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한번쯤, 아니면 이년에 한번쯤 아무 이유없이 (라고는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내가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회피하려 해서 보이지 않을 뿐..) 우울해지는 때가 있다. 무기력해지고 감정이 침잠되어 잠자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시기. 큰일 났다. 지금 내가 그 시기인 듯 하다.

이 떄는 말이다. 말도 하기 싫어서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말수가 적어지고 (참고로 난 엄청난 수다쟁이다) 머리가 깨지게 아플 정도로 자면서도 계속 침대에 누워있고 싶어지고 쌓인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안 나게 되며 사람과의 만남을 극도로 피하게 된다. 짧으면 삼사일이고 길면 일이주 그렇게 지낸다. 꼭 가야 할 곳 이외에는 대부분 한 곳에 머물고 전화나 메일, 약속도 삼가하게 되는, 아 정말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블랙홀에 빠진 양 쉽사리 발을 뺄 수 없는 지경이며 결국 몸통까지 잠겨서 소득없이 우울해만 하게 된다. 으으.

네가 한가로와서 그래. 라고 한다면 정말 섭섭하다. 지금 나는 늘 그랬듯이 일이 많고 정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이다. 아마 며칠 지나면 메일과 전화로 독촉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올 것이고 나는 그 전화 안 받고 메일 안 읽으려고 노트북 안 켜고 아이폰을 꺼둘 지도 모르겠다...이런 걸 잠정적 잠적이라고 하나.

책은 읽는다. 그대로 앉아서 책장만 넘긴다. 경험상 이런 때 우울한 내용의 책이라도 읽으면 거의 그 효과가 백만배라서 더더더욱 우울의 강에 빠지는지라 가급적 가볍고 즐겁고 해피엔딩일 수 있는 책들만 골라읽는다. 그래서 오늘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른 책이 이 책.


내용으로 보았을 때 무척 가벼운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적중. 가벼워도 가벼워도 이렇게 가벼울 수가. 대재벌의 딸이 경찰이 되었고 (이 내용은 일드 중의 '부호형사'와 거의 비슷) 그 대재벌 딸의 상사도 중재벌의 아들. 그리고 그들은 말도 안되는 가벼운 어조로 살인사건을 분석하고 결국 해결못하고 헤매다가, 대재벌 딸 (호쇼양) 이 집에 돌아와 부유한 아가씨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 만나게 되는 집사 겸 운전수의 추리를 빌어 해결하게 된다는, 만화같은 이야기 (표지를 보라, 만화다). 호쇼양과 그 집사와의 농담 따먹기도 아닌 말장난은 더욱 가벼워서 아..난 풍선을 타고 날아오를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고 사실 이건 그닥 유쾌하진 않았다.

재미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우 추천할 만하다고 얘기하기도 곤란한 책이라고나 할까. 여섯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추리하는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넘의 말장난, 그것도 솜털처럼 가볍고 무의미한 그 말장난의 할애는 좀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암튼 이걸 읽으면서 내 아무리 우울하다고 해도 이런 류의 책으로는 오히려 불쾌해질 뿐이구나 싶어서 다시 책장으로. 근데 잘 살펴보면 내가 요즘 유쾌한 책을 잘 안 샀던 것 같다. 찾기가 힘들고... 그래서 고른 책이 '곰스크로 가는 기차'이다.


이건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지. 오히려 생각하고 사색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들었다. 그래..오히려 이게 나을 지도. 책 자체의 두께는 얇아서 가벼우나 내용은 약간 무게감이 있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더 어울릴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이곳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내는 이곳을 '고향'이라고 부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 정도는 돼야 이곳을 고향이라 부를 자격이 있지 않을까.

라는 단락으로 시작하는 소설.

아내와 나는 그저 우연히 여기에 정착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여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떠나고 싶을 뿐이다. 여기 머무는 한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물게 된 이곳을 뜨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가 쉬운 노릇은 아니다. 게다가 내 노력을 가장 심하게, 그리고 가장 불쾌하게 방해하며 막는 사람은 - 마지못해 말하긴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니-바로 내 아내가 아닌가.

로 이러지는 소설. 왠지 처음부터 느낌이 좋은 책이다. 오늘은 이 책으로 내 우울을 달래보려고 한다. 이럴 때 와인이나 맥주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어제 맥주 한 캔 먹고 자서 아침에 머리 아팠던 기억이 문득 나서 패스. 그냥 오늘 속에 퍼붓고 있는 커피를 한잔 더 넣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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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7-16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크 리 감독의 '해피 고 럭키'를 주말에 꼭 찾아서 보도록 하세요.

비연 2011-07-16 17:01   좋아요 0 | URL
아..꼭 찾아서 볼께요..^^ 감사~ 메피님!

비연 2011-07-16 17:02   좋아요 0 | URL
제목부터가 '해피'하고 '럭키'한데..내용은 어떨 지 궁금..

비로그인 2011-07-1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해가 없어서 더 심해지는 건 아닐까요?
어딜 좀 다녀오려고 했는데 비가 많이 와 주시네요 흠냥..

저는 축 처지는 날은 몸 좀 움직이면 좀 괜찮던데, 이따 "틈" 타서 밖에 좀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비연 2011-07-16 17:02   좋아요 0 | URL
날씨 탓이겠죠? 비는 왜 이리 많이 오는 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요. 저도 몸을 좀 움직여보려고 바깥에 나와 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