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면 가끔 막막해질 때가 있다. 정말 좋은 책이고 읽는 내내 지식을 더해간다는 즐거움과 뭔가 정리된다는 뿌듯함으로 좋았었는데, 막상 마지막 장을 탁 덮고 나서는, 아 뭐라도 쓰고 싶은데 이걸 어떻게 쓰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책이 그랬다. 이번 달은 유난히 바빠서 힘들었지만, 9월을 며칠이나 남겨 놓고 다 읽어냈다는 성취감 플러스 좋은 책을 읽었다는 자랑참 등이 어우러져 마지막 장을 덮었건만, 그리고 아주 빼곡이 포스트잇을 붙여놓기까지 했건만 뭘 쓰려고 하니 쓰기가 어려워서 살짝 좌절감마저 드는 순간이 있었다... 고나 할까.

 

각설하고. (서론 참 길다, 비연ㅜ) 그냥 쓰기 힘들면 간단히 쓰고 넘어가기로 작정한 채 페이퍼를 끄적여본다.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산만하게 읽고 있던 내게 '정리'라는 기쁨을 선사한 책입니다.. 라고 요약하고 싶다. 예전부터 나온 페미니즘 이론들을 잘 정리해두었고 최근 경향까지 잘 망라해두었으며 필요한 사람들과 저서들도 잘 나와 있어 노트 한켠에 열심히 다음에 읽을 책 목록들을 정리하게끔 도와주는 책이다. 아울러, 내가 어느 지점에 있구나 라는 걸 약간이나마 알게 해준 책이기도 했고. 페미니즘 책을 읽다보면, 모든 이론들이 다 그렇지만, 나와 딱 들어맞는 사람을, 이론을 찾기는 힘들다. 간혹은 이 사람 얘긴 받아들이기 힘드네, 시도는 좋은데 나와는 맞지가 않아 그러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좋았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이제는 '인간의 억압'이라는 측면으로 모아져간다는 것을 밝혀주어서이다.

 

 

오히려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의 주요 작업은 인간 억압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특히 그 억압의 문제는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권력 구조에 의해 역사적인 존중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생각과 행동과 삶에 드러나 있다. (p486)

 

 

그래서, 나의 경향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가깝다 여기면서도 유색인종 페미니즘에서 주로 나오는 교차성(한계가 지적되어 틈새성의 개념으로 전환되고 있다고는 하지만)이라는 개념에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흥미를 확인한 바도 있지만.

 

 

유색인종 페미니즘들은 교차성 개념을 통해 억압이 역사,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차원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페미니즘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효율적인 해결책을 내려면, 단순한 분석을 지양하고 대신 그 문제들을 경험한 여성들의 역사성의 복잡성(complexity of the historicity)을 반영해야 한다. (p189)

 

 

그래서 어쩌면 여성이지만, 백인이자 중산층이었을 학자나 이론가들로부터 시작되었을 페미니즘이 지금은 각계각층의 그리고 인종과 계급과 경제적인 측면 등을 다 고려한 방면으로까지 확대되고 더 나아가 젠더 자체의 정의, 여성과 남성의 대립구조가 아닌 LGBT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흐름이 맞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책의 10장에서 설명된 제3의 물결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그들이 원해야만 하는 것을 원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들이 원한다고 말하는 것에 반응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추측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종류의 페미니즘' (p463)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아직 만들어나가는 중이라 여러가지로 미흡한 점은 많다 하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제3의 물결 페미니즘에 대한 대목은 상당히 흥미가 가는 부분이었다. 역사는 흐르고 시대는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반영해나가는 페미니즘의 모습이, 우리에겐 희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은 소득 중의 하나는, 공부를 좀더 기본적으로 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흑) 9장의 실존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부분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정신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며 집중이 안되는 나를 발견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깨작깨작 사르트르도 읽었고 보부아르(제 2의 성!)도 읽었고 푸코도 읽었고 자크 데리다도 읽었고 했었는데, 어째서 머리에 남은 것은 거의 없고 이들이 하는 말이 내 뇌 위에서 부유하는 것인지. 뭔가 기초를 좀더 다지기 위해서, 흩어져 있는 지식들을 한데 모을 응집제 역할을 할 책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절실함이 스몄다.

 

사실 난 페미니즘의 너무 어려운 이론들에는 반감이 없지 않다. 페미니즘을 하는 사람들이 학자인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여성들의 경험 위에서 실천하는 행동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학문이든, 어떤 행동이든, 이론적 기반, 말하자면 무언가를 정의하고 범위를 규정짓고 논의의 대상을 분석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는 작업들이 선행되지 않으면 어느 지점까지는 무난하게 가더라도 반드시 막히고 헤매는 부분이 생긴다는 점엔 동의하기 때문에, 이론적인 측면들을 좀더 강화해나가고 나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 그랬다. 읽을 총량이 있는데 쓸데없는 거에 눈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백퍼 동감이다. 그런 생각들을 진지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 아주 훌륭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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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27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비연님. 그리고 언제나처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완독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하기 때문이라는 것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완독후에 저 두꺼운 책에 다다닥 북마크 붙여놓은 걸 보면 참 뿌듯하지 않습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글도 적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요. 후훗. 우리는 10월 도서로 또 만나요, 언제나처럼!

비연 2020-09-27 15:20   좋아요 0 | URL
정말 함께 읽지 않았으면 이걸 다 읽어낼 수 있었을까.. 절감합니다.. 그래서 좋은 거구요.
함께 하는 즐거움을 새롭게 알게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10월 도서로... 2권으로 .. (흐미) 다시 만나야죠!

공쟝쟝 2020-10-05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데리다 이미 읽으셨던 언니셨댜...

비연 2020-10-05 09:51   좋아요 1 | URL
아.. 그냥 한두 권 정도씩만.. 잡다한 관심사의 맥락에서.
그러나 그닥 머리에 쌓인 건 없는 상태라... 더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