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노벨레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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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슈니쯜러 | 꿈의 노벨레

my bloody valentine = (when you wake) you're still in a dream

 

욕망을 까발리는 순간 우리는 환상으로 들어간다. 환상은 욕망을 강화시키는 정력제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환상의 파괴가 욕망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떨어지지 않지만 그 합이 일정한 것도 아니다. 서로 기생해 살아남는 방식만이 유효하다.

 

[꿈의 노벨레]에서 그가 겪은 현실이 꿈이라 해도 그녀가 꾼 꿈이 현실이라 해도 그들이 만난 건 그들의 다른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역설적이게도, 낯설다고 느낄수록 더 깊이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이 나다.

 

내가 나와 제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것, 꿈이길 바라는 것, 그랬으면하고 바라는 것, 아니길 바라는 것까지 모든 게 나고, 나가 아닌 나고, 나가 아니었음 하는 나고, 나나 나였음 하는 결국 나다.

 

태엽 감긴 인형처럼 어떤 힘이나 원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살아지고 있다면 태엽이 풀리는 짧은 순간도 불길하다. 그 찰나의 순간은 완전히 낯선 것이기도 하고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도 해서 그들은 이러나 저러나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잠시 잊어버리려고 해볼 수는 있어도 버릴 수는 없다. 다시 결국은 돌아가게 돼 있고, 한 번 돌아가면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을 스탠리 큐브릭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든 탓일까. 소설을 읽지 않고서야 아이즈 와이드 샷이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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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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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 녹천에는 똥이 많다

suede = stay together

영화 "오아시스"의 활약덕분에, 대형도서관에서나 발견되었을 이창동의 92년작 소설집이 2002년 10월 문학과 지성사에서 재발간 되었다. 그의 최근작인 "오아시스"로 이창동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의 재발간은 다소 거북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창동 스스로가 그의 최근작을 '경계에 관한 영화'로 규정짓고 있지만, 바로 전 작품까지만 하더라도 진흙탕 같은 질펀한 현실 속으로 우리를 자꾸만 끌어당기던 그가 아니었던가.

이창동은 아마도 선천적으로 꾸미거나 둘러대는 것에 몹시 약했거나, 병적이면서도 의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소위 예술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극심한 사회적 병폐 속에 인간이라는 가치는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7, 80년대였던 것이다.

이런 그의 표현방법을 사람들은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떠밀려 있거나, 스스로 현실에서 멀어지기를 선택하며, 그들은 전자에 비하면 오히려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창동이 관심을 가지는 쪽은 후자 쪽이 아니다.

이창동의 관심사는 사회구조에 의해 노골적으로 밀려났던가, 밀려나지 않기 위해 그 속에 어정쩡하게 뒤섞여 끽 소리도 내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그는 철저하게 냉혹한 현실 속에 밀어 넣었고, 어느 순간에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 무력감의 끔찍한 마지막 순간들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잔인하며, 그 잔인성으로 무장된 내러티브로 읽는 이들을 수갑채운다.

이 소설집에는 5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실려있는데, 5가지 모두가 앞에서 언급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형식상 구조 또한 너무나 단순하다. 그가 현실을 꿈과 판타지(이 판타지라는 것은 영화 "오아시스"를 경계에 세우고, 앞으로 꾀하게 될 변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로 포장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문장 역시도 너무나 메말라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마치 오래되어 지린 냄새를 풍기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오징어를 씹는 기분이면서도, 그 인물이나 이야기구조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끝까지 그를 따라가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 실린 길고 짧은 소설은 꼭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는 분명히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7, 80년대를 피끓는 젊음으로 살아온 세대이며, 조악한 현실이더라도 그것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을 경계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진짜 사나이"나 "용천뱅이"는 소신을 지키며 사는 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색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운명에 관하여"는 인생을 지나친 우연의 장단에 맡겼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코 억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똥구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어린애처럼 소리내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녹천에는 똥이 많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서 그토록 버리고 싶었던 나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창동은 마지막으로 실려 있는 "하늘燈"에서 지금은 우리가 역사의 터널 속에 있을 뿐이라는 수임의 말에 '터널 저쪽은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라는 반문을 던진 채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비극 속에 비극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는 역시 그를 통해 그래도 터널을 건너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다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현실이 끔찍하게 두렵다면, 아직은 이창동을 피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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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들의 잠
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 지음, 안진태 옮김 / 자연사랑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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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 | 소들의 잠
 
