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낭만을 얘기하기보다 돌아갈 차편을 걱정하고 미끄러워질 길을 짜증내하는 내가 되어버렸지만..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언제부터 이랬지? 싶다. 나이가 들면 감성도 무디어지고 현실적이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나, 해도해도 너무 한 것이 오늘 느닷없이 펑펑 내리는 눈발을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갈 때 어떻게 가지 였다니. 문득 슬퍼졌다. 오늘은 이래저래 슬픈 마음이 기쁜 마음보다는 큰 날이어서 조금 감상적이 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내리는 눈을 보면 가지고 있는 추억 한 가닥 쯤은 가지고 있는 법. 나도 있다. 하얗게 덮인 길을 보면서, 하늘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보면서, 그 옛날 어느날엔가 있었던 장면, 사람, 그 때 먹었던 음식... 등등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펼쳐지곤 한다. 특히나 첫눈은 더더욱.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정말 낭만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나의 담임선생님이자 수학선생님이 수업을 하다 말고 (가끔 런닝셔츠 바람으로도 수업하던 분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첫눈이다" 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완전 아저씨로 보였던 선생님이었지만, 큰 딸이 나보다 한 살 어린 아이었으니 아마도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 정도였을 거고 그만하면 젊은 감성을 잃지 않고 살 만한 나이였다.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대학원 때...어쩌고 저쩌고 굽이굽이마다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는데 말이다... 어느 날 그런 게 딱 끊어져버렸다.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첫눈이랄까. 아니 적어도 눈내리는 날의 추억이랄까.. 이런 게 없어져 버렸다. 머리를 뜯으며 생각해내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는 눈 = 교통체증 = 짜증의 공식이 내 머릿 속에 박혀서 다른 게 들이닥칠 여유가 없었던 같다는 느낌. 슬프다..

 

나의 추억 뿐 아니라 영화 속 장면들도 떠오른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Love Letter'를 떠올리는 건 상당히 기계적이긴 하지만,  내 마음 속엔 하얀 눈으로 덮인 산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그녀의 모습이 눈과 함께 항상 떠오르곤 한다. 아름답다, 참 아름답다...싶었었는데.  이와이 슈니 감독은 지금 뭐하며 지낼까. 이런 영화를 만든 사람은 몇 십년 지나 뭐 하며 지내고 있을까.

 

 

 

 

 

 

 

 

닥터 지바고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가 배경이니 끊임없이 눈이 내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말해도 젊은 사람들은 눈만 뎅그렇게 뜨고 그게 누구지 할 오마 샤리프라는 배우가 너무나 인상적인 영화였다. 라라로 나왔던 줄리 크리스티도 매력적이었고. 그리워 그리워 늘 목메이던 라라를 전차 차창 밖으로 발견한 지바고가 황급히 뒤쫗아갔으나 심장발작을 일으켜 죽어가고, 그것도 모른 채 자기 갈 길을 총총히 가던 라라의 뒷모습은.. 참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는 눈처럼 내리던 것들이 사실은 포탄에 날린 옥수수 알갱이.. 참 웃긴 장면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은 눈이 오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이런 동화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썩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왜냐하면 현실을 망각하게 하니까 ... 이 영화만큼은 순수한 마음으로 기억된다. 이념이 뭔지. 그런 게 사는 데 그리 중요한 거 아니쟎아.. 라는 생각, 영화 내내 했었다. 그래서 옥수수 알갱이가 팝콘이 되어 눈처럼 내리던 그 장면이 더욱 아릿하게 다가온다.

 

 

 

 

 


 

일본 영화는... 참 무미건조하기도 하고 밋밋하기도 하고.. 그래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는 하지만... 난 왠지 그 색깔없는 무색무취의 영화들이 좋다. '철도원'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인데... 소설도 좋지만, 영화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홋카이도의 외로운 철도역에서 아내도 딸도 잃은 채, 정년퇴직을 앞둔 철도원의 모습. 눈이 내리고 기차가 지나가고 거기에 제복을 입은 채 끝까지 꼿꼿하게 서있던 모습이 슬픔으로 스며들던 영화... 눈이 그렇게 아름답게 내리는데, 사람의 마음은 쓸쓸하게 자리하고... 아. 눈물.

 


 

아 이 밖에도 많은데... '러브 스토리'도 있고, '러브 액츄얼리'... 아. '8월의 크리스마스'.



 

 

 

 

 

 

 

 

 

 

 

 

 

 

 

 

다들.. 이런 추억의 영화 하나 둘 쯤은 가지고 계시죠..? 괜스레 아련..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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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2-0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내리면 천천히 걸어가면 돼요. 신도 바지도 치마도 다 젖겠지만, 즐겁게 빨면 되지요. 이렇게 내리는 눈을 누릴 수 있는 삶이기에 즐거워요.

다만... 전남 고흥에서는 눈을 못 본답니다 ^^;; 날씨도 영상인걸요 @,.@

비연 2012-12-06 11:09   좋아요 0 | URL
아 고흥은 영상의 날씨...
눈은 내리는 걸 보는 건 참 좋은데 사실 젖으면 좀 귀챦...^^;;;;
그래도 그걸 기쁘게 생각하며 지내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