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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차 싶어지는 책이 있다. 이런 책을 왜 이제야 만났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저자가 이제 책을 자주 내지 못하는 혹은 아예 낼 수 없는 상황인 경우 더 이상 책을 통해 만날 수 없는 그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그리워져서 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은 이 두 가지 이유 모두에 해당하여 내 가슴팍을 치게 만든다. 오주석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 책을 접했다는 것이 안타까움을 넘어서 슬픔으로 다가온다.
비단 우리나라 전통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았다고 해서는 아니다. 필시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열심으로 풀어 쓴 책은 많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도외시하고 있는 분야에 목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된다고 본다. 그런 책들이 주는 감동도 진한 감동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어쩌면 나의 DNA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조상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저자의 따뜻하고 애정어린, 그러나 예리한 시선이었다. 마치 내 속에 잠재되어 있었고 알고는 있었으나 그 실체를 정확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무엇을 한꺼번에 일으켜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감동은 감동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지난 교육에서 항상 그랬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저 당쟁과 전쟁으로 얼룩지고 초기에만 반짝 잘 지내다가 중기 이후에는 지리멸렬하게 겨우 목숨이나 연명하는 부끄러운 역사였다. 고려나 고구려의 당찬 기상과 그 자유로움은 온데간데 없고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얽매여 개인을 옥죄고 사상을 강제하고 그래서 결국은 나라까지 일본에게 팔아먹은 나라이니 그렇게 여길 만도 하다 싶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500년을 지켰던 나라에 대해 그 문화에 대해 그저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어쩌면 지금도 그런 지 모른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오주석 선생님은 그게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조선은 519년동안 계속된 나라이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이 지난 다음에도 280년이나 더 지속되었습니다. 중국에선 280년 된 왕조조차 드뭅니다. 일제의 정체성 이론이라니, 원 세상에 시들시들한 채로 오백년이나 지속되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조선이라는 나라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성리학이 지도 이념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검소하고 도덕적인 그러면서도 문화적인 삶을 영위했습니다." 이 말이 국수주의적으로 들리지 않는 건 책 전반에 펼쳐진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 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의 문화적 깊이를 충분히 느껴서이리라.
김홍도의 그림을 대부분 예로 들고 있지만, 그 속에 묻힌 깊은 뜻 수백번의 붓질을 통한 정성 어디에나 배어있는 해학 등은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우리가 흔하게 그냥 옛 그림이겠거니 하며 지나치던 그림들이 오주석 선생님의 해설 속에서 하나 하나 살아나고 그 뜻이 새롭게 떠오를 때마다 이게 역사라는 거구나 이게 전통이라는 거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서양 문화에 매달려 마치 그걸 모르면 교양 없는 사람인 양 취급받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나, 그리고 우리의 옛모습 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부끄럽게도 생각하지 않는 건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하나. 귓불까지 빨개질 일이다.
이 책은 이런 역사의식을 꼭 느끼지 않아도 값어치 있는 것이, 각 그림마다 붙이는 해석이 너무나 섬세하고 애틋한 데다 주변 정황 설명 또한 일품이라 그림을 잘 감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바로 알게 한다. 왜 김홍도의 그림에 고양이와 나비가 나오고 게와 갈대꽃이 나오는지, 왜 사람이 서있는 모습과 바라보는 풍경의 각도가 틀린 건지, 그림 옆에 명필로 쓰여진 글들이 대체 뭘 의미하는 건지 등등 이루 헤어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그림 한 폭에 담겨져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경이로움의 시작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 분의 육성으로 강연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싶어 눈물이 날 정도였다. 오랜 시간 공부하면서 자신이 느꼈던 우리나라 옛 문화의 아름다움, 선인들의 정신, 그 깊이를 누구에게나 공유하고 싶어하는 선생님의 심정이 절절한데 그것을 다 안고 피안의 세계로 미리 가버리신게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직접 듣고 그 마음을 직접 느낄 수 있다면...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미련은 이리도 깊다.
친구가 다음 달에 외국에 여행을 오랫동안 가게 된다는 연락이 왔다. 그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망설였는데 이 책을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 문화가 너무나 훌륭하고 이를 연구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고 나가서 외국 사람들 한 사람에게라도 알려주는 것이 우리가 배낭 매고 외국 나가는 의의 중의 하나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하나하나의 행위가 이 책을 엮어 내면서 오주석 선생님이 가지셨던 작은 소망들을 우리가 현실화하는 작은 발걸음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