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의 모든 것 - 이상하고 오싹한 이야기에 숨겨진 진짜 호러를 만나다
김봉석 지음 / 상상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으면 '하지 말라는 짓은 제발 좀 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얘기한다. 영화든 책이든 장르물을 볼 때 실제로 우리를 가장 속터지게 하는 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 인간이다.


폐가나 흉가에 가지 말라는 이유도 비슷하다. 대개는 문제가 없지만 잘못하면 원혼이 달라붙거나 해코지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그러니 피치 못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하지 말라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다. (p269)


그러니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제일 좋다. 고쿠리상을 불러낸다거나, 이상한 주문을 외우고 이름을 부르거나 하는 짓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주의 비디오인 줄 모르고 그냥 볼 수는 있겠지만, 경고 문구가 있는 책이나 영상은 보지 말아야 한다. 호러 영화에서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은 금기를 어기는 이들이다. (p.305)


괴담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금기를 깨면 절대 안 된다.' (p.343)


영화와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고구마 설정이겠거니 했던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인간'이 실존하는 생물임을 우리는 팬데믹 시기에 직접 목격했다. 나로 말하자면 '극 위험회피주의자'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짓은 절대 안 하고 가지 말라는 곳은 절대 안 간다.


'호러 백과사전'을 읽는 기분인 『호러의 모든 것』 은 '공포', '호러', '괴담'으로 구성되었다. 공포와 호러의 차이를 물리적인 위협인가 심리적인 위협인가로 구분한다면, 공통점은 인간의 '금기에 대한 호기심과 관음증'(p.202)일 텐데 결국 이 기괴하고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감정은 결국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괴담이 있다. '공포'와 '호러'에 비하면 보다 생활밀착적인 '괴담'에 대해 저자는 '단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뒤틀린 방식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가장 폭력적으로 터뜨리는 수단이 된다. 그렇기에 실화 괴담은 곧우리 현실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p.279)고 정의한다.


대개 '동양의 괴담', '서양의 호러'라고 한다. 호러는 상상의 세계, 공포는 현실 세계, 괴담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 어드메에서 발생하는데 유독 괴담이 아시아 지역에서 더 성행한 건 농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연밀착적인 농경이 생활터전이고 보니 기우제나 풍어제 같은 기후 풍속을 주시하는 태도가 일상 깊숙이 파고들어 토속신앙, 민간신앙을 낳은 것인데 희비극은 논리와 이성으로 인간의 두려움에 대답을 들려줄 수 있게 된 오늘에도 여전히 미지를 향한 공포가 과학 문명의 축복을 뚫고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예전에 도쿄 시의원과 1시간 가량 '신도'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물론 나는 듣기만 했다) 얘기의 시작은 '일본 신도를 아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신도'를 말하자면 이날 처음으로 현지인의 입을 통해 자세히 들었는데 '신도'(神道)란 일본 민간(민속)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신도는 천여 개 정도 된다고 한다. 실제로 도쿄 번화가 신주쿠만 해도 조금만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리탑 같은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신도의 영향인지 일본은 심야시간대는 물론이고 주말 대낮이나 저녁에도(흔히 말하는 황금시간대) 괴담 방송이 넘쳐나는데 특히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제보로 구성한,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화괴담'은 대낮에도 무서워서 비명이 막 나온다. 물론 이건 공포에 대한 면역이 0에 수렴하는 겁쟁이인 내 얘기다.


괴담 방송이 무서웠던 이유는 제보 내용이 지극히 사실적이었기 때문인데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다. '사실적'. 다른 말로 '리얼리티'. 그러니까 괴담의 공포는 언젠가 어쩌면 나도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났을 것 같은, 그러나 진위 여부가 판명되지 않아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사건'의 목격자 혹은 주인공이 될지도 모를 가능성, 그러니까 미래로부터 도래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M이 새벽에 잠시 잠이 깼는데 앞에서 처녀가 머리를 빗고 있더란다. 떨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내가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처녀가 머리를 빗고 있네- 하곤 다시 잤다고 했다. 귀신을 내 안전한 세상에 끼어든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마냥 무섭기만 하지는 않을 것도 같고...는 개뿔 나는 절대로 자다가 깨지 말아야지. 혹시 깨더라도 절대 눈을 뜨지 말아야지.