그리고리스는 마음속으로는 이 우주적 봉오리를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걸어서는 이 산 저 산을 거쳐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가능했을지라도, 산마루를 아래에 남겨두고 걸어서 공중을 빙빙 돌아 마지막에 천개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눈으로는 공중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눈이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데, 이 때 많은 빛과 강한 시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이런 이유에서 가장 확실한 길은 천천히, 그리고 멀리 확실하게 가는 상상력의 길이었다. 이런 방식을 소위 '생사의 사다리'라고도 하는데, 이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미처럼 그것에 매달려 천개까지 기어올라 북두칠성과 은하수의 물결 위에서 산책한다.(p.48)

그러자 포도밭에 있는 올리브 나무 위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들렸다. 다음에는 나무와 잡초 뿌리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 소리가 들렸고, 마지막으로 3㎞ 떨어진 곳에서 아가피가 기르는 누에의 되새김질 소리가 들려왔다. (p.63)

그의 도피방식에는 나름대로의 지론, 인생철학이 담겨져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해보면 대체로 삶이라는 것이 일련의 사건, 즉 아침 일찍 시작되어 낮의 여러 가지 필요성에 의해 변화되고 형성되다가 밤에는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디케오스는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루의 사건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p. 68)

이렇게 나무 오르는 습관을 그리고리스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행동에서 어떤 치유력을 믿고 있었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거나 미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땅에서 벗어나 높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나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혹은 기둥 위에 있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 긴급한 경우에는 나무나 밧줄로 된 사다리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시급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한 바 있었다.
■■■한데 세상 사람들 중에서 근심 있는 사람이 바로 그 근심 때문에 직접적인 위험을 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그리고리스의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러나 갖가지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구원책은 나무 위로 몸을 날려 새의 세계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뭇잎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시도할 때 자신의 근심을 셋 이상의 사건과 관련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하면 나무나 근심 없는 새들의 사회도 그를 구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p. 99)

그러나 결국 모든 물체가 어떻게 무게와 가치를 상실하는가를 본 것은 그가 피를 사방에 흘리며 죽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런 깨달음과 변화는 인간 각자의 천성에 기인하는 것인데, 인간의 천성은 변할 수 없고 그밖에도 그것이 죽음 또는 몰락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p. 124)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살인을 했는데, 피살자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반대로 인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오랫동안 높이 떠있다면, 그 살인은 정당하며 신의 정의의 행위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p.136)

총을 맞은 자가 천천히 계속해서 소유물과 힘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주시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정의롭다. (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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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피살자, 살인자의 아들이 피살자가 되자 피살자의 아들이 살인자가 된다.

그리스 소설이다. 우연히 동네 서점에서 싸게 팔기에 사게 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감탄감탄해가며 읽은 것 빼고는, 그리스 소설이라곤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많은 문학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상한 일이지만.

소는 잘 때 눈을 뜨고 잔다고 한다. 살인자나 살인자의 아들, 혹은 친척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몇십킬로미터 밖의 소리뿐 아니라 마음이라는 장소에서 생기는 소리까지 다 듣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살인자는 피살자의 몸이 아주 오랫동안 공중에 떠 있었다는 이유로 그 살인을 신이 인정한 정당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매우 독특하다. 우선, 시점은 물론이고 시간이 마구 뒤섞여있다. <소들의 잠>에서 시간은 수직, 수평으로 마구 뻗어가다가도 시점마다 어지럽게 오가며 이상한 점들을 형성한다. 또 살인자가 살인을 행하고 난 후, 9일이라는 기간동안 들키지 않고 은신하는 방법 역시 무척 인상적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제대로 해보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농경사회의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신뢰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땅에서 한 가지 일을 하며,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 존재로서의 존재함을 수십 년이나 미리 겪은 그들의 말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나무를 탈 줄 안다면 내 근심도 해결이 될까. 정말로 끌리는 치유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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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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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 | quick space 2004/07/15 02:48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p.32)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p.41)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p.51)

