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땐 역시나 책과 음악의 세계로 도피하는 게 최고인 나. 사실 현실회피적인 이러한 패턴이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이렇게 뭐라도 한다는 건 이 상태에서 곧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암튼 주말동안, 정확히 말하자면 토요일 저녁부터 지금 일요일 저녁까지 읽은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우천염천(雨天炎天)>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이 책은 사둔 지 꽤 되었던 것 같다.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은 후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하루키의 에세이들은 다 사모았던 기억이. <먼 북소리>의 시기와 겹치는 1988년 어느 즈음,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했던 하루키의 에세이다.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가 좋다. 사실 읽어보면 별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 여행지에 대해서 열심히 파고드는 것도 없다. 요즘 나오는 여행에세이들처럼 그 나라의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와 풍습까지 공부해서 다 진열하는 류의 에세이가 아니다. 물론 공부는 많이 해서 가지만, 그저 보이는 대로 본인의 사유의 흐름 속에서 써내려가는 에세이다. 그래서 좋다. 보고 있으면 작가의 정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지 그 속에서 어떤 작품들이 나올 것인지를 엿보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에세이에서의 그는, 와인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야구와 마라톤을 좋아하고 고양이를 좋아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짜증과 고통을 (여행하는 동안 이국인으로서 느껴야 하는) 여과없이 내비친다. 억지로 각색하려 하지 않는다. 느껴지는 대로 쓴다. 그런데 그 속에서 뭔가 속을 정화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내게는. 솔직히 하루키의 소설들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읽기는 읽지만 뭐랄까 백프로 동의안되는 것이 있어 거북하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그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들, 그가 사용하는 문체들, 그런 것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런 점에서 매우 빼어난 작가이고 그런 그의 소설들을 읽고 싶기는 하지만, 나의 감정과 정확히 싱크로나이즈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에세이는 다르다. 신변잡기적인 그 글들이 이상하게 나의 주파수와 잘 공명한다. 그래서 우울해질 때 힘들어질 때 하루키의 글들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이 책도 그런 류의 책. 그리스의 수도원들을 빗 속에 돌아다니고 터키의 동쪽 쿠르드족들과 혹은 기타의 나라들과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곳을 더운 속에 돌아다니면서 그는 세상을 관조하고 사는 것에 대한 넋두리(?)를 그답게 펼친다. 나는 그를 따라 정말 여행하듯이 (사진이 많아서 그러기에 더 편했다) 그렇게 쭈욱 몰두해서 책을 읽었더랬다.


스티그 라르손의 이 유명한 밀레니엄 시리즈를 지금에야 읽다니. 사실 난 3부작 중에서 이 1부만을 가지고 있다. 한 부에 1000페이지 가량 되는 이 방대한 소설 앞에서 읽기 시작하면 다 읽어버리기 위해 밤낮을 안 가릴 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혀서 말이다...그러나 역시 이런 시기에는 이런 두껍고도 재미난 책이 있다는 것은 내게 묘한 위안이다. 2부와 3부도 냉큼 보관함에 다시 담아버렸다.

꽤나 특이한 주인공들을 등장시키면서 세상의 인간말종들은 다 모아놓은 듯한 사람들을 상대하게 하면서 그래서 참 암울하다고, 참 세상 더럽다고 느끼게 하면서도 마지막 장을 탁 덮을 때는 '희망'이라는 걸 느끼게 하는 책이다. 세상에. 그런 책이 어디 있담. 그러니까 미국 추리소설을 읽으면 느낌이 그렇다. 자르고 태우고 별별 성적 변태짓을 다 해대는 사이코패스들의 행각을 읽노라면 그리고 그들을 처단하는 미국식 하드보일드 탐정들을 대하노라면 이상하게 기분이 꿀꿀해지고 밥맛이 뚝 떨어지는데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기실 크게 다를 바는 없는데 (더하면 더하더라..ㅜ) 아마도 이 작가는 10부를 계획하면서 끊임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기자(스웨덴 사람들이라 이름이 좀 읽기 어렵다는게, 아니 낯설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와 천재 해커이자 어두운 과거를 지닌 듯한 리스베트 살란데르. 이들이 파헤치는 어느 가문의 흉측하면서도 괴기스러우면서도 잔혹한 사실들도 놀랍지만 나는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해낸 이 둘의 캐릭터가 매우 흥미진진하다. 물론 주변인들도 그렇긴 하지만, 특히 리스베트 살란데르라는 여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고 그녀의 변화라든가 그녀의 생각이라든가 하는 것을 읽고 있노라면 신선한, 아니 환상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10부작을 다 끝냈어야 했는데... 겨우 3부작까지 쓰고 저세상으로 가버린 작가에게 새삼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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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틀 내내 잠깐 밥먹으러 나간 이외에는 계속 책만 봤더니 목 뒤가 뻣뻣할 정도다. 이제 다시 집어든 책은 (내 침대 머리맡에 잔뜩 쌓인 책들을 잠시 응시하다가 - 대부분 읽다가 만 책들인데 약 10권 정도가..철푸덕 - 그냥 새로운 책을 읽기로 결심하고 책장으로 향했다는) 다시금 경제학책. 소설이나 에세이 며칠 동안 진하게 읽었으니 이제 다시 좀 생각하는 책으로 복귀.


요즘 유행하는 '배신' 시리즈가 아닌가. '긍정의 배신', '상식의 배반', '경제학의 배신' 등등.. (다 샀다는..ㅜ) 정통 경제학 이론에 대한 반론이라니 보기만 해도 군침아 싹 도는 주제다. 저자는 현세태의 잘못된 자본주의적 경제학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의 건설과 희망의 사회를 역설하고 있다니 한번 읽어볼 만 하지 않겠는가. 흠.. 당장 읽기 시작해야겠다.

이렇게 책만 읽어대다가는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라는 불안감이 크다. 그렇지만 마음이 닫혀있어 일의 진척은 없고 집중은 안되니 그저 책에라도 몰두하면 손해는 아니겠다 싶은 마음과 에라 모르겠다 라는 자포자기 마음이 공존한다. 며칠 두고보자,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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