괴담의 본산처럼 느껴지는 '일본 괴담의 역사'(pp.290-295)는 J호러 백과사전처럼 느껴진다. 종종 하는 말이지만 영국의 '호러', 일본의 '괴담'은 바다로 둘러싸여 폐쇄된 공간인 섬나라만의 호러 바이브가 있다. 바로 불쾌하고 끈적하고 산소가 희박한 밀실 공포에서 비롯된 사이코 드라마인데, 예전에 어느 리뷰에도 썼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가 다른 탐정 소설과 달리 유독 괴담 호러가 많은 이유는 '섬나라'라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여담인데, 나는 영화 '링'을 보지 않았지만(당연하다!) '링'의 사다코가 TV화면 밖으로 기어나오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밈처럼 유행하는 유명한 장면이라 잘 알고 있다. 근데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사다코가 러닝타임 내내 긴머리통을 들이밀고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만. 의문의 죽음의 실체를 밝히고 문제가 해결되어 영화가 이제 끝났구나 하는 시점에 예의 사다코가 튀어나온거더만.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본 사람은 영화 막바지에 공포가 대단했겠더라.

예전에 나와 M을 포함 관객이 6,7명 쯤이었던 심야극장에서 한국 영화 '아랑'을 봤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던지 같이 본 M이 시끄러워서 너랑 영화 안 본다고 한동안 나랑 극장에 가지 않았다. 무서운데 어쩌라고.


저자는 무서운 이야기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 가공으로만 즐기라고 하지만 좀 극단적으로 무서움을 많이 타는 나는 가공도 싫어하고 안 본다. 강조하지만 나는 영상에 한하여 고어물은 못 보고, 공포물은 안 본다. 고어물은 생리적인 거부감 때문에 못 보는 것이고, 공포물은 저건 영화적 상상일 뿐이라는 거리두기가 개민눈물만큼도 안 되기 때문에 아예 안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엑스트라1이면 아마도 가장 늦게 죽던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유일한 인물일 거다. 일단 하지 말라는 짓은 절대 안 할 것이고, 혼자 뭔가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특별한 예외라는 자만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십억 광년의 고독 (리커버) 대산세계문학총서 81
다니카와 슈운타로 지음, 김응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슌타로의 시집 『이십 억 광년의 고독』은 인터뷰 한 편과 산문도 세 편 실었다. 이 시집은 통쇄 10쇄다. 놀랍다. 더 놀라운 건 나는 시인과 시인의 시집과 이제 처음 안면을 텄다는 사실이다.


시를 번역하면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詩』다. 시를 번역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다. 같은 단어지만, 품은 뜻은 미묘하게 다른 『시』와 <시> 사이에서, 모국어에서 떨어져 자립하려는 시 작품은 괴로워하고 있다.


p.5

'詩'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새삼 '시'에 대해 생각한다. 

한 걸음 멈추고, 다시 한 걸음 멈추고, 시인의 언어와 교감한다.


나는 활자와 언어에 민감한 작가를 좋아한다. 그런 작가는 글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 글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읊어주는 미묘하고 섬세한 순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돌 하나를 놓는 마음, 마음이 떠난 자리에 사무치는 슬픔. 그 슬픔이 자박자박 마음을 밟으며 걸어들어오는 순간 시인의 슬픔은 독자의 슬픔이 된다. 

공감하는 언어. 그것이 시인의 말글이다.


인간이 문자로 지어낼 수 있는 가장 찬란한 순간은 '시詩'가 아닐까, 그런 생각.


보드라운 진흙이 먼저 내 입술에, 다음에는 점점 큰 흙덩이가 내 두 다리 사이에 내 배 위에. 둥지가 무너져버린 개미 한 마리 순간 묶여 있는 내 감은 눈 위를 기어간다.


p.68 '빌리 더 키드'

산문시 '빌리 더 키드'에 이르렀을 때 슌타로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기시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았다. 바로 앨런 긴즈버그다. 'Howl(울부짖음)'이 아니라 '한 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된다'고 낭독하던 영화 『킬링 유어 달링』의 그 앨런 긴즈버그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시인이 부르는 '사랑'이다. 이 어르신은 특히 내로남불하는 불륜詩가 좋다. 불륜도 싫고 불륜 드라마도 불륜 소설도 싫은데 불륜 시는 좋으니 동그란네모인가 싶지만... 어쩌라고, 좋은데...