저는 쓰네코(라고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기억이 희미해서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함께 정사(情死)를 기도한 상대방의 이름조차 잊어버리는 저입니다.)가 시키는 대로 긴자 뒷골목 어떤 초밥 노점상에서 정말로 맛없는 초밥을 먹으면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때 초밥이 맛이 없었다는 사실만은 어떻게 된 셈인지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p.60)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p.92)

저희는 그때 희극 명사, 비극 명사 알아맞히기 놀이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발명한 놀이로, 명사에는 모두 남성 명사, 여성 명사, 중성 명사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렇다면 희극 명사, 비극 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 예컨대 증기선과 기차는 둘 다 비극 명사고 전철과 버스는 둘 다 희극 명사다. 왜 그런지를 이해 못하는 자는 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 희극에 하나라도 비극 명사를 삽입하는 극작가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낙제. 비극의 경우도 똑같다는 논법입니다. (p.109)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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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1909-1948)는 약이나 의사, 목사, 중은 희극명사, 담배, 삶, 만화가가 비극명사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 삶이 비극명사인 이유는 삶이 희극명사이면 모든 명사가 희극명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죄와 벌이 유의어가 아니듯이, 삶과 죽음도 반의어가 아니다.

그런데 이 희극 명사, 비극 명사 알아맞히기 놀이나, 반의어 맞히기 놀이는 너무나 모순 투성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얼마든지 아닐 수 있다. 뭐든 삶에서 하나 깨달은 바가 있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이렇게 모순투성이일 수 밖에 없다고 하셨던 이성복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사는 것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다.

죽음이 행복해지는 길이고, 마음편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몇 번씩이나 애인과의 정사를 기도하고, 결국은 성공을 거두어 죽은 그는 더 자세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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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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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 하얀 성 | quick space 2004/07/21 02:07

 

"이미 죽기로 정해져 있으면 기어코 죽음은 찾아오는 것이지 왜 무서워한단 말인가?

자네가 매일 적어놓은 자네의 죄에 대한 기록 때문인가?"

역병이 돌자 극도의 불안감을 나타내는 ''에게 호자가 이렇게 되묻는다.

 

''는 포로로 잡혀가서, 스스로도 착각할만큼 자신과 닮은 호자 밑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다. 무서우리만치 자신과 닮은 호자의 포로가 된 '', 허황된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망상에 젖어 사는 호자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것이 '나는 누구일까'하는 물음을 호자로 하여금 자꾸 스스로 묻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조금은 효과가 있어서, 획기적인 무기-결국 하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될 무기이지만 이들은 아직 그 정확한 무기의 목적이랄까, 그 대상을 알지 못한다-를 만드는 일에서 잠시 빠져 나와 호자는 그 질문에 골몰한다.

 

호자는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워한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어한다.


'
'는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만들어가며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기록하고 자신의 추악한 단면을 과장하여 보여준다. 거기에 경멸을 느낀 호자는 자신의 노트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지만, 결국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노트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는 혼자서 찢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적어나가지만 결코 그것을 ''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가 만든 과거에 대한 자신의 기록은 호자와 내가 서로 언제라도 뒤바뀐 인생을 살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호자가 무기를 완성하며 술탄의 부대를 이끌고 결코 함락되지 않을 '하얀 성' 앞에서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 때, 호자와 ''는 서로가 살기 위해 둘의 인생을 바꾼다. 아니, 이미 그들은 하나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과거일 뿐이다.

호자로 살고 있는 ''는 끊임없이 그에게서 호자와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술탄처럼, 호자인지 나인지 모르는 여생을 살게 된다.

 

내가 나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상태. 과거만 공유한다면 미래는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는 호자와 나와의 관계. 끊임없이 '나는 누구일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하는 호자.

 

보는 순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거대한 하얀 성과 그 하얀 성을 무너뜨릴 무기를 위해 그들이 지내온 세월.

 

그리고 내 안의 수많은 호자. 나를 포로로, 나를 누예로 부리는 나와 똑같이 생긴 호자.

 

한 객체 속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의 호자에 대한 이야기.

 

절대 함락시킬 수 없는 하얀 성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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