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황사도 심하다 하고 날도 꾸물하고 해서 그냥 집에 눌러앉았다. 이넘의 게으름이란. 일요일 정도는 괜챦지 않겠어? 라며 스스르로를 위안하긴 했지만 이제 일요일이 다 끝나가는 마당이 되니 왠지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온종일 집에서 데굴데굴.. 하며 난 이 미미여사의 에도물인 <맏물 이야기>를 벗했다... 장장 20여년의 기간동안 만든 이야기들이라는데 정말이지 에도 이야기는 편안하고 좋아서 일요일 하루를 거기에 온전히 바쳤다 해도 하나 아깝지 않구나 라는 심정마저 든다.

 

오캇피치 모시치의 이야기이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사람인데 여기에도 나온다. 아직 남은 얘기들이 많아서 후속편도 나와야 한다 며 속으로 기도 중이다.

 

 

"왜 그러느냐? 그런 세련된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뱅어를 먹지 못하는 게냐?"

모시치의 물음에 이토키치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그 작고 새까만 눈을 보면 먹을 수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놈들은 점 같은 눈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 눈으로 초간장 속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면 젓가락을 댈 수가 없게 되고 말아요."

모시치는 웃었다. "의외로 담이 작은 녀석이로군. 그건 살아 있는 생선을 먹는 게 아니다. 봄을 삼키는 것이지."

"흔히들 그렇게 말하지요. 하지만 저는 안 돼요. 아무래도 안 되더라구요."

- <뱅어의 눈> 중. p60

 

 

이런. 이제 봄을 삼키려 싱싱하게 살아 있는 뱅어를 초간장에 찍을 때마다 이 글귀가 생각날 것 같다. 그넘의 눈. 나도 늘 걸리는 것 중 하나가 뱅어의 그 눈인데 말이다. 뭔가 눈이 아닌 것 같은데 눈이라고 생각되는 건 뭐인지. 웅... 뱅어 먹고 싶다가 이 글귀 읽고 조금 멈칫.

 

 

"흐음, 감나무 중에는 지로 감이라는 것이 있소?"

"있습니다. 단맛이 강하고 맛잇는 감이지요."

"다로 감은 없나?"

"없는 것 같네요." 주인이 잠시 생각한다. "만일 있다면 지로 감보다 더 맛있을 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다로 감은 떫은 감일 거라고, 모시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팔자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형제인데. 같은 감나무인데. 떫은 감과 단감이.

- <다로 감, 지로 감> 중, p163

 

 

에도 이야기에는 가족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형제의 이야기, 부모와 자식간의 이야기... 그 속의 애증들. 특히나 장자가 집안을 상속한다는 불문율에서 차남은 늘 집에서 내쳐지는 신세가 되는 지라, 그 속에서의 서러움과 그리움이 한데 엉켜 수십년 세월이 흘러서 좋지 않은 관계로 만나게 되기도 한다. 형제인데. 같은 부모에게서 났는데, 누구는 집을 상속받고 누구는 어디에 양자로 가는 신세라니. 참 매정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그 시절에는 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거겠지. 그나저나 모시치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유부초밥 집 주인장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제 올해도 끝이군요." 주인이 말했다. "겨울바람이 옛날 일을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날려 보내고 새로운 해가 올 것 같습니다."

모시치는 얼굴을 들고 주인을 보았다.

주인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겨울바람에 휘말려 어디론가 날아간, 그밖에 모르는 세월이 그때 얼핏 비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얼어붙은 달> 중, p204

 

 

주인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에게서는 비밀의 냄새가 많이 난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여기에 유부초밥집을 차리고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사람인데, 예전에 무사를 했었을 법한, 어쩌면 시정 관리였을 법한 포스를 풍기는 사람이다. 모시치는 늘 궁금하지만, 참고 기다리고 있다.... 올해가 끝나고 새해가 와도, 옛날 일을 전부 날려버리는 일 따위는 소망에 불과하겠지만, 나도 가끔 달을 올려다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이런.

 

 

"다음의 이건 - 뭐지? '후타타비야키'라니."

두부 요리라고, 곤조는 설명했다.

"구운 두부를 간장에 졸여서 맛을 배게 하고, 물기를 짜낸 다음 기름에 튀깁니다. 그것을 꼬치에 꿰어 매운 된장을 바르고, 살짝 석쇠 자국이 날 정도로 불에 그슬리지요.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두부 산적입니다."

모시치는 상상해 보았다. "아주 집요해 보이는 음식이군."

- <독> 중, p340

 

 

이 책은 음식 이야기가 기본인지라, 음식에 대한 설명이 군침나게 잘 설명되어 있다. 집요해 보이는 음식이란 무엇일까. 나도 같이 상상하게 된다. 꿀꺽. 아 배고파.

 

 

"저것은 대장님, 도깨비의 자리입니다. 도깨비들이 앉아 있지요. 그렇지요, 주인장?"

모시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 대신 아까 그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오늘 밤에는 어디를 가도, 도깨비들은 바늘 방석이지요. 도깨비는 밖으로, 도깨비는 밖으로, 하면서 콩으로 팔매질을 당하고 도망쳐 나와야 하니까요. 그러면 너무 가엾다면서, 주인장이 도깨비들에게 술을 대접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 <도깨비는 밖으로> 중, p390

 

 

이 시리즈의 이야기들은 좋은 것은 이런 섬세한 따뜻함에 있다. 아마도 일본에 콩 뿌리기라는 풍습이 있어서 입춘 전날 밤에 액운을 쫓기 위해 콩을 뿌리며 '도깨비는 밖으로, 복은 안으로' 라고 소리치는가 보다. 집안에 있던 도깨비는 이 콩에 맞아 아파서 밖으로 도망친다는 건데. 그날 집안에 있는 도깨비들이 다 쫓겨날테니 가엾어서 어쩌냐. 여기서 한자리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앉겠지, 자리 하나 주어 술이라도 한잔 하게 하자.. 라는 심성이라니. 왠지 훈훈해지지 않는가...

 

미미여사의 이 시리즈는 항상 추천이다. 어느 책 한권 버릴 게 없다니.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이다. 나중에 한데 모아 어디 틀어박혀서 하나씩 다시 읽어나가고 싶어지는 책들이다. 섭섭하게 지나가는 일요일에 이 책 한권 다 읽어 마음 따뜻해졌으니, 이만하면 살만하지 않나 싶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