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된 관심사가 'equity'에 있다보니 이런 책들을 좀 찾아보는 편이다. 제목을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저렇게 되지만 원제는 <Poor Economics>, 말하자면 빈곤의 경제학 정도가 되겠다. 제목이 현혹되어, 아,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인 거야? 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좀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라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그 상황에서 하는 선택이 우리가 봐선 아니겠지만, 그들에겐 '최선의' 선택이다. 그들에게도 그 나름의 합리적 상황 배경이나 이유가 있다 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들을 개선해주면 그들도 우리가 보기에도 reasonable한 선택이 가능하게 된다. 큰 변혁이 아니라도 작게 작게 시작하면 변화할 수 있다. 요약하면 뭐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결론 부분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에 있었다. 그러니까 '가난'이 뭐지? '가난한 사람'은 뭐지? 우린 왜 그들을 '도와야' 하지? 그들을 돕는다고 하는 방법이 맞는 건지?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게 흥미로왔다. 생각해보면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는 많은 입장에서, 그들을 가난하다고 규정한 이유가 있을 테고 그들에게 돈이든 현물이든 사람이든 지원할 때는 이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일텐데, 어쩌면 지원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딱, 지원하는 입장으로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의문심이 들어 버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축 행위는 사람들이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자신의 바람을 실현할 기회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솔한' 소비를 줄이고 미래에 투자하려 한다. 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달리 계획이 없다. 이에 따라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간의 저축 활동이 달라지고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축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p275~276)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돈을 주면 저축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필요한 소비재를 산다. 자식을 교육시키려 하지 않는다. 현재 더 개선할 여지가 있어도 그냥 그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처음엔 잘 하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 그대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국가에 뭔가를 하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그들은 그러니까 가난한 거다... 라는 생각에 반문을 하고 있다. 그들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뭔가를 하기 위해선, 그 먼 미래에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에겐 그게 없다. 따라서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지내는 거다. 따라서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불어넣어주면 그들에게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싶은 거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희망을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골대를 조금 가깝게 밀어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 첫걸음을 내딛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p278~279)
이 점에 동의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는 '넛지'가 필요하다. 그냥 돈을 주면 되지 현물을 주면 되지 봉사활동을 하면 되지 이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길은 요원하다. 그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거기에서 motivation 될 수 있는 trigger를 잡아주는 것이 제일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렇게 해서 한 걸음 내디디면 그 다음 걸음을 내딛기가 쉬워지니까.
개인적으로 지금의 아프리카나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권의 빈곤은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나라들에게서 수탈받은 경험으로 인해 상당히 왜곡된 형태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빈곤이 그냥 경제적으로 못산다, 이게 아니라 그 안에 역사적으로 쌓여온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내재되어 하나를 해결하려고 하면 다른 하나가 걸리기도 하고, 정치나 사회가 너무 부패하여 빈곤이란 것이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빈곤한 나라들에 원조라는 것을 할 때 '정치적' 개입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를 해결하지 않으면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데? 라고 얘기한다 해도,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정치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큰 갈등이 생길 수 있다고. 그래서 소액금융제도 등과 같은 시도가 의미가 있다고 보다.
일반적으로 원조는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동반하고, 지도자들이 부패한 상황에서 원죠를 계속하면 정치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스털리가 비관적인 입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각 국가가 저마다 성공 비결을 찾을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두루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한 가지 전문가적인 충고를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이것은 최대한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적 자유란 '가장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간의 발명품', 즉 자유시장이다. (p325)
이 견해에 일견 동의하고..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상태로 그냥 방치하자가 아니라, 자꾸 Top-down방식으로 하려 하지 말고 'Bottom-up'방식으로, 그러니까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아래에서부터 변화를 유도해보자, 라고 제의한다. 그냥 인도주의적으로 감정에 호소해서 원조를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난한 사람/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그 부분을 해결하자는 것. 이런 논의제기로 이들은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제 경제학이란 것이 주류경제학에만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노벨상의 흐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
후속 작품으로 이 책도 나와 있길래, 일단 사두었다. 지금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곧 보게 될 것 같다. 세상이 마냥 나빠지지만은 않는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이런 학자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실천에 기반한 연구를 끊임없이 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 같이 잘 살자라는 취지 아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더디더라도 그 노력을 조금씩 인정받아 가는 흐름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꽤 읽을 만 했다. 문제의식을 달리 했을 때 사안이, 그 해결방안이 얼마나 달리 보일 수 있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