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기도 전에 이 책이 내게 맞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근데 이 책은 그랬다. 계속 보관함에 두고 급기야 사면서, 이 책은 나한테 맞을 거야 라는 절렬한 느낌이 쫘악 끼쳤었다. 그리고 요즘, 드디어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그 느낌을 확인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실비아 페데리치라는 근사한 사람과의 만남에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임금노동과 "자유로운" 노동자의 출현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는 맑즈주의적 시각은 재생산의 영역을 은폐하고 자연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또 <대캘리번>은 미셸 푸코의 신체 이론에도 비판적이다. 신체를 복종시키는 권력기술과 훈육에 대한 분석은 재생산과정을 무시하고, 여성사와 남성사를 무차별적인 단일체로 융합시키며, 여성의 "훈육"에 너무나 무관심하여 근대 들어 신체에 가해진 가장 소름끼치는 공격 중 하나인 마녀사냥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2)
마르크스와 푸코는 훌륭한 학자이고 시대의 흐름과 사상을 바꿀 만한 저작을 내놓은 사람들이다. 그들 이론 전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으나, 여성주의 책들에서 특히 최근의 책들에서 계속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어쩌면 어쩔 수 없는) 남성주의적 시각이다. 역사와 사상의 맥락에서 여성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음으로 인한 맹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이 언급에서도 나타났듯이 말이다. 이런 대목을 읽을 때마다 왠지 통쾌하다. 남들은 못 찾는 그 틈새를 찾아낸 그들도 멋지지만,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완전히 동감할 수 있다는 점도 멋지게 느껴진다.
<캘리번과 마녀>가 제기하는 더욱 심오한 질문은 자본주의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체에 대한 여성주의적 분석과 푸코식의 접근을 대비하는 데서 나타난다. 여성운동 초기부터 여성주의 활동가 및 이론가들은 남성지배의 근원과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의 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은 "신체"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주의자들은 여러가지 상이한 이데올로기들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인간의 능력에 위계적인 등급을 매기고 여성을 육체적 현실이라는 비속한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가부장적 권력의 공고화와 여성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착취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35~36)
사실상 우리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배울 수 있는 정치적인 교훈은 사회, 경제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항상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사회적 관계 속에 짜여진 모순(자유에 대한 약속과 억압의 만연이라는 현실, 번영에 대한 약속과 빈곤의 만연이라는 현실)을 착취대상(여성, 식민지 신민,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 지구화로 인해 갈 곳 잃은 이민자들)의 "본성"을 폄하함으로써 정당화하거나 애매하게 흐려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 따라서 사본주의를 해방과 연결 짓는다거나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능력 때문에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재생산할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신체에 새겨 넣은 불평등의 그 물망 때문이며, 착취를 지구화할 수 있는 역량 때문이다. 이 과정은 지난 5백 년간 그랬듯 아직오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에는 투쟁 또한 전 지구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p41)
이 내용들은 서론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들어가 역사적 맥락을 통해 어떻게 여성이 마녀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박해받게 되었는가를 짚어나가는 과정은 논리정연하고 사실적이며 재미있다. 사실, 그 내용 자체는 재미있다고 말하면 안되는 비참하고도 슬픈 역사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이런 재미를 주면서 심도깊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책도 드물다. 본래가 역사를 좋아하고 그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걸 좋아하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정말 최적의 책이 아닐 수 없다. 지금 1장까지 읽었는데, 앞으로도 여러 번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캘리번과 마녀>와 세트같은 책이라 하여, 아직 다 읽지도 않은 주제에 주문부터 덜컥 했다. 뭐 늘상 있는 일이라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속도에는 나조차도 놀랐다. 섬광같이 질렀다ㅜ) 이 책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올라가고 있다.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점점 쌓여만 가고 있지만, 이런 책들, <캘리번과 마녀>라든가 하는 책들을 접하게 되면 막 도전의식이 생긴다. 더 열심히 읽자, 이런 결심 아닌 결심도 하게 되고.
덕분에 7월의 책인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는 꺼내 놓은 것은 6월말이었으나 살짝 뒷전으로 밀려있다. <캘리번과 마녀> 다 읽고 봐야지 라는 마음도 있고 얇으니 금방 읽겠지 라는 마음도 있는데, 먼저 읽어나가는 분들의 페이퍼를 보니, 이게 얇아도 만만치 않아요, 라는 평이 지배적이라, 엥? 얼른 읽기 시작해야 하는 건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