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는 건 알만큼 알 나이이지만,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이제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살고 싶다는 불타는 열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예전엔 여러가지 상황을 참고 나를 죽이고 그렇게 어찌어찌 했던 일들도 많았는데 (떠오르는 그 기억들. 짜증 솟구친다) 이젠 누가 뭔가를 얘기했을 때 상황을 생각하기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있음을 언젠가부터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묻고 있는 거다. 너 이거 하고 싶어? 하기 싫다고 답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들도 많지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면서부터는 내 감정에 충실하게 되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럴 경우 그 당시 상황에서는 좀 난처하고 민망할 수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어느새 편해져 있는 나를 느낀다. 좋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한달 전쯤 대학원 지도교수가 학회장이 되었으니 학회 일을 맡아달라고 연락을 해 왔다. 나는 대학원 지도교수랑 겉으로 드러내놓고 으르렁거리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냥 잘 안 맞아 힘들었었다. 서로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졸업하고 나서도 가급적 부딪히지 않는 방향으로 지내왔었고 그래서 그냥저냥 별일없이 지내온 편이다. 사실 학회장이 되겠다고 했을 때부터 나한테 그런 전화가 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은 했으나, 설마 나한테 라는 생각 때문에 깊이있게 생각 안하고 있다가 그런 전화를 받는 바람에 엉겁결에 하겠다고 말을 해버린 거다.

 

전화를 끊자말자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고 고민에 휩싸였다. 고민하다가 에잇 그냥 하지 뭐 그랬다가 아 그래도 아닌데 그랬다가.. 근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대학원 지도교수랑 사이 틀어져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진실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골치아프다) 그냥 해야겠다 마음을 대충 굳히고 있었는데.. 올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힘들어지는 거다. 그래서, 그래서... 어제 메일을 썼다. 여차저차하여 못할 것 같다. 이거,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 이유라는 것이 좀 어설플 수밖에 없어서 대충 하기 싫다는 눈치를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고 대학원 지도교수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편이 아니라서였다.

 

어쨌든 어제 던지고 그냥 나는 편하게 잠을 잤는데 (후련했다!).. 아침에 답장이 왔다 좀 비비꼬는 말이긴 했지만 알았다고 왔다. 흠. 내가 할 일은 끝났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 내내 힘들어서 속앓이할 나는 이제 없는 거다.

 

 

 

 

 

 

 

 

 

 

 

 

 

 

 

 

 

제주도 독립서점 책방무사에서 사온 이 책을 집어들어 읽다보니 작가인 장강명도 그런 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에 시간을 쏟지 않으며 그냥 생긴 대로 사는 사람. 그러니 기자하면서 남들은 대학원 다니는데 본인은 글을 썼고 그러다 심지어 기자를 때려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말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건 쉽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건 어렵다' 는 명언이 있다. 내 기억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 아니면 <피너츠>에 나온 스누피의 대사다. 어쨌든 이 말에 썩 동의하지 않는다. 인류와 인간을 동시에 사랑하는 건 얿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을 미워하는 것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고 인류를 미워하는 편이 더 낫다. 아주 더, 굉장히 더, 쓰는 장강명과 말하는 장강명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p28-29)

 

장강명이 내 인생의 책이라고 꼽은 것 중에서 <악령>은 정말 반가왔다. 도스토예프스키 책 중에서 <악령>을 제대로 읽은 사람도 드물고 이게 제일 좋다고 하는 사람도 드물어서 말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정말 충격을 받았었다.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는 별로 일치하지 않는다. 읽었지만 큰 감명이 없었다는.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영화로 본 것 같다. 영화로 보고 나서 책을 읽지 않는 경우에 속하는데, 장강명의 글을 보니 책으로 한번 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이것은 일치한다. 조지 오웰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도 좋지만, 저널리즘적인 글쓰기도 좋아한다. 얼굴에서 풍겨나오는 아우라 자체가 나는 정직합니다, 나는 굽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계속 유지하는 건 한 인간의 전체 인생을 볼 때 쉬운 일이 아닌데 조지 오웰은 그렇다. (안 그런 인간상,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미하엘 옌데의 <끝없는 이야기>도 예전에 재있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은 건 조금 갸우뚱이었지만, 그 때 그 시절에 느꼈던 그 감흥이 아직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면 가능한 이야기같다.

 

 

 

 

 

 

 

 

 

 

 

 

 

 

 

 

 

 

 

 

 

 

 

 

 

 

 

 

 

 

 

 

 

 

이 책 한권을 읽고 장강명을 좋아하게 될 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까진 그냥 조금 삐딱하지만 글은 잘 쓰는구나 정도의 생각. 다 읽고나면 느낌이 정해지려나.. 자 이제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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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17 14: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지금은 괴로워 나중에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하셨어요.

악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
[삶은 고통입니다, 삶은 공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고통과 공포입니다. 지금 인간은 삶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공포를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삶은 현재 고통과 공포를 대가로 주어진 것이며, 이것이 바로 기만이라는 겁니다. 현재의 인간은 아직 진정한 인간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당당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것입니다. 살아 있건, 살아 있지 않건 상관없는 인간, 그들이 새로운 인간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공포를 이겨 내는 인간, 그가 스스로 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신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도끼 선생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천재 광인 (✯◡✯)

비연 2020-12-17 17:51   좋아요 2 | URL
ㅋ 저도 동감합니다.
<악령>은 참 놀라운 소설이죠. 여러모로. 흠.. 재독하고픈 열망이 몽실몽실..

유부만두 2020-12-17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랙 달리아‘를 내가 왜 샀나 했더니 이걸 읽고 샀었군요.

비연 2020-12-17 17:51   좋아요 2 | URL
가끔 저도 그래요. ㅎㅎ 왜 샀지 하는 책이 있는데 이유는 있는.
전 <블랙 달리아> 읽고 곧 중고서점에 내놓았던 기억이..;;;;

2020-12-17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