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눈팅만 한 40여일 동안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사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던 초반도 있었지만,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책을 떠나 살 수는 없었다. 머리 아픈 거 싫어서 스릴러물도 읽었다가 만지작거리다 못 읽었던 미술사책도 읽었다가... 그리고 이렇게 돌아와 맨 처음 거론하는 책은, 요 네스뵈의 <아들>이다.

 

요 네스뵈 라는 이름 만으로 두말 않고 고를 수 밖에 없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목빼고 기다리지만, 시리즈물이 아니라 스탠드얼론한 작품이라니. 그것은 또 어떨까? 라는 궁금증에 사놓고 며칠을 못 버틴 것 같다.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읽고 나니, 아니 이건 해리 홀레 시리즈를 능가한다고 해도 되잖아. 라는 감상만이 오롯이 남았더랬다. 세상에. 이 사람은 정말 괴물야.

 

"평균적인 지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의 경우, 미모가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일라 센터에서 일하는 건 성공을 위한 어떤 발판도 되지 못하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가치요? 저 사람들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다 맞는 말이다. 외모지상주의라고 사람들은 욕하지만, 외모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쨌든 첫 대면에 좀 괜찮은 혹은 호감가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 온다면 일단 호의적인 태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고 (물론 그게 쭈욱 간다는 보장은 없다) 그게 업무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장담할 자가 누구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뒷말, 가치 있는 일이라는 말에 조금 뜨끔했다. 모르겠다. 그냥 뜨끔했다. 내가 요즘 가치 있게 살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있어서일까.

 

햇빛의 키스를 받은 살갗에 떨어지는 순간 따뜻해지던 작은 빗방울.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던 흙냄새. 꽃과 풀, 이파리의 냄새는 그의 야성을 깨어나게 했다. 아찔하게 했다. 성적으로 흥분시켰다. 다시 젊어지게 만들었다. 아, 젊음.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노인이 있다. 교도소안의 노인. 젊음도 지나가고 지나온 세월은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정이 다 죽은 건 아니다. 생동하는 자연 속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탄력 속에서 스러져간 젊음을 일깨우곤 한다. 사람이 무언가를 절렬하게 느끼는 순간은, 참 대수롭지 않은 어느 시점에서인 것 같다. 그냥 스윽 지나칠 수 있는 그런 시점에서.

 

소니가 제대로 이해했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니가 이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었다. 혹은 그 결과도 아니었다. 마침내 이야기한다는 것, 그 행위 자체에 있었다. 이 이야기를 원래의 정당한 주인에게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인은 이제 자신이 아는 진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들어야 할 사람에게. 속에 꾹꾹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내가 중요하고, 말하고야 마는 이 행위가 중요하다는 거. 가끔 벽보고 중얼거리는 심정이란 비슷한 걸까. 하긴, 대상이 사람이어야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벽은 별로 좋은 벗은 되지 못한다.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은퇴한 남자일 거라고 시몬은 생각했다. 은퇴하면 저렇게 된다.

 

요 네스뵈는 정말 이런 걸 느꼈던 게 아닐까. 이 구절이 가슴에 박힌다. 은퇴하면 저렇게 된다... 나는 은퇴하면 어떻게 될까. 은퇴라는 걸 하면 빈 벤치에 홀로 앉아 모이 주는 것에만 의지하여 몰려드는 비둘기들에게 먹을 거리나 주는 할머니가 될까. 흠.. 근데 이건 나의 장면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비둘기를 몹시 싫어하니, 이런 은퇴 후 모습은 해당사항 없음일 거라 확신한다. 다만, 나도 은퇴한 나의 모습이 많이.. 궁금해졌다. 이 대목에서.

 

*

 

... 그렇게 소니가 나오고 시몬이 나오고 카리가 나온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소니는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부패경찰이었음을 자백한 유서 한장 달랑 남기고 자살하는 바람에 모든 희망을 버리고 마약중독자가 되어 교도소에서 12년을 보낸 청년이다. 시몬은 경찰이고 그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카리는 그 시몬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러 다니는 사람이다.

 

빗방울과 자연의 냄새에서 젊음을 느꼈던 요하네스는 소니에게 네 아버지는 죄가 없고 억울하게 죽었다.. 라고 얘기해준다. 그 애기를 들은 그 아버지의 아들은 탈옥을 감행하고 자신에게 죄롤 뒤집어 씌웠던 사람들, 아버지를 죽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잔인하고 참혹하게. 그 사건들 속에 시몬과 카리가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전개된다.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이쯤해두겠지만, 솔직히 이 책 읽으면서 속이 시원했었다. 권선징악은... 이제 우리에겐 판타지에 불과하다.. 영화 <베테랑>을 보면서도 그랬었다. 상황묘사는 그지없는 현실주의인데 결말은 판타지구나. 그렇게 마치 술에 취하듯 약에 취하듯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을 영화나 책에서 맛보는 것도, 과히 나쁘진 않았다. 사실 슬픈 일인데 말이다. 씁쓸한 일인데 말이다. 요즘의 기분으로는 그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 라고 생각해본다.

 

요 네스뵈는 이 어두운 소설로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세상의 많은 숨겨진 진실들에 대해? 혹은 제도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악을 개인이 응징할 수 있는 (브라보) 세상에 대해? 사는 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거, 사람들은 속에 묻어둔 자신만의 이야기로 고통받기도 한다는 거, 뭐 그런 거? 어쨌거나 이 소설의 마지막은, 권선징악의 끝장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요 네스뵈는 이런 이야기를 쓴 거겠지. 어쨌든 이런 멋진 소설을 만들어낸 요 네스뵈,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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