소설은 그렇지 않은데 마음에 드는 시집을 만나면 여러 권 사서 쟁이고 싶다. 침실에, 거실 소파에, 식탁에, 서재 책상 위에, 차 글로브박스에 한 권씩 던져 놓고 눈에 띌 때마다 읽는 거지.


사랑에 빠진 남자


연인이 얄궂게 웃는 얼굴의 뜻을 읽어낼 수 없어서

그는 연애론을 읽는다

펼쳐든 페이지 위의 사랑은

향내도 감촉도 없지만

의미들로 넘쳐난다


p.1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액스 - 박찬욱 감독 영화 <어쩔수가없다> 원작소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킬러가 아니다. 살인자가 아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영혼이 없는 킬러.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사건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것일 뿐이다. 주주들의 논리, 임원들의 논리, 시장의 논리, 노동력의 원리, 밀레니엄의 논리, 그리고 나 자신의 논리.

대안을 알려주면 살인을 멈출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벌이는 짓은 끔찍하고, 까다롭고, 섬뜩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중략)

이런 생각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무장한 킬러다. 무자비한 괴물. 내 안에는 바로 그 괴물이 담겨 있다.

(p.162)

'나쁜 짓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안의 괴물이야'라는 궤변을 어디서 봤더라...


잠재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자인 독자는 소설의 화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엑스』는 손에 꼽을 정도로 주인공- 버크 데보레가 역겨웠던 소설이다. 건조한 서술을 보면 작가도 버크에게 동정을 느끼지말라는 것 같고.


버크 데보레는 해고된 지 2년 째인 실직자다. 실직 수당은 떨어졌고 아내는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 해고 열풍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따라서 버크의 재취업도 요원해보인다. 그리하여 버크는 결단을 내린다. 미래 경쟁자를 제거하기로.


생각해보자.


버크의 경쟁자는 중간 관리자다. '중간 관리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이는 중년일 것이고,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큰 실수 없이 성실하게 일했을 것이고, 당연히 가정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버크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평생 한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다 실직하고 재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버크의 제거 명단인 것이다.


버크와 사적 이해 관계가 전혀 없지만 재취업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버크의 제거 대상 리스트에 오르는 사람들. 이 소설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성실하게 살아온 평범한 이웃이 영문도 모른 채 살해당하는 것. 연쇄살인마 덱스터는 그나마 살인자를 죽이기라도 했지.


집 근처 식당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는 세 번째 대상을 제거하고 모텔로 돌아가는 길에  버크는 흐느껴 우는데(p.110) 그 모습이 너무너무 역겨웠다. 개새끼. 

세 번째 살인 후 형사가 버크를 찾아오고 연쇄살인의 수법이 총이라는 단서를 흘린다. 형사의 얘기에 버크는 살인을 멈추는 게 아니라 총을 포기한다. 이쯤되면 버크에게 이제 살인은 생존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는' 뭔가를 확인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네 번째 경쟁자는 아직 40대라는 이유로 50대 버크의 분노를 산다. 젊음이 죄인양, 부부사이가 좋은 것이 죄인양 네 번째 경쟁자를 증오하는 버크는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다. 하긴 경쟁자리스트를 들고 살인하러 돌아다니는 놈이 정상이면 안 될 말이지. 버크는 젊고 유능한 네 번째 경쟁자를 쇼핑몰 주차장에서 둔기로 때려죽인다. 개새끼.


버크의 범행수법은 점점 대담해진다. 이제 잠긴 문을 열고 타인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킬러 소질을 타고난 것인지, 버크의 믿음처럼 절실한 생존욕구가 만든 당위인지는 버크 본인만이 알 것이다. 어쨌거나 버크는 경쟁자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효율적이며 결과가 확실한 자신의 '노하우'가 아주 마음에 들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웃에게 필요하다면 노하우를 알려줄 마음도 있다. 혹시 나중에 또 일이 잘 안 풀린대도 자신에겐 노하우가 있으니 더는 불안하지 않다.


버크 리스트엔 모두 일곱 개의 명단이 있지만 못생겨서 이혼당한 덕분에 살아남은 헨리8세의 네 번째 부인처럼 버크가 찾아오기 직전에 구직에 성공한 한 명은 운 좋게 살아남는다. 

