 나중에 노스럽프라이가 지나가는 말로 카프카의 《소송》을 <욥기>의 미드라시Midrash(주석 문학) 같다고 한 것도 유명한 사례다.

나는 이 표현을 확대 해석해서, 카프카 문학의 부피가 <욥기>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읽는다.


신형철 '오직 나만을 위한 불가능' (pp.212-213)


신정론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대응이고, 고통의 문제는 소위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속에서 다루어진다.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따르면 세 종류의 악이 있다. 피조물의 근원적 불완전성이 있고(형이상학적 악), 그 때문에 저질러지는 범죄가 있으며(도덕적 악),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이 있다(물리적 악). 고통은 결국 악의 문제다. 그렇다면 고통에 대해 묻는 일은 왜 악이 있는지를 묻는 일이 된다. '악의 문제'란 전지·전능·전선하다고 간주되는 신이 왜 세상의 악을 창조 혹은 방조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악에 대한 물음은, 물음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하나의 문제로 드러난다. '신은 악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진지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악의 존재를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악을 알고 또 어찌할 수 있는데 그냥 방치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선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함이 있는 신이란 그 자체로 개념적 모순이다. 그러나 악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신은 없거나, 있어도 가치 없는 존재다.'


신형철 '오직 나만을 위한 불가능' (pp.213-214)



라이프니츠 '신정론의 세 종류의 악'을 창세기 카인의 살인에 대입해보면 신정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숨에 이해할 수 있다. 그러게 신이 잘못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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