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게 된 건, 그러니까 2013년도에 나오자마자 사두고 이제까지 책장 한켠에 묵히고 묵히다가 3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가차없이' 꺼내어 읽게 된 건 마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 한 구절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사라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 다자키 쓰쿠루가 그 네 명의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조용히, 미스터리하게 살아가야 했다, 라는 비교적 짤막한 이야기를 쓸 예정이었습니다...(중략)... 즉 사라의 말 한마디가 거의 한 순간에 이 소설의 방향과 성격과 규모와 구조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건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라 실은 작자인 나를 향해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너는 이제 그다음 스토리를 써야 한다. 너는 그 영역에 이미 발을 들였고 이미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라고. (p251-252)

 

소설이라는 걸 쓴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나마저 깜짝 놀랐다. 이런 얘기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구체적인 책 제목을 언급하며 얘기를 하니 상당히 현실감 있게 들렸다. 이 책의 구절구절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나는 하루키의 절제된 생활과 남들에게 조금 무감한 듯한 자신의 고집을 낱낱이 이야기하는 에세이적 글투가 좋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다음 읽을 책으로 고민없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골랐다.

 

내가 이걸 안 읽고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영 불편하다. 제일 좋다는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마저도 그랬고 <1Q84>는 이거 뭥미? 라는 느낌으로 내내 읽었다. 재미가 없다 이게 아니라 그냥 나랑 뇌구조가 다른 느낌? 그래서 이 책이 재미있다고 괜찮다고 아무리 얘기를 들어도 아 또 실망할거야... 라는 초조함에 계속 읽지 않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제목도 길어서, 이건 뭐 골라서 나 뭐 읽어요 말하기도 참 난처하지 뭔가.

 

"연어는 아주 긴 여행을 해. 특별한 뭔가를 따라. <스타워즈> 봤어?"

"어릴 때."

"포스가 함께하기를, 연어에게 지지 않게."

(p282)

 

May the force be with you ... 포스가 함께하기를. 난 이 대목에서 하루키가 더 좋아져 버렸다. 하루키는 분명, 스타워즈를 좋아할 것이고 그래서 이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누구든 무거운 짐은 싫어하죠. 그렇지만 어쩌다 보면 무거운 짐을 가득 끌어안게 됩니다. 그게 인생이니까. 세 라 비 (C'est la vie)"

.... (중략)....

"휴가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멋진 두 가지라고들 하죠."

(p294)

 

이 작품이 다른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에 비해서 내게 좋게 다가온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내용이 비교적 일반적(?)이라는 것, 그리고 이제 하루키가 인생에 대해서 뭔가 얘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더 그런 것 같다. 세 라 비.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363-364)

 

이런 얘길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고등학교 때 잘 맞았던 다섯명. 대학교 2학년 때 나머지 네 명이 쓰쿠루에게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하고 쓰쿠루는 그 상처로 인해 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간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모두에게 상처였고, 누군가에게는 피가 철철 흐르는 아픔이었으면 그렇게 인생의 쓴맛을 겪고 다들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자양분 삼아, 각자의 인생에서 나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인생.. 이니까. 그래야만 하는 게 인생... 이라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루키는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나도 너도. 그리고 살아남은 인간에게는 살아남은 인간으로서 질 수밖에 없는 책무가 있어. 그건, 가능한 한 이대로 확고하게 여기에서 살아가는 거야. 설령 온갖 일들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해도." (p378)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p436-437)

 

 

이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음악이 흐른다. 리스트의 <순례의 해>. 특히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를 이야기한다. 나는 사실 몰랐던 곡인데, 들으니 상당히 사색적이고 차분하다. 그래서 이번에 참 오랜만에 음반을 주문해보았다.

 

 

미니 콤포넌트가 망가지는 바람에 새로 사기도 그렇고 고치기도 그렇고 어영부영 지내면서 음반 사는 것에 게을렀었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 덕분에 다시 시작하나 보다. 클래식에 대한 사랑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누구는 극혐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문학도 아니라 하고... 그렇게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기는 하지만, 대중들에게 수십년 간 어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상업적이면서도 문예적인 작가가 아닐까.. 대중이 살면서 느끼는 기저의 마음을 터치함으로써 구매 파워를 가지나, 내용이나 문체가 독특하고 천박하지 않아서 계속 찾게 만드는 지속력도 가지고 있는. 그래서 매번 속는 셈 치고 나오는 책마다 족족 사는 게 하루키의 책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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