마지막 일곱 번째 대상이 버크 리스트의 하이라이트인데 그는 버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회사에 재직 중인 직원이다. 구직이라는 공동 목적을 가진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기 위해 시작한 살인은 내가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버크의 눈물이 왜 그토록 역겨웠는지 확인했던 반전이다.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의 영화'라는 해설을 봤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영화는 아직 안 봤지만 아마 앞으로도 안 볼 것 같다.


책을 덮으며 의문이 남는다. 과연 버크의 살인을, 전국을 휩쓰는 실직 사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생존방식의 우화로 봐도 되는가 라는.

물론 국가가 돌보지 않는 산업 현장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각자도생하는 야만의 몸부림이라는, 사회소설의 메타포로 읽을 수도 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에 원작 제목 대신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no other choice

과연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그럴리도 없지만 그래서도 안 된다. 이것이 공동체 구성원인 개인의 정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중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언어의 유목민인 다와다 요코의 문장을 읽는 경험이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것은 아마도 독자도 이미 다양한 언어의 경계를 부유하는 유목민이기 때문일 터. 결국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의 언어를 공감하는 시공간이려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둘도 없는 사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수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둘도 없는 사이'가 서양식 표현은 아닐 것 같다는 근본 없는 의심을 하며 표지를 확인하니 원제가 'LES INSEPARABELES'다. 프랑스어 직역은 '떨어질 수 없는(분리할 수 없는)'.


자전적 소설 『둘도 없는 사이』의 실비는 시몬 드 보부아르, 앙드레는 자자(엘리자베스) 라쿠엥의 또다른 자아다.


자의식 강한 9살 실비와 새학기 짝으로 등장한 앙드레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되면서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성장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상처를 단순히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고 억압적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토론을 했고, 항상 우리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곤 했다. 오늘은 아주 실제적인 일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 안에 있는 완고한 믿음 앞에서 모든 논리는 무너져 내렸다. (pp.168-169)

그렇고 그런 흔한 여자아이들의 우정에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여자아이들의 우정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담하며 재기발랄한 여자아이들을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내용으로, 기성세대가 공고히 구축한 교육은 형식으로 억압하는 당시 풍토다. 한 예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것을 계급의 결과로 인식하는 선민의식이 20세기 초 프랑스 소도시의 풍경이라는 사실이 의외롭다. 프랑스는 시민혁명과 인권선언의 나라가 아닌가. 일종의 '프랑스 너마저도'하는 배신감이랄지.


삶의 내용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웠단들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그 자체로 미완이다. 그리고 죽은 이가 남긴 미완의 영역을 채우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아마도 뇌수막염으로 추측되는 앙드레의 죽음은 사건이라기엔 느닷없고 사고라기엔 지나치게 비극적인데, 선택을 할 수 없는 선택으로 내몰린 앙드레가 고열에 시달리는 몸으로 연인의 아버지를 찾아가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장면은 이것이 살아있는 앙드레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에서 몹시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잔상을 남긴다. 더 큰 불행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조차 자신의 신에게로 도망치는 비겁한 부모다.


갈라르 부인은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하느님 손안에 있는 도구들이었을 뿐이야." 갈라르 씨가 부인에게 말했다. (p.189)

당사자의 의사를 배제하고 결혼- '짝짓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지드의 표현처럼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을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도식화시켜 집단에 강제 편입시킴으로써 가정과 사회의 안정을 확인받고자 하는 기성 질서의 권력은 또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누구도 자신의 도덕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것이 자식,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집단과 개인 간 헤게모니 쟁취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카프카의 아포리즘 '목적지는 있지만 경로가 없다. 우리가 경로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를 빌리자면, 실비와 앙드레는 부모와 학교와 사회가 선의로 포장해 그들에게 내민 꾸러미가 정직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정의할 단어를 몰라 망설이고, 경로 이탈을 두려워한 아이들이 망설이는 사이 기성세대의 질서가 앙드레를 집어삼켰다고 할 수 있다. 실비 입장에선 둘도 없는 사이였던 앙드레를 빼앗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장소설이겠거니 하고 첫 장을 열었던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일종의 고발문학으로 다가왔다.


자자에게


오늘 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네가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일까? 이 이야기를 너에게 바치고 싶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여기서 네게 문학적 기교를 통해 말을 걸고 있는 거지. 게다가 이것은 너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일 뿐이야. 너는 앙드레가 아니었고, 나는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 실비가 아니었잖아.


시몬이 원고를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고 다듬었던 심정을 어쩐지 알 것도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