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인 최영의는 소와 싸울 때 '너 소야? 나 최영의야!' 라고 말하고 나서, 한 손으로 소의 뿔을 잡고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난타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넘버 3>에서 송강호가 한 말이다. 그런데 소는 그렇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 책은 그렇게 '잡으면' 안 된다. '너 책이야? 나 독자야!' 하고 집히는 대로 읽는 일은 난독亂讀이요, 페티시fetish이다. 좋은 독서가 되려면 '나는 왜 이 책을 읽는가?'라는 강한 동기 부여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두 권의 책은 난독이거나 페티시가 아니라면, 또 다른 독서질병讀書疾病인 관음증에 가깝다. - p.178,『장정일의 독서일기 7』

- 본문의 '두 권의 책'은 앨리노어 허먼『왕의 정부』, 마거릿 크로스랜드『권력과 욕망』
-『독서일기7』은 기존 범우사에서 랜덤하우스로 출판사가 바뀌었다.

인용한 글은 마침 책을 쇼핑하듯 읽지 말아야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좀 더 집중해야지, 반성하던 시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던 문단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출간을 접하자마자 바로 주문한『장정일의 독서일기 7』은 인쇄일이 10일로 찍혀 있다. 책을 주문한 것은 12일이었으니 이 정도면 장정일의 팬이라고 해야 하나.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서평가 장정일의 팬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장정일의 독서 리스트를 '매우' 신뢰하는 편이다. 이를 테면 국내의 모든 번역본 중 민음사의『호밀밭의 파수꾼』이 가장 좋았다는 얘기에(독서일기 7) 안심했고, 자기네 언어로『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수 있는 중국인이 부럽다고 하는(독서일기 5) 부분에선 생각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느꼈다. 또한 아마도 그의 독서일기 시리즈에 가장 자주 등장했을『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경우,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전반 30여 페이지쯤 읽었을 때 책을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온라인 세상의 확장으로 타인과 만나는 것이 쉬워진 요즘, 비슷한 취향을 발견하면 우선은 반가움을 느끼게 되고 그 반가움은 내처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고작해야 같은 소설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는(『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이른바 문화소비의 세대가 아닌가. 이건 책도 마찬가지. 
사실 새로운 책을 만나는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매우 비슷한 데가 있어서 거의 대부분 첫 한 문장, 혹은 앞 몇 페이지에서 그 만남이 즐거울 것인가 악몽이 될 것인가 결판이 난다. 

언젠가 저녁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내 책 치고는, 꽤 많이 상한 이유로 눈에 띈『장정일의 독서일기』는(이 책은, 아마 출간 당시만 해도 연작 계획이 아니었던지 '1'이라는 숫자가 빠져 있다), 책이 왜 이렇게 상한 거지, 이리 저리 들추다가 공지영 작가 소설에 관한 저자의 감상에 공감을 느끼면서 정리는 이미 뒷전이고 기어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게 했다. - 실제로 소설이 아닌 이런 류의 책들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서대로 읽기보다는 틈틈이 넘겨서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공지영의《고등어》(웅진출판, 1994)를 읽다.
(중략…)일전에《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같은 작가의 소설을 두고 한 평론가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우스운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말했고 나는 관습과 역할 그리고 더 나아가 상징과 신화에 도전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의사 페미니즘은 TV를 통해(연속극) 매일, 아침 저녁으로 쉴새 없이 반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평론가는 페미니즘적 수준 성취는 물론이고《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이라는 나의 불평마저 접수하길 거부했다. 자신은 그런 문장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고등어》를 읽으며 나는 불평을 넘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앞서의 '형편없는 수준' 운운 하는 대목은 상당 부분 작가의 오문과 악문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 한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사회통념에 반하는 소설을 저작, 출판했다는 명목으로 감옥까지 갔다 온 주홍글씨가 붙은 불온한 작가 장정일과 국내 여성작가들 중 단연 베스트셀러 작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작가 공지영. 하지만 장정일은 그 스스로 작가인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거대한 독서량을 비축한 한 사람의 독자 혹은 서평가가 아닌가. 좋은 글을 쓰는 것과 좋은 비평을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작가 공지영이 독자 장정일의 지적에 한 번쯤 주의를 기울여주길 바란다면 오지랖 넓은 것이 될까.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면서 더 이상 자필 기록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기 전까지만 해도 책을 사면 책 표지 안쪽에 구입 날짜와 간단한 메모를 하던 때가 있었다.『장정일의 독서일기』표지 안쪽에는 '96년. 3.21. 거듭남을 위해'라고 씌어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메모를 했는지 지금은 물론 기억에 없다.

장정일의 독서량은 알려진 것처럼 한 마디로 거대(!)하다. 한 개인이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졸 학력이라는 드문 이력을 가진 소설가 장정일은 제도권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한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아니 감히 그런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내게 교육의 허와 실을 되짚어 보게 하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장정일의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다음 소설을 기다려 본 일도 없고 이미 읽은 소설도 왜 읽었을까 후회했다. 그러니 나는 소설가 장정일의 팬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평론가가 되고 싶었다던 독자 장정일은 매우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과 평론 가운데쯤 걸쳐져 있는 그의 독서일기를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다음 독서일기를 기다리게 된다.
(여담이지만)그의 소설은『아담이 눈뜰때』『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내게 거짓말을 해봐』등을 읽었는데 단짝 친구K의 언니의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이 이 소설들이었다. 당시 꽤나 자극적이고 민감한 내용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몰고 다녔던 그의 소설을 K와 나는 금기를 엿보는 심리라고 할까, 다소 불온한 동기로 읽었는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그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 혼자만의 자아도취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밖의 기타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 몇 편 안 되는 소설로 장정일이 우리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분명하다.
결국 작가 장정일과 독자 장정일에 대한 내 호오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청준에게 실망한 것은 아니다. 평소에 당신을 싫어했으니까. 그런데 묻고 싶다. 당신을 4.19세대라고도 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가라고도 하는데, 잠든 어린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넣는 애비는 마땅히 그 ㅈㄷㄱㄹ를 잘라 씹어버려야 하지 않나? - p.60,『장정일의 독서일기 5』

이처럼 영화《서편제》의 원작 소설과 원작 작가인 이청준을 싫어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독자 장정일은, 정작 자기가 쓴 소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정일은『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내 심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내가 쓴 모든 작품의 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헤아리셨을 테지만, 이걸 쓰면서 무척 괴로웠다. 사회적 통념과 작가의 상상력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가 너무 커서 자아분열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두 절벽 사이에 내 몸으로 다리를 놓는 것만 같았다. 두 발은 이쪽에 두 손과 머리는 반대켠에. 하지만 그 괴로움과 찢김이 바로 작가가 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작가가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 p. 171, 계간지『리뷰』(96. 겨울호)

요즘 국내소설을 읽다보면 작가만큼이나 자질을 제대로 갖춘 평론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너무 일찍 간 故김현의 자리가 새삼 참 아쉽다.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 p.176,『장정일의 독서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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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0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작가는 '아담이 눈뜰때'만 아주 어릴때 읽어본적이 있어서 이렇게 서평을 잘? 하시는 분인줄 몰랐네요^^ 아낙네님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5   좋아요 0 | URL
엄밀하게 말하면 서평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독서감상에 가깝다고 할까요, 글에서 쏟아지는 작가의 직접적인 표현이나 주관적인 감상이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이 있어 저는 참 재미있게 읽는 독서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